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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라운 발견 201
권두언
마지막 진리의 빛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화의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경험입니다. 육체의 일로부터, 죄로부터,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무모한 시도로부터 쉬는 경험, 인간의 영광을 티끌에 묻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 안에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 속에서 편히 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의 경험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안식의 경험은 여자의 남은 무리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일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마음속에 진정한 안식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유전이 아닌, 하나님의 참된 계명을 전심으로 순종하고 지키는 사람들, 인간이 만든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이 대치될 때에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옹호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온 땅은 이들이 비치는 빛으로 환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먼저 거룩해지지 않으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은 거룩한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구속의 경륜의 비밀의 결정체로써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경험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그런 구속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엿새 동안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일곱째 날 안식일에 진정으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안식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진정한 안식일을 발견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생애에 진정한 구원의 표인 안식의 경험이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 병국 목사
제1부_질문이 생기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궁금해지고 꼭 찾기를 원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있지 못하거나 생각해도 막연한 답변밖에 얻지 못하는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지게 된 질문과 답변을 통해 함께 성경의 참된 진리를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찾은 놀라운 발견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1부: 질문이 생기다
저는 오랫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구를 정죄하고 싶은 마음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발견한 것을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들을 여러분들에게 밝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밝은 빛을 찾아 함께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저의 탐구여행에 함께 해주시기를부탁드립니다. - 무명의 어떤 그리스도인 -
난 내 나름대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고 일반 신도들에 비해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새 언약 가운데 있고 은혜 아래 구원받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조의 어떤 부분에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거나 그 질문에 대해 해결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란, 소위 “의문의 율법” 아래서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는, 아직도 옛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답이 궁색하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폐하신 율법을 애지중지하며 그분의 새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왜 안식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앞세우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상하고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사람들이 막상 정직하게 그 주제에 들어가 보면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대답보다는 막연하고 궁색한 답변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한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그 글은 내가 그동안 믿어왔던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나의 믿음을 검증하기 위한 성경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폐해진 계명
그 글은 다음의 글인데, 이것은 1943년 출간된 J. Philip Hyatt 침례교 교수의 글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도덕법을 주시지 않으셨다. ... 그분께서는 도덕적 삶을 규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규칙들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시기보다는, 그것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할 영원한 원칙들을 선포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는 동기와 목적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법을 제시하지 않으셨으나 또한 구약의 도덕적 가르침들이 정지되었다고 말씀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구약의 의식법과 예법들은 폐지되었으나,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다.” from God`s Decrees for Moral Living, Oct. 1943, Vol. 57, NO. 10, p.5.
여기에 더해 다음의 요한 웨슬리의 글은 나에게 더 큰 도전을 주었다.
“구약의 희생제사와 성전 예배와 관련된 모든 명령과 의식을 포함하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진 제사법과 의식법을 우리 주께서는 정말로 폐하러 오셨다. ... 그러나 십계명 가운데 포함되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강화된 도덕법은 그분께서 없이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들은... 일격에 모든 계명들을 파괴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들은 ‘우리 주께서는 율법에 대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분께서는 그것을 폐하셨다. 오직 한 가지 의무만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것이다. 모든 계명은 우리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from John Wesley, “upon Our Lord`s Sermon on the Mount”, Discourse 5, in Works, Vol. 5(1829 ed.), p. 311, 317.
위의 글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의문의 율법을 폐하셨지만 도덕적 율법, 즉 십계명은 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음의 성경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그렇다. 십계명이 폐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내 마음에 자꾸만 걸리는 것은 그 십계명 속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안식일은 의문에 속한, 폐지된 유대인의 법으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그럼 십계명 중에 다른 9계명은 유효하나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만 예수께서 폐하시고 대신 그분의 승리의 기념일로서 부활하신 날을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일까?
다음의 요한 웨슬리의 글은 나의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십계명 전에 존재한 계명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그 날은 그대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이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그 날을 당신 자신의 것이라고 항상 주장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분께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 그분께서는 태양이나 달, 천체들과 지구가 존속되는 한, 인간의 자녀들이 이 날을 ‘그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당신을 예배하는 날로 보내도록 지정하셨다.” John Wesley, “A Word to a Sabbath-Breaker”, In Works, Vol. 11(1830 ed.), p. 164-166.
위의 글을 보면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첫째,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아니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제정하신 날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날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거룩하게 하신 날이었으며 최초로 기억하라고 명하신 날이라는 것이다. 둘째, 안식일은 창조할 당시에 거룩하게 제정된 것이므로 나중에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졌던 의문의 율법에 속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D. L. Moody 목사님은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하셨다.
“안식일은 에덴에서도 구속력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항상 유효하였다. 이 넷째 계명은 ‘기억하라’는 말로 시작하는데(영문 참고),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 법을 돌비에 기록하실 때에 안식일이 이미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다른 아홉 계명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이 한 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D. L. Moody, Weighted and Wanting (1898), p46, 47.
