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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63) ⑤ 부산 을숙도(乙淑島)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부산광역시 사하구 ④ 을숙도—을숙도문화회관(서양미술사전)
2020년 11월 11일 (월요일) [백파 출행]▶ 두 발로 걷다
* [오늘의 여정] ▶ 몰운대 바닷가→ 몰운대유원지(몰운도)→ 다대포해수욕장 해변공원→ 고우니생태공원→ 강변의 보도→ (장림일반산업단지)→ 고니나루 쉼터→ 장림포구(굴다리)→ 을숙도대교→ (신평일반산업단지)→ 괴정천 하구→ 노을나루 쉼터→ 낙동강하구둑→ 을숙도문화회관→ (카니발 이동)→ 부산 내호냉면(부산시 남구 우암동 골목시장)→ 부산진역(KTX)→ 상경 귀가
을숙도(乙淑島)
을숙도(乙淑島)는 낙동강 하구의 하중도(河中島)로 낙동강이 운반해 온 토사의 퇴적에 의하여 형성된 모래섬이다. 행정구역상 부산시 사하구 하단1동이다. 낙동강 을숙도 상류 쪽은 ‘하중도군(河中島群)’이, 말단부는 주로 ‘사주군(沙洲群)’으로 구성되어 잇다. 이들 사이에는 갯벌이 분포한다.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한때는 동양 최대 ‘철새도래지’였다. 1987년 하구둑 건설 이후 낙동강 하구 일대는 지형·수문·생물 등 자연환경에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낙동강 하구 유역의 대규모 산업단지와 아파트, 그리고 을숙도에 들어선 여러 가지 시설물이나 을숙도와 낙동강하구둑에 건설된 교량 등으로 교통량이 증가하여 자연의 생태환경이 많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훼손과 보전의 현장, 을숙도
낙동강 하구 을숙도(乙淑島) —. 철새들이 많이 찾아와 이름도 새 ‘乙’(을) 자로 시작하는 ‘을숙도’는, 근래 그 훼손(毁損)과 보전(保全)의 역사를 함께 지니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섬의 대부분이 습지나 농경지였으나 ‘낙동강하구둑’이 건설된 이후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준설토 적치장, 해양분뇨 처리시설, 쓰레기매립장 등 각종 혐오 시설 집합소였던 것이다. 부산시는 1999년이 되어서야 친환경 을숙도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준설토적치장과 파밭 등으로 사용되던 을숙도 하단부에 인공습지 6개를 만들어 철새를 위한 공간으로 복원했다. 현재 을숙도는 새와 사람이 나눠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을숙도문화회관이 들어선 A지구와 에코센터가 위치한 B지구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하단부의 핵심보전지구(D지구)와 완충지구(C지구)는 소규모 체험 행사 외에는 사람의 출입이 철저하게 제한된, 새들의 공간이다.
오후 2시, 낙동강하구둑 다리를 건너 을숙도에 들어섰다. 길목에 ‘乙淑島’를 새긴 자연석과 ‘을숙도철새도래지’를 새긴, 커다란 자연석 비가 세워져 있다. … 정부에서는 1999년 8월 9일 낙동강하구 지역을 ‘낙동강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을숙도 철새공원
낙동강 하구(河口)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지형적으로 사주(沙洲, 모래톱)와 내륙수로가 발달하여 철새들에게 좋은 보금자리를 제공하여 매년 겨울철 철새가 찾아와 월동하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이다. 이곳을 찾은 철새의 종류는 총 167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겨울철에는 오리류와 기러기류가, 가을철에는 도요새와 물떼새류가 떼를 지어 찾아오고 있으나, 최근 낙동강 하구 유역의 개발사업과 환경오염 등으로 점차 그 수(數)와 종류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정부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인 낙동강하구지역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이 지역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정된 보호지역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장림동, 다대동 일원의 해면 및 강서구 명지동 하단의 해면, 대마등, 장자도, 진우도 동쪽 해면 그리고 을숙도 하단부’이다. 전체가 여의도 면적의 약 4.5배에 해당한다.
