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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선한 일을 위한 열망
사람이 믿음 가지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사는 것에 의해서이다. 이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나는 삶의 의무, 문제, 성공과 실패, 경험과 당혹에서 솔직하게 사는 것을 의미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의 팔 안으로 던져야 한다.
- 디트리흐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신약성경의 영성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것은 침묵의 시간, 교회 봉사, 피정의 주변에 남아 있는 것보다 우리들의 삶의 중심 안으로 은밀하게 들어온다. 만일 영성이 우리들의 삶의 견고한 사실적인 것과 실제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다. 야고보서가 우리들의 탐구에 이러한 결정적인 차원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인 서신을 검토하기 이전에 땅의 거룩함으로 끌어내리기를 주장하는 신학적인 이유들을 간략하게 찾아보기로 한다. 필연적으로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은 한 개체에 3개의 인격, 완전한 연합이신, 삼위일체이시다. 이것은 궁극적인 신비이므로 우리들은 감히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관계성 안에 존재하시며 세상이 있기 이전에 존재하신 아버지, 아들, 성령의 언약인 사랑의 관계이다(요17:24). 하나님은 외로워서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성경은 정확하게 그 반대임을 계시한다. 곧 하나님은 외로워서 우리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사랑이시며 우리들은 그의 사랑의 열매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16)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이시며 그리고 사랑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사이에 계속적으로 존재함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되어야 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영성은 신뢰, 부자가 그들의 부와 권세를 뽐내지 않으며, 가난한자가 그들의 부족함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어야한다. 야고보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떤 찾을 만한 언급을 하였다. 성경적인 영성은 본질적으로 상대성이다. 그것은 사람이 그의 고독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성육신(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은 영적 생활을 위한 패러다임이다. 말씀이 여러 가지 믿을 만한 방법 곧,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우주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심미적인 안에서 육신이 되어서 진정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셨다.
하나님은 조그만 한 유대인 아이로서 인간의 가정 안으로 미끌어지듯이 들어오셔서 나무 멍에를 만들며 갈릴리(아람) 방언을 말하며 유대인의 농담을 하는 장년으로 성장하셨다가 로마 교수대 위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실체와 부활이후 인식할 수 있는 육체를 가지셨다. 얼마나 더 인간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는 사람이 실재 세상에서 생명의 갈등과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고양된 마음의 상태로서의 영성에 흥미를 가지지 않으셨다. 그것은 다분히 불교적인 개념이다. 진정한 영성은 일하며, 돈 벌며, 섹스하며, 관계성을 가지며, 가치를 창출하며 가족과 살며, 정치도하며 이웃과 지내는 것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생활(생명)의 목표는 하늘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전형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영성은 세 가지 요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곧, 주일 성수, 수요 기도회와 개인적인 일상적 헌신이다. 오늘 날 이러한 것들은 거의 사문화되었거나 크게 실천되지 않고 있다. 카톨릭 영성은 전통적인 수도원적(현대 생활은 정상적인 압력으로부터 떨어진 삶을 사는 것) 신비적(하나님과 영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에 인도된 하나님의 고양된 초월적인 체험의 좁은 감각 안에서) 그리고 성직자(성례전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살며 일하는 자들을 위하여 가능하지 아니한 초월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개혁주의는 매우 색다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성은 신비화, 성직화, 개인화되었다. 반대로 성경적인 영성은 땅으로의 하강, 실제적 그리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가 보았드시, 야고보는 이 주제에 대하여 웅변을 하고 있다.
셋째, 인간적인 견해의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안에서 제시되었던 것과 일치하고 있다. 헬라의 개인적 특질(한 개인 안에서 육체와 영혼은 두 가지의 구분되는)의 이원론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영감된 저자는 인간의 몸은 단일체라는 히브리적 견해를 취하였다. 몸, 혼과 영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존재의 차원이다. 우리들은 몸과 혼과 영이다. 몸을 만진다는 것은 사람이 개인을 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라는 충격적인 일을 말하고 있다. 성적인 죄는 몸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인격에 영향을 준다(고전 6:18) 그래서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생명에 관섭을 하지 아니 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에 예수를 가져야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영성은 비전을 보거나 열광적인 체험을 가지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도리어 영성은 우리가 어떻게 돈을 쓰며 어떻게 말하며 들으며 가난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거룩함은 먹고 잠자며 일하며 놀며 웃으며 우는 것과 더불어 행하여야 한다. 진정한 영성은 구체화된 영성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에서 비구체화 된 영적 부상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육체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들과 재창조된 세계의 영원성에서 완전한 몸의 존재를 가지는 것이다.