그렇다! 그럴 리는 없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안식일 계명만 폐지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그것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일요일로 변경되었을 뿐인가? 현대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로 그것을 대치하셨다는 것에는 어떤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수백 개가 넘는 교단들이 어떻게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킬 수 있겠는가? 성경의 명확한 증거가 없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고 명하신 계명을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이것은 단순히 날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기독교는 일요일을 지키는가? 거기엔 분명히 어떤 근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성경적인 확신과 검증이 없이 나의 신앙을 인간의 말이나 전통에 기초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나의 믿음과 신조를 증명하기 위해 일요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제2부_연구를 시작하다 -‘일요일이 참 예배일임을 증명하겠다’
내 예상과는 달리 일요일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인 자료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강의와 자료들을 찾아보아도 일요일을 왜 안식일 대신 예배일로 지키는지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인 해답을 내놓은 것이 없었다. 몇 목사님들께 물어보았지만 내 맘에 와 닿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난 성경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요일에 대해 언급된 여러 개의 성경 절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경 절을 서로 비교하면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일요일에 대한 성경의 증언
일요일에 대한 성경 절은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한글과 영문 성경들을 여럿 비교해 보았지만 신약성경에 일요일에 대해 언급된 것은 아래의 8곳뿐이었다. 1. 마 28:1, 2. 막 16:2, 3. 막 16:9, 4. 눅 24:1, 5. 요 20:1, 6. 요 20:19, 7. 행 20:7, 8. 고전 16:1, 2.
그리고 이 중에서 예배나 집회와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다음의 세 성경 절이었다.
1.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잡힐까 봐 두려워서 그들이 모이던 장소에 모인 후문을 잠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잃고서 어쩌면 그들에게도 닥쳐올지도 모를 박해에 대해 염려하고 두려워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잡힐까 두려워 숨고 문을 잠갔던 그 모임을 일요일 예배의 시작이나 근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성경 절 역시 예배와는 관련이 없는 성경 절이었다.
2. 행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서 그들은 분명히 안식 후 첫날에 모였고 바울은 설교했다. 난 일요일 예배에 대한 어떤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러나 성경의 해석을 내 뜻에 끼워 맞추지 아니하고 정말 성경 자체가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그들이 모인 것은 떡을 떼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떡을 떼는 것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하던 일이었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행 2:46 참고). “안식 후 첫날.” 난 어쩌면 이것이 일요일 예배의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비교한 새 번역 성경, Today`s English Bible에는 안식 후 첫날을 “토요일 저녁”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할까? 당시의 안식 후 첫날은 분명 오늘날 일요일이어야 할 텐데 어떻게 오늘날의 토요일 저녁이라는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유대인들은, 아니 성경 상으로 하루는 저녁에서 시작하여 저녁으로 마치는 것으로 계산한다. 레위기 23:32절에는 안식일이 저녁에 시작하여 저녁에 마치는 것으로 나왔다(창 1:5, 8절 참고). 그러므로 그날 밤늦게까지 계속된 바울의 그들과의 마지막 고별 설교는 오늘날로 말하면 토요일 저녁이나 밤이 맞는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으로 그 모임은 정기적인 모임이 아니었으며 바울을 떠나 보내는 특별한 송별의 저녁이었다. 여하튼 안식 후 첫날 당시 일요일이 시작되는 때에 바울이 말씀을 강론하고 집회를 열지 않았는가? 이것이 일요일 예배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바울은 안식 후 첫날보다는 안식일(토요일)에 말씀을 강론하고 집회를 연 것이 훨씬 더 많았다.
3. 고전 16:1, 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난 먼저 여기에 언급된 “연보”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성경 사전에 의하면 헌금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도라(dora, 눅 21:1,4절 참고)를 사용했으나 여기의 “연보”는 로기아(logia)라는 “수집, 모금” 등의 뜻을 가진 단어였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여기의 “저축하여 두어서”라는 말을 영어로는 “by him in store”(KJV)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그들 스스로 혹은 그들 각자가, 따로 저축하라”는 뜻이다. 스페인 역에는 “집에 저축하여 두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또한 “매 주일 첫날에... 이를 얻은 대로”라고 말하여 첫날에 일한 수익을 따로 떼어 모아 두었다가 바울이 갈 때에 구제헌금으로 예루살렘에 가지고 갈 수 있게 하라는 뜻이었다. 참고로 에스겔서 46장 1절에는 안식일(토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을 “일하는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한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던 중에 다음의 충격적인 기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요일에 대한 교단의 발표
장로교회: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그러한 명령을 전혀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명령이라며 일요일 준수 전통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 우리가 성경을 최상의 권위로 인정한다면, 안식일 준수자들이 진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Christian at work, Apr. 19, 1883)
침례교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계명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지만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 이 주제에 대해 참으로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는 여러 해를 연구하였는데, 내가 알고자 한 것은 그렇게 바뀐 기록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약 성경 가운데는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안식일 제도를 토요일에서 주일의 첫날로 옮겼다는 성서적인 증거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Dr. Edward T. Hiscox, author of The Baptist Manual Quoted in the New York Examiner, Nov. 16, 1890
감리교회: “유아 세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확실성이 없으며 … 주일 중 첫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성경적 근거도 없다.” (감리교회 신학 개요, Theological Compend, Binney, p.181).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요일을 지키라든지 또는 유대인의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기라고 지시한 (성경)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Harris Franklin Rall, Christian Advocate. 6. 2, 1942).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 “창조가 다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안식일은 변경될 수 없다. 안식일이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변경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조리 허황된 이야기다. 만일 누군가 때와 법을 변경했다면 나는 그의 이름을 적그리스도라고 당당히 말한다”(알렉산더 캠벨, The Christian Baptist, Feb.2, 1824, Vol.1 №. 7).
회중 교회: “아무리 우리가 일요일을 엄숙하고 굳건하게 지킨다고 하여도,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특별하고 거룩한 계명으로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다. 일요일을 준수하면서 계명을 지킨다고 내세울 수 없다”(Ten Commandments, W.D. 데일 박사).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그들의 권위로 일곱째 날을 첫째 날로 대체했다는 현세의 관념은 성경상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Dr. Lyman Abbott, Christian Union, 1. 19, 1882).