낙동강하구에코센터
‘낙동강하구에코센터’는 낙동강 하구 습지의 생태를 조사·관리·교육하는 기관으로, 강물이 바다와 어우러지는 지점이자,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인 을숙도에 있다. 을숙도는 상단부의 을숙도생태공원, 하단부의 을숙도철새공원으로 나뉜다.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천연기념물 179호)의 핵심 지역이자 낙동강 하구 생태관광의 중심축으로, 겨울 철새와 하구 습지의 생태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서는 자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야생동물치료센터와 탐방체험장, 아미산전망대도 관리한다. 낙동강 하구의 인문·생태 정보를 알기 쉽게 전시하고, 연중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낙동강하구 360도 가상현실(VR) 홈페이지'를 구축
부산시 낙동강관리본부는 2021년 8월 2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79호인 낙동강 하류 철새도래지의 파노라마 이미지를 활용, '낙동강하구 360도 가상현실(VR)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이 홈페이지는 손쉽게 온라인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도록 PC와 스마트폰, 태블릿 등 다양한 정보기기에 최적화된 화면이 제공된다. 원하는 공원의 지점을 선택해 360도 VR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공원 안내도나 좌측 메뉴바 등을 활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온라인 투어를 즐길 수 있다. 생동감 있는 촬영으로 현장감을 더하고 확대, 축소가 가능해 원하는 곳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 평소 접근이 어려운 낙동강하구 모래섬과 여름에만 볼 수 있는 가시연 등을 언제나 감상할 수 있다. 450만평에 달하는 광범위한 낙동강하구 5개 생태공원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종합적인 안내지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두 마리의 고니’를 형상화한 조형물
도로 위의 육교를 건너면, 을숙도문화회관공원 입구에 한 쌍의 고니 조형물이 있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새들이 함께 하는 을숙도— 천연기념물 제179호인 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에는 겨울철 고니가 다수 서식함에 따라 부산시 사하구를 상징하는 새로 ‘고니’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을숙도가 고니의 서식지임을 알리고 고니의 서식지 보호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도시임을 알리는 조형물이다. 높이 4.5m, 너비 11.25m 스테인레스 스틸재질에 순백색 우레탄으로 도장을 했다. 순백의 부드러운 라인은 고니의 우아함을 나타내고,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고니는 어미와 자식의 끈끈한 가족애를 형상화하였으며, 고니의 날개는 진취적인 기상과 무한 성장의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다. 2015년 6월 16일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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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 — 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현장
을숙도문화회관이 있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의 한낮이어서 그런지 가을이 깊어가는 을숙도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 ‘을숙도’는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1908~1996)의 대표작 「모래톱 이야기」의 배경인 ‘조마이섬’의 실제 현장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평생 낙동강 파수꾼으로 살았던 김정한에 의해 민족의 강, 낙동강 하류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문학 공간의 하나가 되었다. 문화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모래톱 이야기」문학비(文學碑)가 서 있다.
* 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줄거리 ▶
… 20년이 넘도록 붓을 꺾어 오던 나는 교원 노릇을 하면서 알게 된 한 소년, 그의 젊은 홀어머니와 할아버지, 그들이 살아온 낙동강 하류의 외진 모래톱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묻어둘 수가 없어서 다시 붓을 들게 되었다. … 화자인 ‘나’는 당시 K라는 일류 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건우’라는 소년의 담임을 하고 있었는데, 두 가지 이유로 건우를 동정하게 되는데, 첫째는 아버지가 없어 할아버지가 ‘거무’라고 아명을 지었다가 ‘건우’로 호적에 올린 사실을 안 것이고, 둘째는 학기 초 가정 방문을 나가기 전에 그가 써낸 작문을 읽은 것 때문이다.
'섬 얘기'란 그(건우)의 글은 선조 때부터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뒤바뀌는 내력을 적은 글인데, 미문은 아니지만 무엇을 저주하는 듯한 소년의 날카롭고 냉랭한 심사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 같다고 하여 ‘조마이섬’으로 불린다는 건우의 고장은,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집 두 집 띄엄띄엄 땅을 물고 있는 곳이다. ‘건우 어머니’의 대접을 받으면서 그녀의 심상치 않은 의지와 정열 같은 것을 느꼈고, 건우의 방에서는 '섬얘기'라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건우의 집을 나서다가 전에부터 알고 지내던 ‘윤춘삼’이라는 인물을 우연히 만나서 몇 가지 기막힌 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조선토지사업'이 실시되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순식간에 '동척'의 명의로 둔갑하며, 해방 이후에는 국회의원의 명의로, 다음은 하천부지 매립허가를 받은 유력인사의 소유로 변하게 된다. 저항을 하는 과정에서 섬사람들이 줄줄이 경찰에 붙들려가기도 하였고, 건우 할아버지 또한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 해 처서(處暑) 무렵, 홍수 때문에 섬은 위기를 맞는다. 둑을 허물지 않으면 섬 전체가 위험하여 주민들은 뚝을 파헤친다. 이때 둑을 쌓아 섬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유력자의 하수인들이 방해한다. 화가 치민 ‘갈밭새 영감’은 그중 한 명을 탁류에 집어 던지고 만다. 결국, 노인은 살인죄로 투옥된다. 2학기가 되었으나 건우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황폐한 모래톱 조마이섬은 군대가 정주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 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이해와 감상 ▶
… 이 소설은 해방 후 낙동강 유역의 ‘조마이섬’을 배경으로 권력과 유력자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희생되고 마는 섬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마이섬’은 소설 속의 허구(虛構)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했거나 또는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절박한 장소이다. 이 섬의 운명은 섬 주민들과 같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섬에 살고 있는 ‘갈밭새 영감’과 ‘윤춘삼 영감’은 현실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사람들이자만 그들의 힘으로 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갈밭새 영감’이 섬을 살리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갈밭새 영감’의 투쟁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한 억울한 사람의 자기희생을 통한 자유(自由)의 갈구(渴求)이다. 작가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보호받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삶을 아주 사실적(寫實的)으로 그려내고 있다. 농촌의 현실의 고발을 통해 당대의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비리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농촌문학의 전형적인 작품이면서 리얼리즘 문학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은 ‘건우’라는 제자를 통해 알게 된 조마이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가 전하는 형식이다. ‘나’는 관찰자, 서술자인 동시에 조마이섬 사람들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나’는 교사였던 시절 알게 된 이야기를 20년이 지난 지금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여 액자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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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문화회관 기획전시회
— 「서양미술사전(西洋美術史展)」 —
한가한 공원 안으로 들어가 ‘을숙도문화회관’을 찾았다. 문화회관 갤러리에서 예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름 하여 ‘한 시간에 보는 「서양미술사전」’이다. 2020년 10월 23일부터 시작하여 내일 11월 12일 마감하는 전시회이다. 문화관광체육부에서 후원하고 을숙도문화회관에서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시민들에게 ‘서양미술사’와 세계적인 명작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일반시민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예술적인 안목을 고양시키고 체계적인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특별기획이다.