지상적 거룩함으로 내려오기 위한 야고보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대한 네 번째 이유가 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역설에서 살기 위한 초대로서 예수님 안에서 이전 (옛)언약의 성취로 간주한다. 곧, 정서적으로나 육적 연약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강권하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력은 육체적인 연약함을 통하여 완전하여 지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들의 땅의 그릇의 실체를 통하여 계시된다(고후 4:7, 12:9). 성공적이며 부유하며 건강한 자들에게 복음은 세계의 커다란 부분을 깊숙이 붙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들 가운데서 그러한 문제로부터 구원하시지 않는다. 그것이 야고보서 안에서 계발하여야 할 열 가지 테마(주제)의 첫 번째이다.
영성의 문제들(약 1:1-18; 5:7-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1-2). 첫째 이것은 엉뚱하며 비현실적이며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우리들의 문제를 즐기려고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보다 깊은 일인 순수한 기쁨을 계산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반문화적인 그리스도인 생활관(인생관)이며,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어려운 순간에 행하실 것이라는 선한 일의 기대 안에서의 기쁨으로 시험들을 감당하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시험은 우리들의 가족의 뒤로나 인신공격으로부터 온다. 저자 자신의 시험은 다양성과 우리들의 갈등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기쁨 두 가지를 설명한다. 나는 완고하지 않는 가정에서 성장하였다(내가 나의 완고함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이미 이러한 사실이 축복으로 바뀌었다). 중학교 시절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를 배우기를 결정하는데 장애를 가지고 대중 웅변에서의 어려움을 가졌다. 저자는 여러 번 웅변대회에서 입상을 하였다.
어떤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믿는 결정으로부터 일어난다. 몇 년 전에 저자는 약속했던 교회에 나무 심는 일을 지원하기 위하여 생활을 위하여 목수직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체험이라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가족을 위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준비하느라고 투자한다는 사실에 저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일을 끝내고 또 다른 일에서 저자는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행정적인 책임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통상적으로 마지못해서 수용하곤 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저자는 행정적인 것으로부터 행방되기 위하여 이러한 직임으로부터 사임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공적인 인정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행정적인 역할들이 - 이제는 즐기고 있지만 -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시험은 저자의 부끄러움인 자신의 성격에서 또는 단순 성격 개발 이를테면 비평에 대한 지나친 감정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이유 없는 시험들 그리고 나이로비에서 폭도들에게 거의 죽을 번한 그러한 외관적으로 임의 문제들은 모든 종류의 시험 리스트에 추가한다. 야고보서의 메시지에 관하여 특별한 것은 시험을 성례로 고려한 점이다.
유혹으로부터의 구분(약1:13-15)으로서 우리들의 믿음의 시험이 실체로 들어나며 금속은 불에 위한 시험으로 찌꺼기를 제거한다. 우리들은 문제가 없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시험은 본전(약1:3-4)과 인내(약5;7,10)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내를 개발하기 위하여 가장 견고한 체험의 날마다의 체험을 사용하신다. 곧,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설명하는바 동일한 지시에 대한 오랜 순종이다. (1) 시험은 단순한 마음을 개발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내용들이다. 반대로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방법(약1:8)에서 불안하다. 불안정은 심리학적(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면에서 여기서 사용하지 않으나 인생의 안내라는 점에서 - 이곳저곳을 돌진하면서 환경에 의하여 휩쓸어가거나 그들에 의하여 유익함을 추구하기보다 시험에 대하여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환경에 의하여 통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압력에 대하여 투쟁하여 굽히지 않는 것과 경쟁의 부름에 의하여 혼돈하지 아니할 것을 바라신다.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은 환경(약1:9-11)에 의존되어진 만족을 따르는 것 너머에서 얻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특성을 개발과 인내력 구축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문제들을 사용하신다. 교실에서, 피정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체험의 순간 또는 기도에서 조차 인내를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시험을 만남과 그것들의 순수한 기쁨을 포함함에 의하여 인내력을 배운다.
인내(약5:7,10)는 인내력과 유사하나 약간의 다른 면이 있다. 인내력으로 우리들은 기다린다. 인내력으로 우리들은 견딜 수 있다. 인내로서는 우리들은 기다릴 수 있다. 우리가 일시적인 만족을 설정하므로 우리들의 봉사를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들의 삶의 일을 위하여 믿음의 완전한 실제를 위하여 기다리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믿음의 인내력으로서 시험을 체험하는 것에 의한 것보다 다른 인내를 위하여 준비하게 되는 길은 없다. 욥의 인내력이 야고보의 사례이다(약5:11). 욥은 인내의 부족에 기인한 질문으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기 않았다. 마침내 욥의 고통스러웠던 시험을 다루었던 일이 지혜(약1:5)는 내면에서 돌출하는 반면 그러나 그 고통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으나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시험을 통해서 유익해 지며 새로운 시험에 직면할 때 그것을 순수한 기쁨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자신을 불쌍하다고 끌어 내리지 않고 그 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보려고 기도를 한다. 성숙한 사람은 일이 완성될 때까지 그것에 머무른다. 인생에 대한 장기적인 견해가 우리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본다. 곧, 하나님을 보다 잘 알며 천국(약 1:12; 2:5)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험을 감싸않고 시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므로 면류관을 받게 되거나 또는 시험에 대하여 분개하거나 우리 자신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가지거나 승리 대신 희생되므로 면류관을 잃게 된다. 문제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동시에 거룩이란 들음으로 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다.
