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내가 박정희 후계자? 권력 넘겨줄 분 아니었다” (6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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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이프(If)’라는 가정은 아무 가치가 없다. 가정법은 역사를 얘기할 땐 절제해야 한다. 하지만 18년 정권, 종말의 무대에 아쉬운 대목이 없을 수 없다.
가장 큰 아쉬움은 육영수 여사가 비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면밀한 생각과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978년 12월 9년3개월간 박 대통령을 옆에서 모셨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퇴장도 아쉬운 장면이다. 그는 청와대 최고참(69년 비서실장 임명) 측근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보다 5년 빨랐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보다 7년 앞섰다. 그런 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 현대사 소사전: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핵심 권력기관장. 인사·정책·정무·사정(司正)·홍보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한다.
대통령 면접조정권을 갖고 있다. 이 시절 비서실장은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등과 협력하며 견제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후락(63~69년) 비서실장은 3선개헌 등 고도의 정치업무에 개입했으며 김정렴(69~78년) 실장은 경제관리에 전념했다.
김계원(78~79년) 실장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휘둘려 10·26 비극의 무대에 섰다. 80년대 민주화시대 이후 경호실과 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명칭 변경)의 정치 관여가 차츰 줄었지만 비서실장의 역할과 위상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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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16일 5·16민족상 시상식을 마친 뒤 청와대 뒤뜰에서 김종필 의원, 박근혜, 박정희 대통령, 김성진 문공부 장관(왼쪽부터)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경호원. JP가 박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JP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JP는 “그런 말을 박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김정렴 시절 차지철이 비서실장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거나 중앙정보부장과 월권 문제로 정면충돌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권력 내부의 균형과 질서가 헝클어진 건 김계원 비서실장이 들어서면서였다. 김계원은 차지철·김재규 둘을 조정·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이 있지만 김정렴의 존재가 그런 경우였다.
김정렴은 21세였던 1945년 8월 6일,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생 견습 소위로 히로시마(廣島)에 근무 중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폭심(爆心) 2㎞ 지점 안에 있다 살아났다.
광복 후 머리가 빠지고 잇몸이 허물어지는 원자병 후유증을 하나씩 극복하고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61년 5·16 뒤 나는 혁명과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정부와 학계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정보부 안에 정책연구실이라는 국가 브레인 집단을 만든 것이다. 혁명정부의 경제정책 밑그림을 그릴 전문가로 김정렴이 제격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미 자유당·과도정·민주당 정부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내 통화 관리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한국은행 총재에게 김정렴의 정보부 파견근무를 요청한 게 그와 인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