평소 예술 작품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에게도 아주 매력적인 전시회가 아닐 수 없다. 마침 벗들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절묘하게 주어진 기회가 되었다. 이상배 대장에게 전화하여 나의 소재를 알렸다. 일행은 한 시간 뒤에 문화회관으로 오기로 했다.
한 시간에 보는 서양미술사 이야기
* 서양미술사 개관 *
먼 옛날 구석기 원시인들이 동굴(洞窟)의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화가들은 오랜,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 다양한 미술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화가들은 다양한 기법을 이용하여 동굴 벽면과 천장에다, 성당의 벽면에다, 나무판에다, 캔버스에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왔으며, 15~16세기 ‘르네상스 대천재’들이 구축한 사실주의 미술을 토대로 ‘바로코’, ‘고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치며 더욱 굳건해졌다. 지난 4백년간 서양의 미술은 공간, 물체, 운동, 빛, 중력 등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완벽하게 화면에 옮겨 놓는데 성공하였다.
현실 재현에서 사진과 경쟁할 수 없었던 화가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인상주의’ 미술 이후 미술가들은 주변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해 나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내부의 감성과 감정, 그리고 ‘추상과 무의식의 세계’로까지 미술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은 조형의 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사실주의 미술은 근본부터 허물어지고 ‘표현주의’니, ‘입체파’니, ‘추상미술’이니 하는 새로운 미술로 확산해 나갔다.
오늘 을숙도에서 특별 전시하는 「서양미술사전」은 오랜 세월 동안의 서양미술의 역사와 미술가들의 삶, 그리고 작가들이 만든 작품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술적 교양과 안목을 높이는 교육적 효과가 큰 전시회이다. 한 자리에서 말로만 듣던 서양의 명작들의 느낌을 몸소 경험할 수 있고, 오랜 서양미술사를 짧은 시간에 쉽고도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절묘한 시간에 누릴 수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낙동강 1300리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오늘, 감동적인 축복(祝福)의 시간이다!
미술의 탄생 — 구석시시대의 미술
구석기 원시인들은 거주하는 동굴의 벽면에, 그들의 수렵생활을 반영한 짐승이나 물고기를 생생하게 그려 넣기도 하고 조그만 조각품을 만들어 마스코트용으로 지니고 다니며 사냥의 성공을 빌었다.
저승과 현실 — 고대 이집트 미술
BC 5천년 경 이집트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찰나적 삶이 아니라 사후세계의 영원한 삶이었다. 이집트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실제 인물과 닮게 조각하는 일이었고, 저승에서 영원토록 살아가도록 완전하게 표현하는 일이었다.
인간을 위한 미술 — 그리스·로마미술
그리스인들은 저승에서의 영원한 삶보다는 현실(現實)의 삶을 즐기고 사랑했다. 현실에서 미(美)의 본질을 찾으려 노력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은 황금비례에 따른 미술품을 만들어냈다. ‘그리스미술’의 충실한 모방자였던 ‘로마미술’은 그리스미술을 계승하여 더욱 사실적인 미술로 발전시켰다.
신앙과 설교 — 중세의 미술
‘중세의 교회’는 지상의 모든 것 위에 우뚝 서게 되었다. 교회(敎會)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민중을 천국으로 이끄는 안내자였다.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중심이었다. 성당의 벽화, 조각, 모자이크 등의 중세미술은 교회, 특히 교회건축에 종속되었다. 교회에 예속된 중세미술은 설명적이었고 장식적이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태동과 전개
휴머니즘과 현실의 재발견
15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세상의 중심이 신(神)의 세계에서 인간(人間) 세계로 바뀌자 사람들은 현실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인간중심적인 사고와 현실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발견들로 이어지고 ‘르네상스 미술’이 시작된다. ‘마사쵸’가 르네상스 미술의 문을 연 이후, 이탈리라의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투시(透視), 원근법(遠近法)을 그대로 적용하여 그림의 구체성을 한층 강화시켰다. 마사쵸 이후 미술가들은 시각의 다양화, 색채명암법, 동적인 움직임 등을 통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가 산드로 보디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비너스의 탄생」(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은 '미의 여신 비너스가 푸른 바다의 거품으로부터 태어나 진주조개를 타고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다 위에 서 있다. 왼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그의 연인 클로리스가 그려져 있는데, 제피로스는 비너스를 향해 바람을 일으켜 그녀를 해안으로 이끌고 있다.'