루터교회: “주일(일요일)의 준수에 대한 내용을 하나님의 계명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Augsburg Confession of Faith).
“그들은(천주교회) 성경과는 반대로 안식일이 일요일, 즉 주일로 변경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안식일을 바꿔버린 것보다 더 참람된 교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계명의 하나를 삭제해 버리기로 할 만큼 그 교회의 권위와 세력은 대단하다”(마르틴 루터, Augsburg Confession of Faith, Art. 28, Par. 9).
성공회: “신약 성경 상에서는 일요일에 일하지 않았다는 아무런 언급이나 암시도 찾아볼 수 없고, 일요일 휴일화에 대한 어떤 신성한 규정도 없으며, 그 외 성회례(수난 주일의 첫날로서 머리 위에 재를 뿌리는 관습 - 역자 주), 수요일 및 사순절 등도 일요일 준수와 마찬가지로 전혀 근거 없는 전통일 뿐이다”(Canon Eyton, The Ten Commandments, pp.52,63,65).
그리스도 교회: 주일 중 첫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른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한 곳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변경한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적이 성경에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그러한 변경을 암시한 곳이 전혀 없다”(첫째 날 준수, pp.17,19).
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성경상 아무 근거가 없는 날을 마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날처럼 거룩히 지키다니... 예수님께서도 지키지 않으셨고 명하지도 않으신 날을 어떻게 “주일”(The Lord`s Day)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8)이라고 까지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 의해 언제부터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게 된 것일까? 나는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해 더 연구해보기로 하였다. 나의 연구가 계속될수록 난 내 눈을 의심할 정도의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3부_어떻게 이런 일이?
일요일 준수의 시작
나는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왜 기독교회가 성경의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주일처럼 지키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믿는 바를 확실히 아는 것은 모든 신도의 권리이자 특권이요 의무라고 믿는다. 나는 일요일 준수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수 세기 후까지 성경 상 안식일인 토요일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5세기까지도 유대인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이 그리스도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엄숙한 준수와 더불어, 그것은 완전히 중단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감소하였다.” Lyman Coleman-Ancient Christianity Exemplified, chap. 26, sec.2.
영국 교회의 성직자인 Mr. Morer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초기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큰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날을 헌신과 설교로 보냈다. 그들이 이러한 습관을 사도들 자신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A Discourse in Six Dialogues on the Name, Notion and Observation of the Lord`s Day, p. 189.
위의 글들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안식일을 준수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교회들을 시작으로 타협하기 시작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교회 역사가로서 5세기경에 저술활동을 한 소크라테스의 글을 읽어보라.
“전 세계를 통틀어 거의 모든 교회가 매주 안식일에 성스럽고 신비한 일들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의 어떤 전통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을 중단하였다.” Ecclesiastical History, book 5, chap. 22, 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 Nicene Fathers, 2d series, Vol. 2, p. 32.
황제의 압력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수많은 이교도들은 그들의 태양신을 섬기던 전통적 관습을 그대로 그리스도교에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과 태양의 날인 일요일에 예배드리라는 황제의 명령에 차츰 굴복하게 되었다.
“일요일 준수를 가장 최초로 법적인 의무로 인정한 것은 농사일에 종사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법정과 도시의 거민들과 작업장들은 일요일에 휴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한 A.D. 321년에 제정된 콘스탄티누스 헌법이다.” Encyclopaedia Britannica, 11th ed., art. “Sunday.”
위의 법령에 대하여 당시 교회의 유명한 감독이었으며 저술가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측근이 되기 원했던 유세비우스는 그 법령이 교회와 국가의 연합된 노력의 결과였음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무엇이든지 간에 안식일에 하는 것이 의무였던 그 모든 것을 우리(교회)는 주의 날로 변경시켰다.” Translated from Euselbius, Commentary on the Psalms, in Migne, PatrologiaGraeca, Vol. 23, cols. 1171, 1172.
로마교회는 처음에는 이교의 태양 숭배일을 기독교로 들여오고 그것을 국가의 힘을 빌려 법제화시켜 모든 사람이 일요일에 휴식하게 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안식일에 일하도록 하는 법령을 만들고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을 파문하는 법령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화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토요일(Sabbato, the Sabbath)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날에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은 특별히 존경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유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될 것 같으면,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내어 쫓김(파문)을 당할 것이다.” Charles Joseph Hefele, A History of the Councils of the Church, Vol. 2 (1896) English ed.), p. 316.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한 자료들을 기록하자면 수백 쪽의 지면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적어도 내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수 세기 후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상 안식일인 토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요일은 고대로부터 태양신 숭배일이었으며, 그것이 로마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에 천천히 스며들어 오게 되었고 카톨릭교에 의하여 기독교의 예배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이교의 태양 숭배일(일요일)이 기독교의 예배일로 자리 잡기까지
주 후 130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시작됨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강요하자 유대인들이 반발하였고 황제는 예루살렘 성전재건령을 철수시킴.
132-135년경 유대인에 대한 제재(안식일 포함)가 시작됨-발코케바의 반란으로 로마 정예부대 22군단이 소실 당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로마군은 유대인 마을 985개를 전멸시키고 유대인 80만 명 이상을 죽였다. 이에 더해 1. 토라(모세오경) 사용금지, 2. 할례 금지, 3. 안식일 예배금지령을 내렸고 이를 어길 시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 오인받기 쉬웠는데 유대인과 같은 구약을 믿고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대인과 차별을 두기 위해 일요일에 예배드리거나 혹은 안식일과 일요일을 둘 다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함. 일요일과 토요일을 둘 다 지키는 무리들은 5세기까지도 존재하였다.
