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와 삼청각을 찾아서
서울에 올라간 길에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던 길상사와 삼청각을 찾았다.
길상사는 옛날 대원각이란 요정자리이며 대원각과 삼청각은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요정으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다.
길상사 절이 들어서기전 대원각이 있을 당시 여러차례 그 앞을 지나가긴 했었지만, 실상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하여 무척 궁금하였기에 일부러 짬을 내어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던것...
길상사는 우선 입구에 사천왕이 버티어 있지않는것 부터가 다른 사찰과 확연히 구별된다.
길상사 건립배경이 잘 기록되어 있다.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는 1997년에 개원했는데, 사찰규모는 대지 7.000여평으로, 수림이 울창한 계곡을 끼고 있다.
이곳은 원래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 등장했던 3대 요정(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의 하나였던 대원각이었다.
이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 할머니가 여기 7.000평의 땅을 모두 법정스님께 시주하여 길상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시주한 댓가로 받은 것은 달랑 염주 한줄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 전부였다,
어떤 연유로 당시 싯가 1,000억이 넘는 재산을 염주 하나와 맞 바꾸었을까?
백석(白石 또는 白奭, 1912~1995)은 재북(在北) 시인으로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36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5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에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한 백석은 한국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시에는 우리 민족
의 삶의 모습을 노래했다.
백석은 해방 후 남으로 안 오고 북쪽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금지작가로 묻혀 있다가 1980년 대에야 해금이 되어 1987년
처음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천재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자야 할머니가 이토록 못 잊어한 백석은 어떻게 자야를 만났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백석은 고향에서 일곱 살에 오산 소학교에, 열세 살에 오산 고보에 입학한다.
백석은 열여덟에 오산 고보를 졸업했는데 학생 시절에는 불교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백석은 가정 형편상 진학을 못하고 집에서 한 해 쉬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소설이 당선 되었지만 나중에 소설은
단념하고 시로 돌아섰다.
백석은 열아홉 살 때 일본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가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조선에서 온 청년 문학가들 내지 지망생들과 어
울렸다. 거기서 백석은 문학 수업뿐만 아니라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
였다.
1934년에 일본에서 돌아온 백석은 조선일보 교정부에 취직했는데 이듬해에 ‘정주성’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등단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후부터 수필은 뜸해지고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인 1936년부터 2년간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와 영생여고에서 잇달아 교편을 잡았는데 이 때 함흥
에서 만난 기생이 자야 김 영한이었다.
子夜 김영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자, 1932년 열여섯의 나이에 조선 권번(권번;기생학교)에 들어간 김영한은 기명
이 진향(眞香)이었는데, 이미 혼인하여 딸을 낳은 적이 있다는 미확인 얘기도 있다.
1935년 권번 손님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이 여학교를 보내주고 일본 유학까지 시킨다(그후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그러던 중 신윤국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1936년 면회차 함흥에 왔으나 면회가 안되자 함흥에 머물며 권번에 들
어간 것이 진향이 백석을 만난 계기다.
그 때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진향이 백석 옆에 앉았는데, 백석은 처음 진
향을 보자 손을 잡으며 ‘당신은 나의 부인,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다’며 김 영한을 한 번 보고는 바로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 때 백석의 나이 스믈 여섯, 김영한은 스믈 둘이었다.
어느 날 백석은 김 영한이 사다 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읽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이태백의 시를 발견하고는 즉석에서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 준다.
‘자야오가’는 오랑캐를 무찌르러 서역에 간 낭군을 기다리는 자야라는 당나라 여인의 애절함을 읊은 노래다.
그러던 중 정주에 있는 부모에게 불려간 백석이 매일 편지를 보내다가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부모가 강제
로 결혼을 시킨 것이다. 당시 아들이 기생과 혼인한다는 것은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자야는 어느 날 홀연히 서울로 가서 숨어 버린다.
1938년 백석은 서울에서 열리는 축구 대회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와서 학생들을 여관에 투숙 시켜 놓고 자신은 자야를 찾아
사라졌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학교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자야와 사랑을 불태운다.
백석은 부모에게 불려가 강요에 못 이겨 혼인을 하였지만 초례만 치르고 도망쳐 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오기가 두 차례,
그리하여 버려진 순박한 시골 신부가 둘이다. 그들에게도 못할 짓이며, 자야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석은 갈등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려 자야에게 결혼하여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설득하지만 거절당한다.
자야에게는 이미 딸이 있었고 백석의 인생에 자기가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으며 또한 백석이 부모의 강요를 뿌
리치지 못하고 다른 여인들과 혼례를 올린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자 어느날 새벽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는데 이것이 두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앵두가 보기좋게 물들어 있었다.
지장전 아래는 도서관이 있고 맨 아래층은 공양원이었다.
때 마침 점심 공양시간어서 맛있는 점심공양을 대접받았다.
맑을 청이 세 개인 삼청각(三淸閣)은 이름 그대로 도심에서 가장 맑은 기운을 지닌 곳이다. 이곳은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 적십자 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역사적 장소로써, 오랜 세월동안 국빈 접대와 정치 회담 장소로 명성을 떨쳐왔다. 2000년 서울시가 인수,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해왔으며, 2009년 7월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 한국의 풍요로운 전통문화와 정서를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현재 일화당에 위치한 한식당에서는 북악산 맑은 정기를 받은 약수와 천연재료를 이용한 궁중수라상과 반가요리를 선보이고 있으며, 서울 유일의 자연 비경을 제공하는 라운지&와인바 라운지 다원에서는 전통 음료와 한국적인 전통차를 비롯하여 외국손님을 위한 다양한 와인 등을 제공하여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지는 멋을 선사하고 있다.
환상적인 대자연에서 진행되는 웨딩은 세련된 분위기와 엄선된 메뉴, 숙련된 웨딩 코디네이터의 맞춤 서비스를 통해, 아름다운 결혼식을 꿈꾸는 신부님들에게 생애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전통공연을 위한 전용 공연장과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전통 한옥 별채(청천당, 천추당, 유하정, 취한당, 동백헌)는 프리미엄 전통공연과 기업 및 가족모임, 소규모 VIP모임, 상견례, 세미나와 워크샵 등의 각종 연회 행사를 비롯하여 다례, 단소, 시조, 장구, 판소리, 한복체험, 규방공예, 비빔밥 만들기 등 내외국인을 위한 문화체험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