듣기의 영성(약1:9-21)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동일한 기본적인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곧, 두개의 귀와 하나의 입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두 배로 행하여야 할 이유에 대한 강력한 논증이다! 야고보의 강조점은 수량으로서 두 배라는 점이 아니라 준비로서 두 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1:19)
좋은 경청자란 말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 사역을 위하여 보다 더 중요하다. 복음전도에서 조차 말하는 것만큼이나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비정상적인 장소에서 좋은 경청자를 발견하게 된다. 때때로 조용한 사람들이 비경청자이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경청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각 사람의 신비함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좋은 언변가(言辯家)는 다른 사람들의 갈등과 기쁨에 대하여 깊게 듣고 영적 운동에 대하여 시작점(entry point)을 분별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 왔으며 자신 생애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운동)을 분별한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의 경험을 억지로 짜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은 자신의 말로서 다른 사람들을 양육할 수 있다. 목회자적 돌봄은 파울 사이몬(Paul Simon)이 노래한 격랑(험한 물결) 위에 놓인 다리로서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것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우리 자신의 인생 체험을 제안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사야의 노래 가운데 종처럼 우리들은 통치자 주님이 나에게 지시하신 혀를 주셨으며 피로를 유보하는 말을 알게 하셨다. 주님은 나를 아침마다 깨우셨으며 사람이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이 듣는 귀를 열어 주셨다. 곧,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50:4-5)
더 나아가 좋은 언변가들은 백성들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 곧, 그들이 성경에서 깊숙하게 듣는 법을 배웠다. 중세의 어거스틴의 대성당 참사의원인 힐톤의 월터(Walter of Hilton)는 성경의 외면적인 껍질을 갉으며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경청자로서 찾는다면 문맹자들에게 조차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열린 하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성경의 부주의한 성경 독자를 설명하였다. 우리들의 유흥으로 왜곡된 문화에서 성경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 기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예레미아(렘23:16-36)과 아모스(암8:10-12) 두 사람에 대한 말이다.
야고보는 들음으로서 말하기 위한 권리를 획득하는 무시간적 원리뿐만 아니라 듣기는 빨리하고 노하기를 더디게 하는 관계성을 개발하였다(약1:19).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게 하면 - 그들을 위하여 사람들의 말을 마치기를 거절하며 내부에서 진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기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 우리들은 분노를 덜 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단순히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분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가져오지 못한다(약1:20). 그래서 말하기를 더디 하는 인내의 혀는 열린 귀로부터 오며 듣기를 빨리하는 것은 보다 더 큰 평화로 인도하며 화를 더디게 하는 듣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할 수 있는 듣기와 분노의 관계를 교제 또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좋은 기술보다 이 장에서 더 좋은 것이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영성에 관련된 사건이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위치에 있게 된다. 대화하는 것은 또한 진실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들으므로 우리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응대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듣는 것은 경배의 행동이다. 들음에 의해서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며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존재를 필요로 한다. 들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우리들의 겉치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부인한다. 들음으로 해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며 그래서 보다 중요한 가치를 통용한다. 아마도 하나님 자신이 그의 사랑을 우리들을 위하여 최선을 보여 주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심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들의 심령을 드리는 만큼 들으신다.
귀 뚜껑이 눈꺼풀과 만나지 않는 것이 영성형성을 위하여 좋은 것이라고 판명이 났다. 연속하는 소리의 흐름이 우리들의 의식에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구체화된 영성을 개간하기위한 일상의 기회이다.
말하기 영성
거룩한 혀에 대한 야고보의 논쟁은 네 가지 점에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혀는 계시적(revelatory)이다(약3:2). 그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에 있는 것(마12:34)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나의 동료인 필(Phil)과 홀을 내려오면서 저자는 무심결에 입 밖에 내기를 ‘어이 필(Phil) 내가 먼저 그렇게 멀리 계획하는 이유를 아는가?’ ‘아니,’ 그가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계획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세.’ 그것은 미리 생각하지 않는 자체의 노출이었다. 히브리적인 생각에서 개인은 말씀 뒤에 서있으며 말씀에 의하여 계시된다. 그러므로 개인은 마치 그것이 대학의 강당에서 그날 했던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입에 의하여 나오게 된다.
둘째, 혀는 통제하기 어렵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약3:8). 이유는 단순히 개인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점이다. 셋째, 동일한 혀는 하나님 찬양과 사람을 저주하는 두 가지를 할 수 있다(약3:9-12). 이것은 언론(언쟁)의 자원이 순수하지 않으며 고려되어야 할 만큼 순수하며 결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 된 우리가 보다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 때문에(약 3:1) 가르치는 것을 열망하기 않는다. 그것은 심판을 받을 가르침이 아니라 선생의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말 - 속사람 - 의 근원이 만족되어지는 것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 성경적 인간론에서 사람은 입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말은 질문을 청한다.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종류인가? 쓴 사람은 쓴 말을 만들어내고 은혜로운 사람은 그들의 말에서 은혜를 나타낸다. 그래서 설교에서 설교자의 준비가 설교 준비보다 더욱 중요하다.
