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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조상호 목사
목욕탕이 흔하지 않던 옛날, 어느 시골에 사는 한 청년이 장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평생 처음으로 읍내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보니 그 안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내일 장가가는 놈들 되게 많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기준에 맞으면 잘된 일이지만,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체험한 경험을 가지고 잘된 일과 잘못된 일을 구분합니다. 일반상식을 모든 판단의 잣대로 삼고,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의 경험과 세상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많이 배운 사람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이나 경험이 많은 사람, 등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과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학력이나 가문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십니다.
오늘 본문을 등장하는 엘리야를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혼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맞짱 떠서 승리하기도 하고, 7번씩이나 기도한 끝에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내리게 하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등,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5장 17절에 의하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정이 같다‘는 말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쁠 때 우리처럼 엘리야도 기뻐하고, 슬플 때 우리처럼 엘리야도 슬픔을 느끼고, 낙심이 될 때 우리처럼 엘리야도 낙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자라온 환경이나 가문 등의 출신 배경이 특별하게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짧은 한마디가 그에 대한 프로필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프로필치고는 너무나 짧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부모님이나 출생배경이나 직업이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 흔한 소개마저도 없이, ‘디셉 사람 엘리야’라고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디셉’은 성경 중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을 만큼,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깡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디셉이라는 시골 출신의 촌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모세처럼 어릴 때부터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많은 공부를 한 엘리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 이삭과 같은 훌륭한 조상을 둔 야곱처럼, 가문이 좋았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디셉이라는 시골출신의 촌놈이며, 현재도 길르앗이라는 촌동네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엘리야를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골 출신 엘리야를 쓰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엘리야처럼 지금까지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들처럼 내세울만한 가문이나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1) 환경을 극복하라
첫째로,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엘리야는 분열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북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에 이르기까지 다 악한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장인 열왕기상 16장 25절을 보면, 6대 오므리 왕은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6대 오므리 왕에 이어 등장하는 왕이 7대 아합 왕입니다. 그 역시 아버지 오므리처럼 악을 행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3절을 보면,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노하시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합 왕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그렇게 악한 왕이 된 배경에는 이세벨이라는 부인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나라의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시집올 때 바알 신상과 아세라 목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합 왕으로 하여금 우상들에게 경배케 했으며 신하와 온 국민들에게까지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왕부터 시작하여 신하들과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까지 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났던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서 자랐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극심한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심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정도로 영적으로 깜깜한 암흑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환경을 극복하였습니다. 처한 환경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절망적인 솽황을 극복했습니다.
유럽의 한 박물관에 가면 유명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고 합니다. 마귀와 사람이 장기를 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마귀는 “장군이야!”라고 외치고 외통수에 걸린 인간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마귀는 장군을 외치며 신바람이 났습니다. 언뜻 보면 그야말로 외통수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최후의 한 수는 언제나 남아 있다.”
때때로 우리가 보기에는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최후의 한 수는 남아 있습니다.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습니다.
지금 몸이 아프다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지금 사업이 어렵다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지금 공부 못한다고 꿈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지금 가난하다고, 지금 취직이 안 되었다고, 지금 부도가 났다고,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 한 수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외통수에 걸린 판도 뒤집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역전 시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는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처한 환경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뒤집기의 명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엘리야처럼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타협하지 마라
둘째로,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엘리야 시대 많은 사람들은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무서워서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세상에 적당히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합 왕이 무서워 도망쳐서 동굴 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숨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엘리야도 얼마든지 타협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엘리야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잘못하면 엘리야는 아합 왕에 의해 당장 목 베임을 당할 수도 있고, 불에 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 왕은 바알과 아세라 신이 진짜 신이고 그 신을 믿는 것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아합 왕에게 전한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신은 바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가 나의 신입니다. 그 분은 죽어있는 세상 신과 달리, 살아계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할까봐, 학교에 가서는 예수님 믿지 않는 척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 다닌다는 것이 알려지면 비즈니스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지 않는 척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쟁 업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 출석하시는 한 집사님이 설렁탕 가게를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앞으로 설렁탕 가게를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누가복음 6장 31절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설렁탕을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두 가지 경영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설렁탕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최고만을 쓰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정성스럽게 설렁탕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적자가 났습니다. 6개월 동안 적자가 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근처에 설렁탕을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장사 비법을 알려주지. 국물을 좀 더 뽀얗게 하려면 커피를 탈 때 쓰는 프림을 넣어 색깔을 내면 돼.“
그 분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대로 프림을 넣자니, 양심에 자꾸 걸렸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기도를 드렸더니, 다시 누가복음 6장 31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그 집 설렁탕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식당이 잘 되어 많은 돈을 벌었고, 꿈에도 그리던 자기 집도 사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는 지방의 한 학교가 있습니다. 경상남도 거창군에 소재하고 있는 거창고등학교입니다.