조화와 균형 — 전성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
16세기 초,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가 서서히 쇠퇴하고 로마와 베니스가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고대의 재건과 고대의 재현을 원하는 로마교황청의 영향으로 16세기 이탈리아 문화는 15세기의 소박한 객관주의를 벗어나 위대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세기 초 르네상스 미술의 3대 천재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등장하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은 그 정점에 도달한다.
*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 da Vinci, 1452~1519)는 15~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예술가이며, 주요 작품은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도제가 되어 회화, 조각 등 여러 분야에서 훈련을 받았다. 밀라노 대공의 후원으로 17년간 밀라노에 머무르면서 <「최후의 만찬」 등의 대작을 그렸다. 회화, 건축, 기계, 해부학 등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모나리자(Mona Lisa, 'La Gioconda')」(1503~5년경, 목판에 유화)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의 비밀은 다 빈치가 개발한 ‘스푸아토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기하학적인 원근법의 견고성이 오히려 화면의 조화를 헤친다고 보고, 물체의 윤곽이 선명하지 않게 뿌옇게 처리하는 스푸아토 기법을 사용했다. 이 윤곽을 흐릿하게 만든 기법은 화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조화와 균형 — 북유럽의 사실주의
15~16세기 플랑드르와 독일의 르네상스 미술
15세기, 북부 유럽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특히 교통의 요지였던 ‘플랑드르’는 이탈리아 못지않게 미술이 발전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재인식에서 출발했던 반면, 플랑드로 르네상스는 자기 주변의 생활에 대한 철저한 관찰로부터 시작하였다. 플랑드르 미술은 있는 그대로 자연과 현실생활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꼼꼼하게 묘사하였다. 15세기 플랑드르에는 '반 바이크', '고지에 반 데르'를 위시한 뛰어난 화가들이 사실성에 바탕을 둔 플랑드르 미술을 구축하였다.
16세기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진정한 개화를 한다.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은 사실풍의 북유럽 미술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가미한 신예술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장점을 흡수하여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한 인물은 독일의 ‘알베레히트 뒤러’와 ‘한스 홀바인’이었다. 뒤러와 홀바인은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장점들과 독일의 민족적 특징을 결합하여 사실적인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16세기 북유럽의 화가 ‘피터 브뢰켈’은 북유럽의 견고한 전통과 현실의 기반 위에서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하는데, 그것은 풍속화였다.
* 피에터 브뢰겔(Pieter Bruegel, 1525~1569) 「눈 속의 사냥꾼」(1565, 목판에 유화)
엔터워프의 어느 컬렉터의 주문으로 제작된 달력 연작 중 겨울(1월)로 빼어난 구성과 표현으로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사냥꾼과 허기져 배가 홀쭉해진 사냥개들이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로 돌아오고 있는 장면이다.
감동과 생동감 — 바로크 미술
17세기 초, 미술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가 서서히 쇠퇴하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 벨기에 등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17세기 강력한 상업 세력을 배경으로 등장한 절대왕정은 궁정을 중심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미술을 만들어나갔는데, 17세기 미술 전반에 유행한 이런 양식을 ‘바로크(barroco) 미술’이라고 부른다. 바로크라는 말은 '비뚤어진 진주(barroco)'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교황이 로마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했던 '반(反) 종교개혁적인 예술'로서 불규칙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양을 특징으로 하였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과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달랐다. 르네상스는 현실에서 이상적인 미를 찾으려 했던 반면 바로크 미술은 현실(現實)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찾으려 했다. 17세기 절대왕정과 귀족들은 세상이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려 소유하고자 했다. 절대왕정은 화가들을 시켜 왕조의 역사화에서 초상화 그리고 왕궁과 대저택을 장식하는 각종 장식화들을 그려내게 하여 궁정과 저택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한편 바로크 미술은 서민생활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 카라바조의 영향은 대단했다. 17세기 중반 북이탈리아 및 북유럽에서는 카라바조풍의 영향으로 강력한 명암대비에 의한 서민적 사실주의가 나타났다. 서민적 사실주의 미술은 특히 자유로운 시민국가를 형성한 네델란드에서 초상화, 풍속화, 정물화 등의 다양한 장르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 반 린 렘브란트는 네델란드를 대표하는 바르크 미술가로, 이전의 미술가와는 달이 눈앞의 대상을 철저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어떠한 이상화나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흔적이 없다. 조화로운 아름다움보다는 신실성과 성실성을 강조하였다. 1629년~1669년 사이에 여러 편의 「자화상」을 그렸다.