에베소서 5장4절에서 혀의 세 가지의 악한 말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세 가지 악한 표현이 있다. Aischrotes 는 외설이나 또는 부끄럼 없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추한 말이다. Morologia는 미련함은 어리석은 말 또는 벤겔(Bengel)이 말한 웃음을 위한 고기잡이 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말(골 4:6)에는 소금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막 9:50)안에 소금이 없기 때문이다. Eutrapelia는 거친 농담이거나 익살이다. 대신 바울이 말한바 감사하도록 하라(엡5:4). 야고보는 무화과가 감람열매를 맺겠는가?(약3:12) 라고 하는 말에 동의한다. 그것은 두 가래의 길이다. 곧,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나타낸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감사와 하나님의 축복과 인류를 실체화하기 위한 결정은 동시적으로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이 될 것이다.
야고보는 영적 제자로서 통상적인 대화조차 고려하기 위한 깊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말은 우리들의 내적 삶의 집합과 분해를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들의 관계성의 깊이에 직접적으로 간여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제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우리들의 말은 강력하다. 솔제니친(Solzhenitzyn)은 진리의 한 말은 온 세상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잠언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야고보는 혀로서 우리가 축복할 때(약3:9) 하나님에게 차이를 만들며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 관하여 또 그들에게 특별히 그들을 저주할 때 우리들의 말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통제받는 혀는 하나님 아래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의 정확한 자세이다. 우리가 성숙하게 자라므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통제 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우리들의 말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의 모든 것이 야고보서의 다른 주제와 양립한다.
행하는 영성(약1:22-27, 2:14-26)
야고보는 행하는 것과 존재의 분리를 거부하였다. 그는 우리가 가장 주된 존재가 무엇이며 우리가 가장 진실로 행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과 더불어 병행하는 것에 대하여 야고보는 또한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의 어떠한 분리를 거부하였다. 이 서한은 유대적인 특성을 가지며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에 의하여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매우 일찍이 쓰여 졌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이후 (고전15:7) 개인적으로 개심한 이후 예루살렘 교회(행15:13)의 수장(首長)이 되었다. 그러나 야고보서나 구약성경은 노력이나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서한의 메시지는 루터의 바른 짚 서한이라는 루터의 불행한 소견에도 불구하고 반 바울사상이 아니다. 야고보가 거부하는 것은 믿음의 지성주의와 -오직 내적 지향이지 외적 지향이 아닌 -신앙주의 이다. 바울과 같이 야고보는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심적 신뢰(약2:23-24)처럼 믿음에 의하여 나오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더불어 제자들의 믿음은 행동과 생명의 행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곧,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표현되지 않은 믿음은 예수 안에서의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생 라합(약 2:25)은 학문이 많은 신학자들보다 더 많은 믿음을 가졌다. 왜냐하면 정예제(ortho praxis)가 없는 정교의 교리는 그리스도인 정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말씀 위에 살며 행하는 내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실제적인 믿음의 분명한 지적과 사랑의 법(약2:8)의 지식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리들의 대본이다(약1:27, 2:5, 2:15-17).
야고보는 무작위의 일을 진행하지 않았으며 믿음으로부터 일어난 일들은 믿음을 고무시킨다. 루터의 선한 일에 대한 논증(증명)은 동일한 관점이다. 야고보와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영성을 위하여 변론했다. 야고보서에서 세 가지 근본적인 점이 나타난다. 첫째, 생각하는 것과 반향에 의한 만큼 진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나아올 수 있다. 믿음과 일은 상호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각각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인도한다.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를 위한 복음주의는 이것을 “행하라”(마19;21) 그리고 “이것을 믿으라”는 두 가지를 포함하여야 한다. 둘째, 우리들의 행위는 환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시적인 것이다. 과도하고 호색적인 그리스도인 봉사는 믿음의 실패를 표현한다. 동일한 방법으로 그런 것은 매마른 지성주의 또는 보상적인 행위 없는 명상을 한다. 그러나 셋째, 대부분의 서방 그리스도인 활동지상주의를 위한 해법은 명상이 아니고 믿음이다. 야고보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야고보가 밝힌 것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믿음과 일 두 가지이다. 그것은 믿음에 행위가 있는 견고한 차원을 개발하는 것이 지금은 적절한 것이다.