그 학교에서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직업 십계명’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세상의 변칙을 동원하기보다 비록 당장 이득이 없어도, 좀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승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칙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에 순종하라
셋째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아합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3~4)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내로 숨으라고 강권하십니다. 설명도 하지 않고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엘리야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하시려면 아예 좀더 기다리신 다음에 저를 부르실 일이지. 왜 선지자로 부르셨다가 다시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십니까? 지금 저를 보고 있는 백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제가 지금 숨으면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비겁한 놈이라고 수군거리지 않겠습니까? 뭐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신다고요? 지금 제가 먹고살려고 선지자가 된 줄 아십니까? 아니 하나님,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이러십니까? 저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선지자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접받으려고 선지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숨 걸고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더러 숨으라니요? 제가 쪽 팔리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까? 왜 그러한 명령을 하십니까?”엘리야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엘리야가 배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훈련이었습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아합 왕에 대항해서 싸우는 용기가 아닙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순교가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래 ‘그릿’이란 말은 ‘단절’이란 뜻입니다.
그릿 시냇가는 세상과 단절된 곳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가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5절에서 “그가 야훼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자기의 기준과 맞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그래도 순종했습니다.
엘리야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가서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역시 그릿 시냇가에는 아무런 음식도 없었고, 자기를 도와 줄 어떤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시냇물만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까마귀 입에는 떡과 고기가 들려있었습니다. 이 까마귀들은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썩은 음식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울 만큼 까마귀는 욕심이 많은 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 많은 까마귀가 아침, 저녁으로 고기와 떡을 가져다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까마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엘리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떡과 고기가 없어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살 수 있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못할 일이 없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비결이구나.”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의 순종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 가지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으며 순종하기를 꺼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형편과 사정을 들어가며 ‘엘리야는 그럴 수 있지만 난 처지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하며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 것만 불순종이 아니라, 지체하며 망설이는 것도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아람나라의 나아만장군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서 문둥병이 깨끗해지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여리고성을 6일 동안 매일 한번씩, 7일째는 일곱 번 돌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여리고성 무너지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효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 생일잔치를 배설하여 많은 귀빈들을 초청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곳에 참석했던 프랑스 대사가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자녀를 키우셨길래, 이렇게 훌륭한 분을 만드셨습니까?”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 가르쳤습니다.”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미국을 기독교 신앙위에 세우는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의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순종에는 말씀하신 분에 대한 존경과 믿음과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성 프란체스코가 제자를 뽑을 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제자 후보생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잎과 줄기가 밑으로 가고, 뿌리가 위로 가도록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프란체스코 선생님이 잘못 말했을 거야”, “선생님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말 그대로 순종하여 배추를 거꾸로 심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만이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왜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종함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을 때 까마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 좋은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머리 좋은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준과 맞지 않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였던 D. L. 무디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837년에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공부대신에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두를 수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19세 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시카고의 플리머스 거리에 있는 한 회중교회를 찾아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가 초등학교 5학년 학력인 것을 알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스스로 학생들을 모으면 그들을 가르칠 수는 있다는 조건부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후 무디는 거리의 불량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청소년들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 둘씩 예수님을 믿는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500명이 넘는 주일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한 번의 설교로 수 만 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어떤 대학교수가 찾아와서 “무디 선생님, 오늘 선생님께서 설교하신 말 중에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50곳이 넘습니다.”라고 지적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무디는 보통망신이 아니었지만 “옳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설교에서 어법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오늘 저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수백 명이 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짧은 어법과 지식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학력이나 경험이나 가문 등의 외적인 조건이 훌륭한 사람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과 전혀 다릅니다.
D. L. 무디와 엘리야처럼 내세울만한 가문이나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처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엘리야처럼 뒤집기의 명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엘리야처럼 비록 조금 손해를 본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함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을 때 까마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던 엘리야처럼,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