321년 콘스탄티누스 일요일(태양의 날) 휴업령
325년 니케아종교회의-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도록 결의함
343년 사르디카회의-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부활의 날이란 미명아래 “주의 날(lord`s Day)로 개칭하고 사역자가 여행으로 “주의 날”을 세 번 범하면 제명하도록 함.
364년 라오디게아총회-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여 지키도록 하고 안식일(토요일)에는 대신 일을 하도록 명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발견되면 파문한다고 선언함.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이러한 사실들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작은 뿔 즉,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서 이미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적그리스도와 안식일
성경은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과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을 미리 예언하였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살후 2:3,4.
과연 누가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가?
“왜냐하면 그대(교황)는 목자이며, 의사이며, 지도자이며 남편이며, 마침내 지상에 있는 또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Christopher Marcellus’ Oration in the Fifth Lateran Council, 4소 session, in J. D. Mansi, SacrorumConcilforum --- Collectio, vol. 32, col. 761, translated.
“성경에서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모든 이름, 그것들에 의해 그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그 모든 동일한 이름들은 교황에게 적용된다.” Robert Bellarmine, Disputationes de controversiis, Tom. 2, “Controversia Prima”, Book 2 chap. 17(1628 ed., Vol. 1, p. 266), translated.
“그들(교황권)은 무오함을 사칭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들은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들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공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들은 지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다고 공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Adam Clarke, Commentary, on Daniel 7:”25.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성취인가? 누가 이러한 배도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을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에 더해 우리가 속지 말도록 그 불법의 사람이 무엇을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단 7:25.
그는 때와 법을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때와 법에 관련된 계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이다. 이 넷째 계명은 다른 계명과는 달리 하나님의 이름(여호와), 하나님의 직함(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역(이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줌)이 나타나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심을 나타내는 표로서 그분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사단은 작은 뿔 세력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이 중요한 때(안식일-토요일)와 법(십계명의 넷째 계명)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놀랍게도 위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작은 뿔”로 상징된 교황권의 활동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교황은 너무도 큰 권위와 권세를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율법까지라도 수정하거나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 … 교황은 하나님의 법을 수정할 수 있는데, 그의 권세는 사람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활동한다.” Lucius Ferraris, Prompata Bibliotheca, “Papa”, art. 2, translated.
“문: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카톨릭교회가 그 존엄성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에 우리는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준수한다.” The Convert`s Catechism of Catholic Doctrine, p. 50.
다음의 경악할만한 카톨릭증언을 읽어보라. 성경이 교회 위에 있는가? 교회가 성경과 율법 위에 있는가? 만일 교회가 성경 위에 있다면 교회는 성경을 마음대로 바꿀 권위가 있다고 믿게 된다.
“성경 어디에도 예배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진술이 없다. 사실은 성경이 세상에 주어지기 수 세기 전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을 만들었으며, 성경이 교회를 만들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일요일을 예배일로 제정하였다. 이 동일한 교회가 거룩한 권위에 의하여 성경이 만들어지기 오래전에 연옥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옥에 대하여 갖는 동일한 권위를 일요일에 대해서도 가진다.” Martin L. Scott, Things Catholics Are Asked About(1927 ed), P. 136.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말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십계명에 나타난 것과 반대로 안식일을 주의 날인 일요일로 바꾸었다고 단언한다. 카톨릭교회에 있어서 안식일을 변경한 것보다 더 자랑할 만한 예증은 없다. 그들은 십계명의 하나를 삭제했기 때문에 교회의 힘과 권세는 참으로 크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Luther, Your Augsburg Confession, quoted in the Creeds of Christendom, Philip Schaff, Vol. 3, p. 6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으며 또 이 땅에서 지키셨고 또 지키라고 명하신 날을 버리고 태양신의 날을 지킬 수 있는가? 다음의 침례교의 에드워드 히스콕의 글이다.
“물론 나는 일요일이, 우리가 기독교 교부들이나 다른 출처로부터 배운 대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한 종교적인 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요일이) 배도한 교황권에 의해 채택되고 승인되었을 때, 이교주의의 표시로 낙인 찍히고, 태양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을 개신교주의가 한 신성한 유산으로서 그것을 상속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Dr. Edward T. Hiscox, author of The Baptist Manual Quoted in the New York Examiner, Nov. 16, 1890
그렇다. 아무리 찾아봐도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었다. 오히려 로마 교황권이 바꾸어 놓은 태양의 날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알게 된 것은 이러한 교황권의 변조된 안식일이 아닌 성경의 참 안식일을 고수하고 보존해온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마다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엄청난 로마교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내 마음에 있는 이런 생각을 한 지인에게 말했을 때에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뭐 그렇게 날짜가 중요한가? 우리가 어느 날을 지키든 우리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믿는가? 정말 날짜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왜 굳이 이교 태양신의 축제일인 일요일을 고집하는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예수님도 지키셨고 사도들도 지켰던 그 안식일이 단순히 날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안식일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며 거룩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제4부_다른 연구를 시작하다 -‘안식일 그 이단의 정체는?’