*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57~1640)의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다」(1616년경, 목판에 유화) — 부활한 예수기 제자 베드로에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며 천국의 열쇠를 준다. 그리고 루벤스는 인물화 「밀짚모자」(1625)를 그렸다.
행복과 향락 — 로코코 미술
18세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과 산업은 인간의 실제생활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현실세계에 대해 낙관하였고 내세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실(現實)에서 행복(幸福)과 향락(享樂)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미술의 활동무대는 교회와 왕실이었지만 중상주의 정책의 결과 부르조아지가 등장하면서 18세기 초 살롱이 미술활동의 새로운 무대로 등장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은 바로크의 묵직한 미감 대신에 상쾌함을, 지적인 구성 대신에 감각적인 관능을 중시했다.
18세기 초, 자유스럽고 향락적인 인간 감정이 존중되기 시작한 풍토 속에서 만들어진 미술이 로코코(Rococo) 미술이다. 어원은 프랑스어로 ‘로카유(rocaille)와 코키유(coquille)’인데 이는 ‘정원의 장식으로 사용된 조개껍데기나 작은 돌의 곡선’을 의미한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로코코 미술사들은 귀족의 연애와 우아한 연회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로코코 미술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로 나아갔다.
한편, 로코코 미술가 샤르댕은 18세기 파리 부르주아 가정의 건실한 일상생활이나 어린이들 그리고 일상의 생활도구를 꾸밈없이 그려 평범한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디에고 로드리게스 드 실바 벨라스케스(Diego R. de Silva Velazquez, 1599~1660)의 「비니스의 화장(The Toilet of Venus)」(1649~1651)이 있다. 「로커비의 비너스」라고도 한다. 이 비너스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함께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비너스의 초상화로 평가된다. 비스듬히 팔을 괴고 누운 비너스 앞에 큐피드가 거울을 받치고 있다. 거울이 흐릿하여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얼굴이 명료하지 못하지만 매우 육감적이다.
열정과 상상력 — 낭만주의 미술
19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너무 인공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열과 상상력의 자유를 제일로 여겼던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무기력한 일상을 경멸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이나 자유, 야성적이며 기교적이고. 이국적이고 초월적인 것들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당시 열정적인 젊은이들은 무기력한 현실과 신고전주의의 형식주의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즘과 프랑스의 구체제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낭만주의(浪漫主義) 미술’이다.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특이한 체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신화(神話)나 이국적인 풍물, 극단적인 사건 등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그림을 강렬한 색채로 정열적으로 그렸다. 낭만주의 미술은 형태나 선묘보다는 색채(色彩)를, 지식보다는 상상력(想像力)을 그림의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가 ‘컨스터블’과 ‘터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자연을 그리기를 원했다. 항상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던 터너와 컨스터블은 직접 야외로 나가 바람, 태양, 광선, 구름이 만들어내는 웅대한 자연의 드라마를 화폭에 담았다. 한편 영국왕립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화가들은 라파엘전파를 창립했는데,이들은 신화나 이국적인 장면을 매우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 19세개의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0~1801, 캔버스에 유화)을 그렸다. 다분히 이상화한 초상화이다. 나폴레옹을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생생히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앞장서서 지휘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진실과 기록 — 사실주의 미술
19세기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영위하였다. 사회 질서는 엉망이었고 사람들은 불안했다.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했지만 정부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사실주의(寫實主義) 미술’은 자기 주변에 벌어지는 이러한 현실을 마치 사진으로 기록하듯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나는 보이는 것만 그리겠다. 나는 이것을 사실주의라고 부르겠다!”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 ‘쿠르베’의 주장이다. 쿠르베는 그림의 주제를 자기 눈으로 본 것에만 한정하고 그것을 밀도 있게 그려 나갔다.
한편 19세기 초, 프랑스에는 자연에 몰입하여 새로운 사실주의 회화운동을 한 무리의 화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몸소 체험하고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을 그려나갔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바르비종파’라고 불렀다. 이전의 미술과는 달리 바르비종파의 작품은 현실 풍경에 대한 깊은 관찰과 인정이 있는 온화한 표현을 특징으로 했다. 특히 바라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밀레는 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농민의 생활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농민의 눈을 통해 자연을 그려냈다.
*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는 장 프랑스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이다. 대표 작품에 「만종(晩鐘), The Angelus」(1857~1859, 캐버스 유화), 「이삭줍기(The Gleaners)」가 있다.
*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년의 작품, ‘새 사냥’
[처참하고 찬란한 아우성] ―이 그림은 ‘이삭줍기’와 ‘만종’ 등으로 19세기 말 프랑스 농부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준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1814~1875)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흘깃 보면 추수를 마친 농부들이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축포를 쏘아 올리고, 눈부시게 폭발하는 금빛 불꽃 아래서 춤이라도 추는 듯한 축제 분위기다. 하지만 마치 물결치는 파도처럼 너울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건 불꽃이 아니라 비둘기 떼다.