이웃하는 영성(약 2:1-13)
야고보는 매우 노골적인 죄인 기호주의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그것에 의하여 살기에 불충분한 사랑의 법을 붙잡지 않은 것을 보인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이웃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이러한 실패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우대 안에서 드러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3-4). 그러한 차별은 옷과 보석 같은 외적인 모양의 근거에서 일어나며 권세와 영향력을 위하여 인식된 자들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기인한 것이다.(약2:3) 일세기와 오늘에서 이러한 비그리스도적인 기호주의(favouritism)는 야고보가 개발하기를 갈망했던 무시적인 진리를 무시한다. 곧 통상적으로 부는 다른 사람들의 착취에 의하여 오는 것이다(약2:6).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조차 부자와 권력자를 선호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때때로 권력자가 무엇을 요구할 때 주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그렇게 한다. 동시에 가난한자와 권력 없는 자들이 공동체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에 대하여 우리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 우리들은 종교의 진리의 본질을 오해한다. 종교는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약1:27)이다. 만일 반대로 우리가 가난한자들에 대하여 이웃 사랑으로서 진실로 그들을 대접하려면, 평균하게 진실로 그들을 대접하여야 할 것이다.(고후8:13)
만일 사람의 법을 깨야할 심각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할 심각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유를 준 율법대로 사랑의 법을 말하고 있다(약2:12).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 있는 자와 권력 없는 자 모두에 대한 대답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자유를 발견했는가? 또는 그렇지 못했는가를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들은 권력자들 앞에서 위축 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이웃의 유익을 취하거나 또는 가난한 이웃들의 존대가 우리 자신의 부에 관하여 그러한 깊은 질문을 소지하게 되므로 우리 자신들의 약점을 그들이 나타내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야고보도 우리들로 하여금 갈고리를 벗도록 하지 않았다. 하나님 자신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가난해 지셨다(고후8:0, 빌2:1-11). 그래서 가난한 자와 권력 없는 자들에게 대한 태도는 예수님 자신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2:16:19-31)에서 지적하셨듯이 예수님을 향한 우리들의 진정한 태도를 나타낸다. 만일 그것이 영성 형성을 위한 동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들의 상처를 받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하여 자비와 긍휼 안에서 연락을 취하려고 할 때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을 만나신다.
아시스의 프란시스는 길에서 그를 만나 구걸하고 있는 나병환자 주변에 그의 말에게 길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두려움보다 그의 마음에 보다 강한 그 무엇이 있었다. 곧,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동전을 껴내어 그 사람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은 그날에 그 사람을 접촉하므로 그가 즉각적으로 무서운 질병에 감염된다고 믿게 된 이후로 행한 위대한 용기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손에 대한 키스는 사제에게는 일반적으로 유보되었던 일로서 또한 공손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상으로 그것은 계시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프란시스는 나병환자의 놀란 얼굴에서 이 생명 안에서 우리가 만난 이웃을 통하여 사랑하여야 할 우리들의 궁극적인 이웃인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마25:31-46). 이것을 풀어 놓으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동기의 내면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야고보가 가장 행하기를 염려하였던 것이다.
바램의 영성(약3:13-18, 4:1-3)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성숙과 리더쉽을 위한 영적 시험을 제시하고 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지혜스러운 사람의 자격은 관계적인 은혜이다. 곧, 지식으로 가득 찬 것보다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이 풍성(약3:17)하며 자기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형성을 위하며(약4:11-12) 그리고 시기보다 만족(약3:14, 약4:2)을 선택하는 관계성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모든 것에 관하여 야고보는 참된 지혜를 말하고 있다. 곧, 지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땅에서 비영적인 것으로 아래로부터 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며 위에서 온 것이다(약3:17). 바울의 서신에서 성령이 행하는 지혜(위에서 온)는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이다. 그것은 사람을 바로 세우며 육체로부터 구원하며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가져다준다. 지혜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에 바르게 관련되어 있을 때에 사는 길이다.