나는 드디어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안식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경 예언이 참말이라면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은 무엇일까? 십계명을 주시기 전, 유대인이 존재하기 전 하나님께서 창조와 동시에 주셨던 그 안식일의 원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먼저 성경에서 어떻게 안식일이 지켜져 내려왔는지 살펴보았다.
창조 시에 제정된 안식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이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 2:1-3).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창조 받은 후 첫 번째로 누린 축복은 바로 안식일의 축복이었다. 안식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 마음껏 교제하며 창조주와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연계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드리며 그러는 가운데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다. 안식일은 이 땅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가정제도와 함께 제정되었다. 창조의 날과 시간은 일곱째 날 안식일이 포함된 주일(요일)제도가 되었다. 7일을 한 주일로 한 이 제도는 천상의 주기(하루, 한 달, 일 년)와는 달리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그리고 지구 역사이래 그 요일들은 변하거나 바뀐 적이 없다.
부조와 선지자들이 지킨 안식일
노아가 지킨 안식일 – 노아 시대에 7일 제도가 존재한 것을 보면 노아는 당연히 안식일을 준수했음에 틀림없다. 아담으로부터 구전으로 전해 받은 진리는 분명 노아에게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창 7:4, 10; 8:10, 12 참고)
아브라함이 지킨 안식일 –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창 26:5). 이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준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안식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면서 만나를 통해 안식일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의 유일한 양식이었던 만나는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금요일에 두 배를 거두어 안식일에 먹을 만나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또한 그들은 평소에는 하루에 쓸 것 이상의 양을 거두어 놓으면 상했지만 안식일을 위해 거둔 두 배의 만나는 상하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였다(수 5:12).
십계명에 기록된 안식일 -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부조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구두로만 전해졌던 그분의 계명을 친히 두 돌비에 새겨주셨다. 그리고 그 십계명의 중심에는 안식일 계명이 있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출 20:8-11.
증거막(성소)과 안식일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다른 말로는 증거막이라고도 불렸다(출 38:21). 증거막이라고 불린 이유는 성소 안에 증거궤(출 30:6)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증거궤 안에는 바로 증거판(출 25:16)이라고도 불렸던 십계명이 들어 있었다. 그럼 도대체 십계명은 무엇을 증거하기에 증거판이라고 했는가? 십계명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특히 넷째 계명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된 자녀임을 증거한다. 또한 십계명은 인간을 향하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백성이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들을 증거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 이스라엘 백성들의 흥망성쇠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말씀을 순종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려 있었다. 또한 저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그 나라의 번영과 영광이 달려 있었다(렘 17:24-27).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겔 20:20.
예수님과 사도들이 지킨 안식일
예수께서 친히 지키심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창조 시에 직접 제정하시고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던 바로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본인이 안식일을 지키셨다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분이 반포하신 진리를 확증하는 것이었다. 간혹 유대의 관원들은 예수님과 안식일과 관련하여 논쟁하였으나 그것은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거나 안식일이 어느 날인가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그 정신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지킨 안식일 -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눅 23:54-56).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안식일 계명을 지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위의 말씀을 통해서 안식일은 토요일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지킨 안식일 –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사도들이 안식일을 여전히 준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4).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이방 나라에서 안식일을 지킴 –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행 16:13).
어떤 분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위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이 유대 회당이 없던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예배드릴 조용한 장소를 찾아 나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바울에게는 “자기의 규례”(행 17:2)였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 예수님은 주후 70년경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내다보시면서 그분을 따르는 백성들이 여전히 안식일을 지킬 것을 기대하셨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19, 20).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십자가 후, 부활하신 후에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로 생각하셨음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부활의 날로 기념하라거나 그날에 예배를 드릴 것을 기대하셨다면 그로부터 약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안식일을 언급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안식일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그 당시에는 “주의 날” 하면 당연히 안식일이었다. 우리가 이미 배운 것처럼 일요일을 “주의 날” 혹은 “주일”로 부르게 된 것은 주후 343년경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언급한 “주의 날”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주의 날”(Lord`s Day)을 의역하자면 “주님이 주인이 되신 날”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예수님이 어느 한 날을 지정하여 그 날의 주인이 당신 자신이라고 한 날은 안식일밖에는 없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구약에서도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my holy day)라고 하셨다(사 58:13).
하늘에서도 지키게 될 안식일 – 이사야 선지자는 죄의 역사가 마친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구원받은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2, 23)
매우 간단히 살펴본 것이지만 성경 전체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대한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경에서 “주일 예배” 혹은 “일요일 성수”등에 대한 내용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제5부_안식일은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안식일이 참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형식적이고 의무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성경의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킨 것이다. 그러한 안식일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줄 수 없었다. 오늘날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놓쳤던 그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창조의 기념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1,2).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피조된 자녀이고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길 원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며 우리가 그분이 지으신 것들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하셨다. 그리고 창조주께서는 매 일주일 중 하루를 특별히 구별하여 그분을 경배하고 찬송하며 교제하는 날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출 20:8-11.
구원의 기념일
신명기 5장에는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이 그대로 나와 있는데 거기에는 안식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받은 것은 인간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구원의 표로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안식일은 구원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화의 표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
구속은 곧 창조다 라는 말이 있다. 안식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징임과 동시에 인간의 죄된 마음과 성품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재창조한 기념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창조주와 그들을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상기시켜 주는 날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표
“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겔 20:20).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표징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므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 교제하는 날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레 23:3).
여기의 “성회”라는 말은 “거룩한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이 날은 또한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교제하는 날이다.
