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날을
/ 법정 스님
오늘은 바람이 몹시 분다.
까칠까칠한 삭풍(朔風)이
혼이 빠져버린 가랑잎을 이리 몰아가고 저리 몰아간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집 뒤 굴참나무에서
똑똑똑 쪼던 딱따구리 소리도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햇볕이 밝은 창 아래 놓아둔 이끼 돋은 돌이 한결 새파랗다.
재작년 겨울, 방안에 생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좀 팍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싱싱한 생명의 빛깔인 초록이 차단된
겨울철 산방(山房)은 삭막했다.
이끼 돋은 돌이라도
하나 주워다 놓을까 해서 개울가로 내려갔다.
한 곳에 이르니 반쯤 물에 잠긴 돌이
온몸에 융단 같은 파란 이끼를 쓰고 다소곳이 있었다.
내 주먹만한 크기인데, 하얀 수반에 담아 놓으니
방안에 운치가 감돌았다.
언뜻 보면 마치 토끼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다.
이따금 물을 갈아주면서 한겨울을 우리는 사이좋게 지냈다.
내가 건네는 말을 돌은 잠잠히 듣고만 있었고,
그의 침묵을 나는 귓속의 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방해됨이 없이
각자의 할 일을 하면서 한 방에서 살았다.
골짜기에 얼음이 풀리고
매화 가지 끝에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는 초봄,
우리는 '기약 있는' 작별을 했다.
겨울철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때 그 자리에 갖다두었다.
작년 겨울에도 그 돌은 나와 함께 우리 방에서 지냈었다.
생명의 신비라더니, 작년에는 뜻밖에도
그 돌에 석창포(石菖浦)가 서너 줄기 돋아 있었다.
이제는 갈 데 없는 귀가 솟은 토끼였다.
그저께 큰절에 내려가 화봉 스님 기재(忌齋)를 지내고
올라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돌을 데리러 그 개울가로 갔었다.
지난여름 장마로 흘러내린 토사에
혹시 묻히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면서 두리번거렸는데,
그 돌은 저만치서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 년 사이에 석창포는 세 포기로 갈라져
열여섯 줄기나 무성하게 잘 있었다.
삶은 정말 놀라운 신비다.
인도의 세계적인 스승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표현을 빈다면,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하나의 위대한 신비이고
우리들의 생명이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나라다.
먹고 살기 위한 돈벌이에 그친다면
우리는 삶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진실로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젊어 있을 동안 삶을 알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황폐한 내면을 지닌 채 늙어갈 것이다.
밖으로는 돈을 가지고 미끈한 차를 타면서 뽐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무디고 텅 빈 사람이 될 것이다.”
역시 크리슈나무르티의 말.
한겨울 우리 '토끼'는 이따금 갈아주는 샘물과
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창호로 비쳐드는 햇살을 먹고 살아간다.
그리고 내 눈길에서 삶의 은밀한 뜰을 가꾼다.
우리는 서로가 말없이 주고받는 눈길을 통해
존재의 잔잔한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해가 또 뉘엿뉘엿 기울고 있다.
몇 해 전 섣달 그믐날의 그 체험이 되살아난다.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려고 하다가,
문득 '내 나이가 올해 몇이더라?' 하는 생각이 미쳤다.
나이를 세거나 의식할 일이 없는 처지여서
새삼스런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먹은 나이를 헤아리다가,
‘아니, 그럼 내일모레면 50이 되게?
머지않아 60, 70?’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질없이 살아버린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훨씬 많은 걸 뒤늦게 알고
내 생이 새삼스레 허무감으로 휘청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돌이켜지는 생각.
그래 사람이 만약 1백 년, 2백 년을 산다고 해서 좋을 게 뭔가.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얼마나 추하고 천해질 것인가.
수목은 오래될수록 늠름하고 기품이 있지만,
사람은 살 만큼 살면 헌 수레와 같이
삐그덕삐그덕 고장이 많고 주책을 떨다가 추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살 만큼 살았으면
생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소식일 것이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지는 것도
지금까지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많이 보았고,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많이 들었으니,
늙어서는 시시한 것은 그만두고
꼭 필요한 것만을 보고 들으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하직하면 억울하고 서운할 테니까
조금씩 사그러져가는 연습을
미리 해두라는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생명의 질서요,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도 있고,
열 살도 못되어 안쓰럽게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20, 30세 안에 비명에 가는 사람도 무수히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기구한 세월에 반세기 가까이 살았으니
이제 죽는다 해도 억울한 것은 조금도 없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조금 전의 그 아찔한 허무감은 이내 지워지고 말았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인간답게,
내 자신답게 후회 없이 사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다가섰다.
90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몇몇 노스님들의 임종을 보면서 절실히 느낀 일인데,
사람이 너무 오래 사는 것은 본인이나
둘레 서로에게 짐이고 욕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그 기능과 역할이 끝나는 그 날로 미련 없이 몸을 바꾸고 싶다.
몇 날을 더 연명시키기 위해
비쩍 마른 팔에 주사바늘을 꽂는다거나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인다면,
나는 그런 이웃에게 화를 내고 심히 원망을 할 것이다.
사람은 살 때에 빛이 나야 하듯이
죽을 때에도 그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생과 사가 따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겉과 속의 관계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원고 분량에 따라 중략)
고려 중기의 뛰어난 선사 진각 혜심(眞覺 慧諶)은
정월 초하루 아침,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에게는 한 살이 보태지고
노인에게는 한 살이 줄어지면,
늙고 어림에 상관없는 이에게는
줄지도 않고 보태지지도 않을 것이다.
보태고 줄어짐이 있거나 말거나
모두 한쪽에 놓아버려라.
놓아버린 뒤에는 어떤가?"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는 살아있는 용이
어찌 썩은 물에 잠겨 있을 것인가.
해를 쫓고 바람을 따르는 용맹스런 말이
어찌 마른 동백나무 밑에 엎드려 있을 것인가.
날마다 새날을 이루소서. (1983)
-『산방한담』中에서-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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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잔잔하게 뒤돌아보게하는 큰스님 말씀
이야기 하신듯 가까이 닿습니다.
개울에 돌하나 주워 오셔서 방안에두고 사랑하시는 스님의
자상하심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나이가 많아진다는건 수레가 삐걱이듯이 고장이 나는것이라고
당연히 받아드리십니다.
날마다 새로운날 되소서....._()_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사셨던 법정스님의 글이 삭막한 겨울에 훈풍이 도는듯 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