그러한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사람들을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정말로 그것은 우리들의 요구의 주요한 초점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이 없이는 우리들은 부당한 것을 요구하게 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위에서 이러한 지혜를 찾는데 실패 할 때,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굴복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안에서 다투는 갈망에 대하여 굴복을 멈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의 갈망의 상태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우리가 얼마나 지혜와 성령에 의하여 변화되도록 허락하였는가를 나타낸다. 우리들이 만족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불만과 탐욕이 사랑에 대한 실패를 나타내는 지수이다. 야고보가 염려하였던 그러한 탐심은 많은 틈을 옆보며 미묘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곧,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체험을 갈망하며 어떤 사람은 영적 은사를 어떤 사람은 결혼의 체험 혹은 어떤 사람은 건강을 바란다. 빌립보서 4장:4-19절에서 바울이 열거하는 사례와 직접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데에서 감사를 실천하고 직접적으로 창조적 행위를 실천하므로 불만에 대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나 야고보 어느 편이든지 사상적으로 나를 빈곤하게 할 곳이 없다. 칼빈이 말하는 감사란 선한 것들의 주요한 실천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감사는 좋은 삶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진실한 행위는 지혜로부터 나오는 겸손 안에서 나온다고 첨언한다(약3:13). 그러나 다음 주제는 어떻게 이러한 경견한 소망이 표현되어지는 가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개인적인 표현의 영성(약4:4-10)
야고보서에 까다로운 절이 있는데 그것은 전체 서한 가운데 곤란한 설명을 위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까닭에 간부가 된 독자들을 비난한 이후 야고보는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4:5) 라고 말한다. 피더 데이비드(Peter Davids)의 뛰어난 주석서에서 NIV의 각주에서 대안 독서를 위한 확신 찬 논의를 하였다. 곧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들의 영적 간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약4:5).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면 그는 우리가 보다 가깝게 가려(약4:7)는 의도보다 더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열정의 빛 안에서 야고보는 회개 안에서 전적인 응답을 요청한다. 그것은 의지(순종과 저항 약4:7), 영(가까이 나옴 - 약 4;8), 마음(마음을 순전히 하며, 여러분은 이중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감정통한, 슬픔 그리고 울부짖음 - 약4:9)을 포함한다. 우리가 들뜬 환희의 소리를 들었거나 공중 예배에서 죄에 대하여 울부짖음의 소리를 들은 마지막은 언제였는가? 균형이 잡히고 정숙하지만 그러나 거의 죽은 영성에 만족하는가? 통제를 잃어버림에 두려워하는가?
열정 없는 영성의 문제는 우리들의 정서 또는 우리들의 불편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거절하게 되어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무기력보다 더 깊다. 그것은 영적 마음의 이중성에 기인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원하나 또한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조차 그렇게 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어떤 것(요13:8-9)인 하나님과 관계의 통제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야고보는 큰 약속을 제시한다. 곧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겸손은 자신의 비하가 아닌 하나님을 향함이다. 그래서 가끔 우리 자신을 충분히 낮추는 시도는 - 겸손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위장된 자기-중심적인 것은 내적인 것이 판명되는 자만의 가면이다. 그것은 거짓된 겸손이다. 우리들의 열정은 -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시기하시는 사랑에 의하여 영감 된 -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곧, 커다란 교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한번 우리들의 공적에 기초한 우리들의 정체성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의 의미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증명하거나 증명하지 못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증명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 개성을 위한 자유의 궁극적인 자원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의 생명을 기획한다.
계획하는 영성(약 4:13-17)
저자는 기획가이다. 저자의 미래를 가능한대로 구사하는 저자의 흥미에 대하여 좋은 것과 나쁜 이유 두 가지가 있다. 때로는 2년 또는 3년 앞설 때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야고보의 경구에 도전을 받는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약4:14). 그러나 위태로운 상태에서 이슈는 사전의 고려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마 6:25-33)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그렇지 않으면 없이 계획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계획할 때 하나님 없는 우리들의 목표는 통상적으로 개인적인 성취와 우리들의 운명에 맡겨져 있다는 가정이다. 그것이 야고보가 “너희들의 생명이 무엇인가?”(약4:14)라고 물어보는 이유이다. 우리들의 계획이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들은 유연하여지려고 애쓴다. 곧 우리들의 자존심은 상처를 얻게 되고 실망 안으로 가라앉는다.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한 계획은 굳건한 영적 실체에 근거한다. 첫째, 우리들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5)라고 말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둘째, 우리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은 없어지는 안개로 비유하고 있다(약4:14). 셋째, 우리들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드리는 일이지 우리 자신의 성취에 관하여 자랑하며 뽐내는 일이 아니다(약4:16).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모든 관점에서 실체화되어지는 하나님의 목적을 보려는 우리자신의 계획을 단념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네 가지 요약한 언급에서 의미(내포)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수동적이 아니라는 진리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가 아닌 사람보다 단호하며 목적성 있는 자유인이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은 염려와 오만의 쌍둥이 의사 결정의 공포로부터 우리들은 구해준다. 계획이 우리들 구출하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들의 실수가 회복되어 질 수 있는 것 때문에 차이를 계획한다.
이러한 마지막 점은 페르시아 수제품 카펫이 만들어 지는 방법에 의하여 아름답게 설명되어진다. 직공의 밴드가 직기의 양편에 내려서 여러 가지 색상의 털실을 좋은 방향이라고 본 직공에 의하여 실 들은 정렬되어 있는 대로 삽입된다. 카펫의 다른 편에 서 있는 마스터 직공만이 앞에서 모든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실수를 하게 되면 마스터 직공은 색상 있는 털실을 뽑아내지 않고 다만 실수한 모든 디자인을 약간 수정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매우 상세하게 우리들의 삶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계신다. 곧, 놀라운 목적이다. 그러한 목적 안에서 계획을 변경할 자유가 있다.