육체적인 쉼의 날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 일은…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주일 중 하루는 육체적인 노동과 세상적인 염려로부터 벗어나 쉬기를 원하셨다. 안식일을 통해 마음과 정신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쉼을 누리고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치료와 회복 그리고 선을 베푸는 날
“사람이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여러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그들을 질병에서 뿐 아니라 죄의 병에서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주셨다. 안식일은 나 자신을 위해 하든 모든 일들을 멈추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날이다. 안식일은 천연계와 이웃과 하나님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갖는 시간이다. 안식일을 통해 인간은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치유와 회복의 날이다. 우리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막 2:27)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은 즐겁고 존귀한 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사 58:13, 14).
안식일이야말로 그분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즐겁고 귀중한 날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며 그분이 주신 놀라운 축복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안식일의 축복을 어떻게 누릴까?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시간이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노인이나 청년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유럽사람에게나 아프리카 사람에게나 미국사람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원하면 누릴 수 있도록 안식일을 시간의 개념 속에 두셨다. 그러면 이 안식일의 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살펴보자. 안식일(토요일)이라는 시간 –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니…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레 23:3). 위에서 말씀한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또한 우리가 어느 나라 어디에 거하든지 “너희 거하는 각 처에서” 지키라고 하셨다. 미국에서는 미국시간으로, 한국에서는 한국시간으로 토요일에 안식일의 거룩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안식일 시간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다 -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레 23:32). 성경은 분명하게 하루의 시작과 끝이 저녁부터 저녁까지라고 말씀한다(창 1:5 참고). 따라서 안식일도 오늘날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해질 때)까지이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금요일 오후 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날은 예비일(금요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4). 즉 금요일 오후 해질 때가 가까워오자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고 표현한 것을 보아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계산한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예비하라 - “이 날은 예비일(금요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4). 위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을 특별히 “예비일”이라고 불렀다. 안식일을 위해 예비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분과 교제하는 날이다. 만일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 가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안식일은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뵈러 가는 날인 것이다. 자신을 위한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8:13-14). 안식일을 위한 준비 – 안식일은 나 자신을 위한 날이 아니다. 안식일 시간이 다가올 때에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쾌락을 위한 일들을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 전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서 돌아서야 한다. 상업적 거래를 한다거나, 세속적 쾌락이나 사물에 몰두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안식일 시간이 되기 전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깨끗이 청소를 해두는 것도 기쁘고 상쾌한 마음으로 안식일을 맞는 방법이다. 안식일이 특별한 날이 되도록, 그리고 안식일에 부산을 떨지 않도록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금요일을 “예비일”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도 금요일이 되면 먼저 안식일을 예비하는 날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준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준비이다. 거룩한 안식일이 되기 전 우리 마음도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해야 한다. 마음속의 증오나 비통함, 불평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씻어내고 가족과 혹은 이웃과 서로 화평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평안 속에서 안식일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안식일은 이 땅에서 천국의 시간을 미리 맛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안식일은 재창조를 경험하는 놀라운 변화와 회복 그리고 축복의 날이 될 것이다.
연구를 마치면서
안식일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문제점을 찾기 위해 연구하던 저는, 안식일에 관해 연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안식일은 더욱 성서적이고 올바른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거룩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식일” 하면 율법주의요 이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안식일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표징이요, 우리 믿음의 고백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주께서 죄가 존재하기 전 인간에게 주신 큰 사랑의 선물입니다.
또한 안식일에 관해 연구하면서 안식일은 단순히 토요일(날짜)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날이 예배일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충성과 신뢰의 문제요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권위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안식일 계명만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아는 사단이 어떻게 공격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보면서 하늘 도성에 들어갈 자들을 일컬어 “그분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계 22:14 KJV). 사단은 오늘날 타협된 진리를 믿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의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저는 이 놀라운 진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진리는 내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그리고 그분의 오묘하고 깊은 뜻과 사랑을 새롭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안식일에 관한 저의 연구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도 우리의 창조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이 놀라운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 하늘의 시간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리탐구_144,000인이 유대인이라면?
세 번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진주문 위에 쓰여 있는 현판 때문에 그러합니다. 세상에서도 성문에 쓰는 현판의 이름은 매우 큰 의미를 상징적으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서울 도성(都城)의 사방에 세운 성문인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등으로 불렀으며 각각 그 문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의 성전에도 12문이 있는데 그 문 위에 각각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계 21:12~13)
그 문들 위에는 오직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만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박고 고통받고 환란을 겪으며, 피 흘리기까지 믿음으로 순교한 성도들은 거의 이방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만이 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합당하며 하나님의 뜻이 공평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야 할까요?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고 상고할 때 그 교훈은 누구나 보기에 상식적이며 또한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깨닫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즉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아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러한 세상의 잘못된 교리들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한 사실들과 이해되지 않는 말씀들이 성경의 진리와 어떻게 위배되며 어떠한 교훈이 성경적으로 합당한지 알아보겠습니다.
●두 번째 쟁점 “144,000인의 숫자의 의미”
두 번째 쟁점입니다. 144,000인의 숫자의 상징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❶ 144,000명은 상징의 숫자이다. (사람들이 더 있다.)
❷ 144,000명은 정확한 숫자이다.