농부들은 지금 나뭇가지에 줄지어 앉았던 비둘기들에게 횃불을 휘둘러 놀란 새들이 밝은 빛에 눈이 먼 채 푸드덕 날아오를 때 마구잡이로 몽둥이질을 해 사냥하고 있다. 힘차게 뛰어올라 새들을 후려치는 이, 땅바닥에 엎드려 떨어진 새를 움켜쥐고 자루에 주워 담느라 야단인 이들에게는 이 밤이 축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닌 밤중에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새들의 모습은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이는 밀레가 어린 시절에 실제로 목격했던 새 사냥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전한다. 노르망디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밀레는 일찍이 미술 학교에 진학하고자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안 해 본 농사일이 없었던 것이다.
화가가 된 뒤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에 터전을 잡고 사실적인 풍경화로 일가를 이루었을 때도 밀레는 풍경에만 집중하기보다는 대자연에 순종하며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성실히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고귀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존경받는 화가의 삶을 살다 생의 마지막에 밀레의 마음에 떠올랐던 건 어떻게든 먹고살려는 가난한 이들 손에 처참하게 떨어져 나가는 비둘기 떼의 아우성이었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와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는 「이렌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1879년, 캔버스에 유화)이 아주 유명하다. — 1879년 르노와르는 은행가 루이 깡 단베르의 귀여운 막내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이 은행가는 당시 드물었던 화가에 대한 이해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르노와르는 그의 딸이 모델이 되어 매우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이 그림을 그렸다 한다.
빛과 색채 — 인상주의 미술 / 신인상주의 미술
19세기 중반 사진의 발명과 과학적인 빛의 분석이론은 새로운 미술을 모색하도록 화가들을 압박했다. 사진이 발병되기 전 화가들의 관심은 현실을 얼마나 실감나게 묘사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진의 출현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화가들의 주 수입원은 초상화였는데 똑 같이 그리는 일에 있어 사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휴대 가능한 튜브물감의 발명도 새로운 미술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전에는 야외에서 직접 작업하는 일이 불가능했지만 휴대 가능한 물감 덕분에 야외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태양빛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빛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채를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인상파(印象派)'였다. 인상파가 그리고자 한 것은 빛이었다. 그 이유는 세상 만물은 빛에 의해 그 형태가 드러나고 빛의 강약에 따라 느낌과 형태가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상파는 태양광선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기묘하게 변화하는 색조의 순간적인 상태를 재빨리 그리려 했다.
*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는 점묘법을 사용한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조각가인 쥐스탱 르키앙에게서 미술을 배웠고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서 욍베르 드 쉬페르빌이 쓴 <절대적인 미술 기호들에 관한 평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대비색을 작은 색점들로 병치하여 빛의 움직임을 묘사한 점묘법을 사용하여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그랑 지뜨 섬의 일요일 오후」(1884~1846) 등을 그렸다. 그가 남긴 작품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시기의 주요한 화가였다.
빛의 분석 — 신인상주의 미술
인상파 화가들은 태양처럼 빛나는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짝이는 빛을 그리기 위해 튜브에서 바로 짜낸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칠하고 혼색하였다. 그러나 인상파의 혼색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빛은 섞이면 섞일수록 흰색이 된다. 그런데 인상파는 빛을 색으로 칠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빛은 서로 섞이면 밝아지지만 색은 서로 섞으면 탁해진다. 그 결과 인상파 화가들이 칠한 색들은 순도가 떨어져 원하는 밝은 색의 효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인상파 미술의 결점을 보완하고 더욱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인상주의의 이론을 전개한 그림이 점묘주의(點描主義)라고 불리는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이다.
신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색이 혼색되면 탁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색이 서로 섞이지 않게 원색의 물감을 색 점으로 찍어 칠했다. 색점으로 찍어 칠했다 하여 그들의 그림을 점묘파(點描派)라고 부른다.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9~20세기 인상파(印象派)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화가로, 인상파 또는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그 이름 또한 모네의 작품인 「인상 해돋이」(1873)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려서 바닷가 마을 생트 아드레스에서 자라면서 자연과 빛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고 화풍은 스승 ‘외젠 부댕’과 바르비종파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인상파가 대두했던 1870년대에는 자연광과 야외 생활의 움직임을 즉흥적이고 간결하게 해석하여 화폭에 담았고 1890년대부터는 빛과 기후 조건을 달리해 같은 주제를 되풀이 하는 연작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카미유 피사로’, ‘프레데리크 바지유’,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과 인상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는 분명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대로 베끼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느긋하고 순간적인 시각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상(이성으로 안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것)을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생기와 움직임을 곁들여 그 자리에서 기록하려고 애썼다. 그는 배, 건물,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 그리고 자갈이 깔린 해변을 단조로운 색채로 재빨리 그려냈고, 그 무게나 부피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주요 작품은 「인상 해돋이」「파라솔을 든 여인」「수련」 연작 등이 있다.