그래서 계획은 영적 원리이다. 하나의 이유는 우리들의 계획 스타일이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에 의하여 결정되어 질 것이다.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마지막 연구인 종말론은 신학적 원리의 가장 목회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서방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역사의 진통이 이끌어야 할 것에 대한 가치 있는 끝을 예견하지 못한다. 신학자들은 미래를 직조하거나 또는 마치 미래란 없다. 라고 하면서 산다. 그러나 제자는 운명을 가진다. 그는 하나님이 가치 있는 완성에 대한 전체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가져오실 것이라고 안다. 이것은 매일 의사결정에서 씨줄과 날줄에 대한 의미를 준다. 나중에 발견하게 될 성경적 영성은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에 돌아오시는 것과 필요하다면 여러 세기동안을 기다리는 의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것을 계발하는 것이다. 현명한 처녀(마25:1-13)의 비유는 이러한 점에 대한 교훈이다.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결혼식에 오기를 기다렸다. 미루어졌기 때문에 모두 무난히 잠을 잤다. 모두 등장과 기름을 가지고 밤을 기다렸다. 그러나 현명한 처녀들은 오래 기다림을 대비하여 충분한 기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믿음에 있어서의 계획이다. 계획에 대한 실패는 - 사람이 미래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거나 일시적인 비움을 예기하기 때문에 - 오만한 권위의 행동으로서 미래를 그려 내라는 강요보다 더한 영적인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계획에 대한 우리들의 스타일은 우리들의 안전이 우리들의 환경을 통제하는 것 안에서 발견되어지며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 또는 하나님 안에 발견되는지를 나타낸다. 만일 우리들의 안전이 하나님 안에서라면 우리가 믿음 안에서 만든 계획이거나 아마도 특별히 그러한 것들에서 우리들이 계획을 변경시키는 것에 자유로울 수 있다. 오직 우상은 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시115:3-8). 우리들의 의도는 우리들의 계획을 삼가고 하나님의 통치의 간섭을 수용하는 우리들의 의도는 실제적인 일상생활 가운데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은 하시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방해 안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믿음 안에서 계획은 우리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을 나타내며 그것은 야고보서한에서 우리가 분별하는 다음 주제이다.
축적하는 영성(약5:1-6)
부(富)는 특별히 신앙의 깊은 시험이다. 역경에 직면해서 영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열 사람에 대하여 오직 한 사람이 그 번영에 직면하여 설수 있다. 이 글에서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서 상인급을 강조하였다. 약2:1-7와 4:13-17에서 간접적으로 강조한 신앙 공동체의 가장자리 또는 그것이 밖일 찌라도 토지 소유자 급을 견책한다. 야고보는 그들이 오는 처벌을 몹시 슬퍼해서 부탁했다(약5:1).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2-3) 이처럼 기죽게 하는 심판의 배경은 절박한 주님의 돌아오심이다. 야고보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중첩 가운데 교회가 서있는 견해를 가졌다. 바로 시험을 기쁨으로 얼싸 않을 수 있게 됐다(약1:2). 왜냐하면 보상이 곧 오게 되며 그래서 문에 서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친구(약5:9)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위로를 부자들에게 심판을 가져올 것이다.”너희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3). 이슈는 부유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갈취하여 부유해 지며 우리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약5:4). 피터 데이비드(Peter Davids)는 그의 주석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살며 세상이 영원히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마침내는 후회하며 의롭게 사용하기 위하여 재물을 내놓게 되는 마지막 기회가 이미 그들에게 임하였다(2) 라고 쓰고 있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와 일치하여 야고보는 부의 영성에 관하여 어떤 곤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착취하기 아니하고 부를 누릴 수 있는가?(약5:4) 어째서 부의 축적이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드는가?(약5:4)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우리들은 지적한 점에 대한 경우가 있음을 보았다(눅16:19-31). 어째서 누가와 야고보 두 사람 모두 사람이 이생과 다음 세상 두 곳에서 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는가?(약5:2, 눅6:20-26)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라(마6:20)와 하늘나라를 위한 친구를 얻으라(눅16:9)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눅12:21) 이러한 날카로운 질문들이 우리들로 부유한 서방 그리스도인들을 지속적인 재정적 후회와 청지기정신을 일깨운다. 이 편지의 요점은 야고보의 말씀의 정신에서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해설을 통하여 황금의 혀를 가진 설교가 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소유한 돈을 보관한 청지기이라고 했다. (3) 그것은 영적 의만 아니라 영성을 위한 이슈이다. 이러한 질문을 강조하지 않고 부자는 은혜롭게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밀어 낼 수 없다.