그러나 둘 다 성경적으로 어느 해석 부분도 명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144,000인의 의미는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교단의 사람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많은 신실한 신학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의 공통된 의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44,000인의 숫자에 대해서만 논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말씀의 핵심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라 그 144,400인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글들을 읽으시면서 144,000인의 숫자에 관한 정확한 “의미”를 여러분 스스로 신앙적으로 정립하시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증_진리를 만난 청년의 솔직한 이야기 2부
우여곡절 끝에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회사로 입사하려는데 그동안의 부절제한 식습관으로 건강검진에서 불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견책이라 여겨 1~2주 식습관을 바꾸고 열심히 운동하여 무사히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작업하는 사수가 초보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무리하게 시키고 화를 자주 내며 일을 요령 없이 하는 통에 제 몸이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용접할 때 부주의하여 내게 화상을 입힌 일,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며 불평과 음담패설, 남 흉보는 얘기 등...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수시로 변하는 성격에 '세상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왜 이런 인간과 일하게 되었나' 하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못 참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아차! 쓰러졌구나!' 그 일을 탄식하고 회개하였으나 내 저항은 보복으로 돌아왔고 그것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전 몸을 많이 쓰는 일과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는데 추운 겨울에 일찍 일어나 익숙하지 않은 일터로 가는 게 참 서글펐습니다. 그때 듣던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이라는 찬송만 들으면 지금도 마음이 찡합니다. 너무 힘들어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는 하나님의 정확한 인도함을 받아 이곳에 왔는데 여기서 그만두어도 될까?' '감히 하나님을 거역하려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소개해준 형제님에게 미안하고 조선소에 간 것을 아는 지인들에게 창피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출근하는 차 안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보옵소서 주님의 인도로 이곳에 왔는데 사수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을 주님도 보셨나이다. 주님의 뜻이라면 그를 제게서 치워주옵소서!' 감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다른 조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소라는 직장은 항상 큰 도전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음담패설, 상스러운 욕, 술 이야기 같은 대화에 잘 섞이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유연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유별나다고 찍힌 제가 일도 못 따라간다면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었기에 책잡히지 않으려 늘 긴장했고 신경 써서 일했습니다. 다행히 감사한 것은 직장동료에 대한 미움을 마음에서 버리게 되었으며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까지 진정한 동정과 긍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하여 응답받는 체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최악의 시기 6개월을 지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침마다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눈이 필요한 것을 보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나게 하옵소서. 자존심과 자아를 주님께 드리오니 가져가시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하게 하옵소서. 결단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주님 성품 닮게 하소서. 저를 곤란에서 구하시고 시험에 들게 마소서. 속절없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옮긴 팀도 여전히 영적 투쟁은 있었습니다. 험악한 인상과 말투, 전신의 문신에 전직 조폭이 팀에 합류했는데 포악한 성격이 마치 배에 사자 한 마리를 풀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나는 항변했다가 오히려 가혹한 보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통해 동거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인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기도하면서 보게 하셨습니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형님 밑에서 끝까지 버텼다면 하나님께서 크신 영광 받았을 것인데 저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조선소에서는 작업하다 자재가 바닥나면 남의 자재나 작업공구를 가져다 쓰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공구박스전체를 가져가기도 합니다. 명백한 도둑질인데 관행이다 보니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우리 작업공구가 없어져 사수가 같이 훔치자는 제의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남의 것을 훔치지 않길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와주소서' 그리고 주변에서 빌려 쓸 수 있는 작업공구를 찾으러 갔다 왔더니 사수가 이미 훔쳐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직접 훔치지는 않게 되었지만 남의 물건을 쓰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또다시 작업공구를 훔쳐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에서 모은 부속품으로 새로운 작업공구를 만들어 사용하니 훔치지 않아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 잃어버린 비싼 공구가 바닥에 놓여 있었는데 주인이 찾지 않으면 가져가려고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탐심이 있음을 깨닫고 마치 부정한 것을 버리듯 팀원에게 주었습니다. 며칠 뒤 또 작업공구가 없어져 사수가 이전처럼 같이 훔치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결단코 훔치지 않겠습니다. 이제 그와 맞설 때이니 저에게 용기를 주옵소서 어떤 불이익도 감당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게 하소서' 함께 작업하는 사수에게 늘 순종했기에 사수에게 반항하는 것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마음먹고 돌아왔을 때 이미 작업공구를 훔쳐 본인이 가져간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계명을 지키기 위해 분별을 요구할 때, 큰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주님 뜻을 물을 때 항상 응답해주셨습니다.
조선소에서 1년을 지내며 처음에는 유별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부끄러워 식사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동료들과 동떨어지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당하게 말하고 동료들의 시선에 의연하게 대처할 때 오히려 나를 인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남을 두려워하면 그만큼 스스로 시험의 길을 열어두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보더라도 '쟤는 원래 저런 애야'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불필요한 시험은 피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주변에 도움을 주는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여 점차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깨달은 것은 예언의 말씀보다는 영원한 복음의 진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은 굴복할 것이 많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원하며 '언제나 겸손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나아간다면 성공적으로 또 명예롭게 그의 높은 지위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품고 오늘도 일터로 향합니다.