예술의 본질 — '후기 인상파(後期印象派)' 미술
출현 초기 미술계와 사람들에게 열화와 같은 비난을 받았던 인상파 미술은 사람들의 미의식 변화와 빛의 과학적 증명으로 19세기 후반 파리의 미술계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 인상파의 미술에 반대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후기 인상파’라 불리는 ‘폴 세잔느’,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투루즈’, ‘로트렉’, ‘앙리 루소’ 등이었다. 이들은 인상파 미술이 빛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색과 형태만을 쫓다보니 그림이 뭔가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영혼의 화가, 빛의 화가,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의 그림을 팔았을 만큼 무명이었고, 궁핍과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런 생을 살다 사후 재평가된 ‘시대를 앞서 나간 천재 예술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
고흐(Gogh)는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프랑스를 떠돌면서 책방 점원과 선교사 등을 지냈다. 1880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천직임을 깨닫고 습작에 열중했다. 네덜란드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후 프랑스에서 인상파(印象派)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개성적인 화풍이 확립되었다. 그는 현대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작품은 「자화상」, 「해바라기(1888)」,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이 있다,
* [폴 고갱(Paul Gauguin)의 필생의 역작] *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 작품은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1897년에 그린 대작(大作)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根源)에 대한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고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당시 그는 악화된 건강과 생활고, 그리고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살을 결심했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자 마음먹는다. 고갱은 열정에 사로잡혀 한 달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였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남은 “모든 정력을 이 작품에 쏟아 부었다”고 쓰기도 했다. 고갱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규모(141×376 cm)의 작품이며,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이 그린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역작(力作)이라고 말했다.
고갱은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과정인 스케치를 생략했다. 습작 데생을 거치지 않고 직접 캔버스에 작업을 한 것이다. 작가는 작품 위쪽의 모서리에 진한 노란색의 물감을 칠해, 왼쪽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소 장황한 제목을 쓰고, 오른쪽에는 서명을 하였다.
고갱은 1898년 2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의 세부적인 구성과 의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등장인물들은 고갱이 원시의 이상향을 찾기 위해 문명을 버리고 선택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부터 온 것이다. 작품의 오른쪽 전경에는 잠들어 있는 아기와 함께 세 명의 여인이 앉아있다. 그 뒤로는 보라색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고 있다. 이들의 앞에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원근법을 적용시킨 인물이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며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작품의 세로축을 형성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인물이 과일을 따는 제스처를 취한다.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앉아 있는 한 소녀는 과일을 먹고 있으며 그 옆에는 흰 산양 한 마리도 있다. 그 뒤로 두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있는 신비로운 여신상은 피안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오른팔을 땅에 짚고 앉아 있는 여인은 이 여신상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그 옆의 노인은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괴로워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누워 있는 어린 아기를 통해 우리의 과거를 묻게 되고, 그림 중앙에 서서 익은 과일을 따는 젊은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보게 된다. 또 화면 왼쪽 아래 웅크리고 귀를 막아 닥쳐올 고통을 괴로워하는 늙은 여인의 모습에서는 우리의 미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즉, 인간의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의 3단계를 표현한 것이다. ― 그림 왼쪽 윗부분에는 타히티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의 여신 ‘히나’의 상이 있고 여신 곁에는 고갱의 딸 ‘알린’이 그려져 있다. 분신처럼 아끼던 딸 알린을 여신의 힘을 빌어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 ¶
▶ 이들 후기인상파의 그림이란 ‘뭔가 불변(不變)하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잔느’는 본질적인 형태(形態)를, ‘고갱’은 순수한 감성(感性)을, ‘고흐’는 진실한 감정(感情)을 그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세잔느, 고흐, 고갱의 업적은 20세기 현대미술 운동의 이념과 바탕이 되었다. 굳건하고 변함 없은 형태를 찾으려는 세잔느의 방법은 ‘피카소’의 입체파(立體派)로, 더 나아가 추상미술로 전개되었다. 주관적인 감성을 표현했던 고흐의 방법은 ‘뭉크’를 거쳐 2세기 표현주의(表現主義)로, 그리고 고갱의 방법은 ‘마티스’의 야수파(野獸派)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표현(表現)과 추상(抽象) — 20세기 이후의 미술
인상파 미술 이후의 현대미술은 과거와 같이 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원근법이나 해부학, 명암법, 색채법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현실세계와는 관계없이 그림 내부의 원리를 중시하였다. 그러자 2만년 이상 지속되어온 미술은 그 근본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새로운 미술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발맞추어 표현주의니 입체파니, 추상미술이니 하는 새로운 미술들을 쏟아내며 미술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20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복제환경은 인간의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다.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장씩 쏟아져 나오는 사진과 영상, 기계제품들은 인간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기계가 만들어낸 생산물은 단순한 기계의 복제품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20세기 전위미술가들은 이러한 기계적 복제물들을 이용하여 콜라쥬, 오브제, 팝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을 만들어내었다.
