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아주 난해한 말씀은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은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며 불가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던진 말씀의 검은
무엇보다도 외식의 종교를 비롯하여 거짓의 굴레와 그 속박에서 해방하고
진리로 자유케 하는 시대선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심각한 가정 문제인 사랑과 전쟁은
시월드와 처월드로 양립되어 있습니다.
시월드가 강하면 며느리가 생고생을 하고
처월드가 강하면 사위가 사랑과 전쟁의 한가운데 놓입니다.
시월드와 처월드의 중심에 있는 가정은
사랑과 전쟁의 연속입니다.
비단 우리 사회는 가정뿐만 아니라
지역과 세대, 그리고 이념의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각 분야의 전문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고수와 달인, 그리고 프로폐셔널한 삶의 유형이 리더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정과 정치만은
사회 발전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전문성이 떨어지는 곳이 가정이요,
모리배로 가득한 정치인 것 같습니다.
가정의 전문성은 사랑이라는 최상의 비전술이 있지만 가정의 파괴로 이어지고
정치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였지만 정치 실종이라는 폐허만 남았습니다.
가정 행복의 달인과 정치 10단의 거장이 요원한 가운데
가정의 행복은 깨어지고 사회의 분열은 활화산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화평이 아닌 말씀의 검을 던졌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이요,
사랑이 아니라 집 안 식구가 원수라는 메시야의 카드를 던졌습니다.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시대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며 분명한 목적성을 가졌습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을 모델로
화평의 복음이 아니라 갈등의 검을 던졌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반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대립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나와 분쟁하는 갈등 구조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행복의 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의 울타리는 행복과 이상으로 위장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욕망의 굴레, 그 자체입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연애질하는 것은
애욕이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발로가 애정이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소위 결혼을 통한 가정의 울타리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애초에 욕망의 굴레라는 화근을 안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은 타인의 정죄로 이어지고......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반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대립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나와 분쟁하는 갈등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사회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파탄은 항상 폭풍 전야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가정의 불안은 사회적 갈등으로 발전하여
지역과 세대 뿐만 아니라 이념의 갈등으로 우리 사회는 좌초되고 있습니다.
살롬이라는 인삿말로 평화를 구현하는 유대사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메시야의 메세지를 던졌습니다.
잘못된 메시야 대망 사상과 신앙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분노를 샀습니다.
예수님은 가정과 사회의 잘못된 구조에 대해서
메시야의 권위로 강한 메세지를 던졌습니다.
불안정한 가정과 사회는
메시야의 검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 합당해 질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검으로 불안정한 가정을 해체하고 갈등 구조의 사회를 난도질해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듯 진리의 복음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나야
천지의 주재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덜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과
더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당시 유대와 로마의 사회상은
지역과 세대, 그리고 이념의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던지 메시야의 복음은
원자탄보다 더 강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이요,
화목이 아니라 가정 불화를 만들겠다며 던진 예수님의 메세지는
메시야인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은 합당치 않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가지고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메시야를 따르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가정의 화목이 아니요, 사회의 평화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는 구속의 은혜를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적인 소통과 통합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원주의적인 소통과 통합, 그리고 공감은
인본주의적인 외식에 불과합니다.
가정 사역과 치유 사역은
심리적 갈등과 정신적인 문제를 인본주의 복음으로 적용한 편협일뿐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통합을 평화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통하고 통합하며 공감하는 가정과 사회는
다원주의 이상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진정한 가정의 화목과 사회적 평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욕정으로 이룬 가정의 화목이란
결국 가정 파탄이라는 폭풍 전야의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메시야의 길을 따르지 않는 가정과 사회는
용서받지 못하는 십자가로 인해서 반목과 갈등과 대립으로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거룩한 변화를 통해서
오직 예수의 믿음과 사랑을 전하는 충성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자기애로 타인을 사랑하는 삶의 패러다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호남이 영남을 배려하고 영남이 호남을 배려하며.....
진보가 보수를 위하고 보수가 진보를 위하는 삶의 패러다임은
반목과 갈등과 대립의 가정과 사회를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를 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은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첩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을 더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전쟁이 없는 가정의 화목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없는 사회적 안정과 평화 역시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믿고 사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정죄는 자기를 향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인을 배려하면......
사랑과 전쟁의 종결자가 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화평의 검을 가진
참 빛의 나라 백성이 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정죄의 삶은 진정한 회개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나누고 베푸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평화를 넘어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목적이요, 목표며, 중심입니다.
대중문화의 꽃은
썩어지는 세상 나라 삶의 가치일 뿐입니다.
진리의 자유로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말씀의 검을 던진 메시야의 카드는
성령의 검으로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한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아름답게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