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친 종
(신 23:15-18)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에 따라 출애굽 시키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태내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30년이나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전에 여러 가지 율법을 주시는 것은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9:4-6절입니다.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죄로 인하여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는 것은 온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리시기 위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도 단번에 출애굽 시키실 수 있으시지만 10가지의 재앙이 쏟아짐을 통하여 애굽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여야 하는 나라입니다.
15-16절입니다. 종이 주인을 피하여 도망쳐 나왔습니다. 얼마나 주인의 학대가 심하였으면 도망을 쳤겠습니까? 도망치다가 잡히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 각오를 하고 도망쳐 나왔던 것입니다. 이 당시 다른 나라의 법은 종이 도망치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만약에 종을 은닉하고 있다가 들키면 보호하여 준 사람까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을 그 원 주인에게 돌리지 말고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에 살게 하되 네 가운데 함께 거하게 하고 압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법을 주신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으로 살았다는 것과 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잊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종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하는 것도 다 그런 차원입니다. 단지 주인에게서 도망쳐 온 종만을 이렇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들 중에서도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으로 가산을 다 허비하게 되면 빚으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도 6년을 주인을 섬기면 7년 안식년 때에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해방시킨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5:12-15절입니다.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이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법을 잘 지켰을까요?
예레미야 34장 8-11절입니다. “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시드기야 왕 때 모든 백성과 언약하기를 히브리 노비를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준 노비를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2-16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들을 이끌어 낼 때에 언약을 세웠습니다. 종에 대하여 7년 째에 자유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들이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드기야 왕 때에 나라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위기에서 모면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종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언약을 세우면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적들이 잠시 물러가자 다시 종들을 붙잡아 와서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17-22절입니다. 언약이란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언약을 체결하면서 종을 자유롭게 하였는데 다시 종을 삼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위기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다가 조금만 숨통을 트이면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죄인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나가며 언약을 체결한 것은 언약을 배반하면 쪼개진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언약이기에 그 원수의 손에 부쳐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시드기야는 자기 목전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한 후 두 눈이 뽑히고 묶여서 바벨론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고 유다가 망하게 됩니다.
종을 자유하게 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자신들이 종으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다시 70년을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서 신실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에 하나님이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구경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언약이 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에 모세를 통하여 상호언약의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가 쪼개진 송아지 사이로 지나가게 하심으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자기들도 목숨으로 언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다시 종으로 팔려간 것입니다. 그 종살이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 때문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과 포로 중에 또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를 예언하였습니다. 참된 희년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희년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셨지만 어떤 새로운 법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회 운동이나 개혁을 통하여 이루어 내시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참된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으로 종을 자유하게 하라는 법을 받았지만 그들의 욕망을 그들의 탐심을 그들의 죄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을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죄와 사망에 묶여있는 자들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하는 것입니다(롬8:1). 그 결과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고린도전서 7:20-24절입니다.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세상에서 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라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주일오후에 빌레몬서를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만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종이 오네시모입니다. 주인이 학대를 한 것 이라기보다는 종이 잘못하여 도망친 것으로 보입니다. 빌레몬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복음을 믿고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형제로 맞이하여 줄 것을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사회의 제도나 법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복음의 능력으로 종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도 수많은 노예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아이티 공화국에 대하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얼마 전에 게시판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나라가 흑인 노예들이 주축인 된 나라인데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고 흑인혁명이 성공한 최초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정권을 차지한 자들의 부패와 권력욕으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가난한 자들의 아이들을 가사를 돌보아주는 조건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학교를 보내준다고 하고서는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을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이런 노예들은 가난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도 또 다른 노예입니다. 노동을 하기위하여 사는지 살기 위하여 노동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일에 메여 삽니다. 아이들은 공부에 메여 삽니다. 부모들은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또 돈에 메여 삽니다. 이런 세상에서 남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족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욕망의 종이 되어 있기에 자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독립하고자 한 죄로 인하여 추방되고부터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수고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이런 세상에서 발 딛고 살지만 종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도망쳐 나올 능력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출애굽 시키시듯이 출 세상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종노릇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도망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위기에 처하면 종을 자유하게 하다가 숨통이 트이면 다시 종을 잡아 오듯이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하늘에서는 일이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종의 제도에 메여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나라 다시는 경쟁이 없는 은혜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종노릇하기 위한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결코 실패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며 보이지 않는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 영원한 나라를 영원하신 주님이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이라면 비록 이 세상에서 종노릇하고 살지만 그것은 잠깐인 것을 압니다. 자신의 종 됨이 영원하지 아니할 것을 알기에 종이라도 자유자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25절입니다. “봉독”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된 것은 굴복하게 하신 분으로 말미암습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 허무한 것에 평생 굴복하며 사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살지만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이겨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