*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4~1944)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절규(絶叫, The Scream, 1893)」는 파리에서 앙리 로트레크, 빈센트 반 고흐 등과 어울리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인간의 비극적 측면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그들과의 교류로 인해 절망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늘·땅·다리는 절규의 메아리로 온통 휘감겨 있다. 섬뜩한 외침이 화면을 떠나 긴 반향을 남기는 작품이다. 오슬로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20세기 표현주의 화가로,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에 위대한 지침을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가 주도한 야수파(Fauvisme)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으로 여겨지는데, 야수파란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 사조로, 원색의 강렬한 색채 사용이 특징이다. 순수하고 섬세한 색조, 단순한 선과 구성을 토대로 행복함과 충만함을 표현한 그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든다. 「초록색 얼굴의 마티스 부인」(1905)
* 구스타브 크림튼(Gustav Klimt, 1862~1918)은 빈 분리파를 창설한 19~20세기 오스트리아의 화가로, 초기에는 사실적인 화풍으로 건축물 벽화를 그렸다. 인상파와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을 접하고, 1897년 이후 빈 분리파를 창설하고 고도의 장식적인 양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후기의 벽화들은 정확한 선묘와 평면적이고 화려한 색채, 금박의 대담한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작품은 「키스」(1908), 「유디트」가 있다.
*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981~1973)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페인 입체파(立體派) 화가로, 초기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이미 엿보이는 피카소의 급진적인 미술 성향으로 인해 사실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20세기의 미술가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티스나 브라크 같은 20세기의 다른 거장들이 그들의 초기 화풍을 끝까지 고수하는 경향을 보여준 반면, 피카소는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그의 생전에나 그 이후에 많은 오해와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에 와서야 그의 말년 작품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주요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들」,「게르니카」,「꿈」 등이 있다.
피카소(Picasso,)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소묘를 가르치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일찍이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다. 이후 마드리드에서 미술을 배우며 염증을 느끼다가 카페와 사창가를 배회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감상했는데, 이 시기가 평생 작품의 원동력이 됐다. 파리를 여행하며 색채에 관해 눈을 떴고, 파리로의 영구 이주를 결심하며 급진적인 화풍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는 새로움을 추구했다.
전시회를 돌아보고 —
1300리 낙동강과 서양미술사의 만남
11월 11일 오후 3시, 전시회 관람을 마쳤다. 제1·2·3전시실을 차례로, 찬찬히 둘러보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가슴을 채웠다. 내 몸과 마음으로 낙동강 대장정을 마치고, 그리고 또 내 눈과 마음으로 서양의 미술사를 이렇게 알차게 감상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오늘 전시된 작품은 모두 진품이 아니지만, 오늘 전시회는 참으로 귀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일찍이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특별기획 전시한 진품(眞品) ‘피카소전(展)’이나 ‘고흐전(展)’ 등을 관람하는 등 세계적인 명작을 직접 감상하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즐거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서양의 석기시대의 미술에서부터 20세기까지 서양의 미술사를 한 눈에 요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각 시대마다 최고의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가 내일 마감하는 날이니, 오늘 아주 극적으로 타이밍을 맞춘 것이다. 전시된 작품은 물론 진품이 아니다. 특수기법으로 촬영한 복사본인데, 진위(眞僞)를 따지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감상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본이라고 해도 의심이 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잘 제작된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아주 쉽고 간명하게 해설을 곁들여 놓아서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유서 깊은 1300리 낙동강 종주를 마무리하는 날, 이렇게 서양미술의 대하(大河)를 한 걸음에 섭렵할 수 있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만남이었다. 그래서 그 감동을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낙동강 종주를 마치며 — 감사의 말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이상배 대장 등 동지 일행이 을숙도문화회관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 대장의 카니발에 함께 동승하여 낙동강하구둑 다리를 건넜다. 하구둑이 가장 잘 보이는 제방 길에서, 낙동강하구둑을 배경으로, 낙동강 종주를 마감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로 따뜻하게 악수하고 축하하고 격려를 했다. ― ‘아, 이제 예정된 낙동강 여정을 다 마쳤다!’
조용히 바다와 만나는 낙동강 하구의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늘에 감사하고 낙동강에 감사하고 이 자리에 함께한 낙동강 동지 이상배 대장, 기원섭, 이진애, 김옥련 대원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의 낙동강 종주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음의 성원을 아끼지 않은 가인을 비롯한 우리집 문향재(文香齋) 가족에게 낙동강 종주의 건강한 완주 소식을 전한다. 아울러 낙동강 물길을 걸어오는 동안 유형무형의 성원과 격려를 보내준 모든 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코로나의 창궐과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멀고 먼 낙동강 종주를 무사히 마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리고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드린다. …♣ <계 속>
★ 이제 낙동강 1300리 종주의 실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다음의 글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 (64)편은 '에필로그' ―, 낙동강의 모든 이야기를 총정리하여 마무리할 예정이다. ― 우리에게 낙동강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