이 교재는 나를 만지고 있다. 비록 저자가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저자는 부자들 중에서 지구촌적인 가난의 빛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저자의 명상 중에 어떻게 부유해지며 영적 번영의 질문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이 글에 자신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첫째, 저자는 실제적인 길에서 적은 재산으로서 저자의 부요를 고려하여야 한다. 곧, 부유한 자는 자기의 낮은 위치를 자랑하여야 한다(약1:9-10). 둘째, 저자는 비록 상대적인 영향이 짧은 삶과 곧 지나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여야 한다. 부유함에 있어서 궁극적인 안정이 없으며 이것은 천국의 보화가 아니다(약1:11). 셋째, 저자는 부유함은 믿음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수긍하여야 한다. 곧, 불순물을 제거하면 남은 것이 순금인 것처럼 영성을 순수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험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소유권에 대한 라틴적인 견해를 거절하고 성경적인 청지기적인 히브리 견해를 수용한다.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자원을 가지고 위임했었다. 믿음은 그러한 반문화적인 삶을 요구한다. 사랑은 그것을 교감한다. 그리고 소망은 부와 가난 그리고 중간 계층일지라도 두 가지 모두의 약속을 가지고 미래를 가져온다.
치유의 영성(약5:13-20)
주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또한 치유를 위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병든 자에게도 긍휼과 자비(약5:11)가 충만하시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역에 대하여 어떤 환상적인 원점을 제시한다. 야고보에게는 그것은 공식적인 사역이다. 바울의 서신에 있는 것같이 치유의 은사적인 선물을 가지고 사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는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그것은 신적인 사역이다. 주님(치유자가 아니라)은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5). 그것은 일반적으로 죄의 고백을 포함하고 있는 속죄의 사역이다. 죄는 늘 그렇지는 않지만 죄악 된 행동에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협력 사역이다. 야고보는 병든 자를 만져서 낳게 하는 단독 치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고백에 의하여 특성화된 공동체 사역을 계획하고 있다(약5:16, 19-20). 그리고 단체 기도는 하나님이 고치심을 통한 도구이다. 야고보는 오늘 날에는 다소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나 초대 교회에서와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정상적으로 고려되었던 이러한 사역에 특유한 근원점을 초래하였다. 우리들은 어째서 치유의 사역이 병든 자와 치유자의 영성을 풍성하게 만지고 있는 점에 대한 어떤 내포된 힌트를 얻었다.
야고보는 어떤 질병은 개인적인 죄 또는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죄는 고백하고 고쳐져야 할 불건전한 삶의 형태를 포함할 수 있다. 감정이나 성적인 범죄가 있을 때는 많은 상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상처들이 통상적으로 관계된 곳에서 죄 된 행동을 이끌어 낸다. 일정 기간 이내에 사람이 조정되고 그리고 정상적이 된다. 다만 보상적인 정서와 갈망은 제외된다. 이를테면 과도한 분노, 방어적이고 탐닉 부족한 자신의 상상 또는 질투이다. 표상적인 사역은 보상적인 정서를 취급한다. 더 한층 탐사사역은 명백한 건강을 우선한 죄 된 행동을 취급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근원적인 죄 또는 균형을 무너뜨리는 개인의 건강을 노크하는 상처인 근본에 대하여 진행할 것을 충고한다. 다른 서한(고전11:30-32)과 시종일관된 이 서신은 공동체 회합의 배경 안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장로에게 만 아닌 공중에게 죄를 고백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본훼퍼(Bonhoeffer)는 함께하는 생명이라는 교재(학급)에서 이것의 전략적인 중요성에 대하여 노력하고 있다. (4) 공중 앞에서의 고백은 과거의 힘을 무력하게 한다.(그것을 말하므로 개인에게 주어진 비밀한 권세를 제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리와 긍휼 위에 근거한 공동체를 세운다.
치유에 대한 지루한 논쟁에 대한 야고보의 공헌은 공동체의 영성 형성 안에서 치유 사역의 역할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 자신의 풀리지 않은 상처와 죄를 취급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멤버를 다른 세력 안에서 고백을 수용하며 죄와 질병을 취급한다. 그들이 실제의 죄에 대하여 들었을 때 이것이 행하여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버리거나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만일 도움을 찾는다면 병자의 믿음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과 기도를 찾게 되면 공동체의 믿음이 증가할 것이다. 야고보는 다만 장로만 뿐만 아니라 엘리야(약5:17-18)처럼 기도의 능력이 있는 일반적인 사람을 지적하므로 이것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일로서 치유, 일반적인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 구원을 나누며, 그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처럼 아름다운 약속으로서 그의 서신을 마친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야고보는 거룩을 땅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곧 모든 거룩함은 우리가 어떻게 말하며 우리들의 돈으로 무엇을 하는가이다. 야고보는 우리들의 영적 생활이 조용한 시간, 교회 봉사와 휴가적인 피정 등과 같은 환경에 위치한 것이라는 점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교 영성이 아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또한 다른 근본적인 진리를 주장하였다. 우리들은 완전한 그리스도 영성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각자가 필요하다. 요한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이러한 방법을 충고 받았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혼자서 섬길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친구를 찾거나 그러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독립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5)
야고보는 동의한다. 진정한 영성은 일로부터 우리들의 자유로운 시간 안에서 초월의 순간을 위하여 유보된 휴가 시간이 아니다. 더구나 고독한 여행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상생활 주변의 자갈투성이 안에 있는 우리를 만난다. 그리고 신성함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조차 변화시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