기독교회사_도마와 인도에 전해진 복음
16세기에는 고아(인도)에 모든 편협과 공포를 드러낸 예수회의 종교재판소가 세워졌으며, 시리아 교회를 교황권 관할구역에 종속시키려고 결정되었을 때, 그 무자비한 기관은 시리아 교회를 위압하고 바벨론으로부터 주교들이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 종속 상태는 1599년에 열렸던 디암페르(Diamper) 종교 회의에 의해 확정되어 거의 두 세대에 걸쳐 로마의 폭정이 계속됐는데, 쿠넨 크로스(Coonen Cross)에서 아시리아 교회의 반항이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 사역을 했는지는 여러 저자의 논란이 되었고, 논박할 수 없는 결론을 얻어내기 위해 수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광야 교회가 어떤 나라 안에서 고통을 당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인도였다는 주장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모든 사람은 누가 그 교회를 창설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A. Mingana는 이렇게 기록한다. “사도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동방 교회의 변치 않는 전승이며, 역사가, 시인, 기도서, 전례서, 어떤 저자이든지 도마에 관해 말하는 기회를 얻는 사람은 인도와 결부시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피 아라비아(Arabia the Happy)와 조코트라 섬에 복음을 전한 후에 그는 코친에서 약간 북쪽 마을인 크랑가노르(Cranganor)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말라바르를 통치했던 군주들 중 가장 강력한 군주가 당시에 주재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교회를 세운 그는 남쪽에 있는 쿨란(Coulan) 성읍으로 여행했다.” (J. M. Neale)
“성 도마가 인도 전체에 복음을 전한 상황은 종종 주목받을 만한 작가들의 의문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많은 증거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게 되며, 그와 같이 탁월한 역사의 권위자들이 보증하는 사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은 편견이 없는 마음이라면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모든 헬라어, 라틴어, 시리아어 유적들은 성 도마가 인도 제국의 사도로서, 신앙의 횃불을 그가 순교를 당한 먼 지역들까지 가져간 사람임을 증명한다. 어떤 저자들은 그가 멀리 중국까지 가서 사도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인도에서 성 도마가 복음의 사명을 수행하고 순교한 것은 모든 순교 역사와 고대 전례 문서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믿을 만한 그리스도교 전승 자료를 구성한다고 확증하였다.” (M. L'Abbe Huc, 예수회 여행 작가)
“성 도마가 창설자라고 주장하는 인도에 있는 시리아 교회는, 모두가 로마 제국의 바깥 지역들에 있는 독립된 교회들로서, 우리가 나중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독립된 존재로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며, 우리는 여러 세기들을 통하여 내려온 그들의 역사 과정에 관하여 무엇인가 알기를 원할 것이다.” (W. F. Adeney)
“아라비아 펠릭스(Felix)와 현재 소코트라라 불리는 디오스코리데스(Dioscorides) 섬에 그리스도교가 확립된 후에 그 거룩한 사도는 크랑가노르(Cranganor)에 상륙했는데, 그곳은 당시에 말라바르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 사는 곳이었다. ... 성 도마는 그러한 소규모 유대인 집단 마을 중 하나가 크랑가노르 인근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았다.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개종시켰고 그들의 회당을 그리스도교회로 바꿔 놓았다. 그것이 인도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요람이었다.” (J. D. D'Orsey)
어떤 권위자는 사도 도마 당시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해마다 이집트에서부터 인도로 큰 배 120척이 항해를 했다.”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매년 인도로 보내어진 로마의 주화들이 영국 화폐 5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가치였을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도마가 파르티아와 인도에 복음을 전한 선구자였음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롬 10:18). 그 일이 있었던 오순절에 예루살렘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의 대표자들이 참석했으며, 그들의 특성이 어땠는가 보라.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했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행 2:5, 9~11). 오순절 이야기는 이 방문자들이 자기들의 거주지들과 생활의 중심지로 돌아가서 열렬하게 전파했을 때 바람을 탄 날개처럼 확산되었다.
• 동방으로 복음이 급속히 확산되게 한 또 다른 상황은 유대인들이 아시아 전역에 분산되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동방을 뒤덮어, 그들이 가지 않은 땅이나 도시는 거의 없었다. 그 자손들은 그들의 거룩한 날들을 자기들의 유대적인 친분 관계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경축하여 지켰다. 동방으로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기 위한 최초의 지성적인 중심지 에뎃사(소아시아 현대의 우르파)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그 초기 교회의 대부분을 형성했었다.
• 동방으로 복음을 확산시킨 또 하나의 매개체는 아람어였다.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람어는 어원이 같은 동족어로서, 후자는 그리스도의 토착 언어였다. 저술가 요세푸스는 동방에 있는 다수의 아람어 독자들 때문에 처음에는 유대인 전쟁사를 아람어로 썼다가 나중에 헬라어로 썼다. 아람어는 파르티아 제국의 찬란히 빛나는 쌍둥이 수도 셀류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을 포함해 그 나라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Healing Story_섬유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9)
맛있고 정성이 가득한 어머님의 밥상이 행복한 이유는 차려주신 분의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천연계의 밥상들은 알면 알수록 감동이 더해갑니다. 맛있고 보기에만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픈 몸이 회복될 수 있도록 치료약을 듬뿍 넣어두셨습니다. 그 중 오늘은 쉽게 섭취할 수 있는 식이섬유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식이섬유를 통하여 섬세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식이섬유는 사람의 소화효소로는 소화되지 않아 그대로 배설되어 나오는 고분자 물질입니다. 주로 식물세포의 세포벽 또는 식물종자의 껍질 부위에 있고, 1971년 식이섬유가 대장암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 수용성 식이섬유와 불용성 식이섬유
1. 수용성 식이섬유
물에 닿으면 잘 녹기 때문에 끈적거리고 걸쭉해지는 젤 같은 형태가 됩니다. 식후 당이 혈 류에 흡수되는 속도를 늦추어 주고 나쁜 콜레스테롤인 LDH 콜레스테롤 수치를 내려 주며 위 속의 유익한 박테리아의 생성을 촉진시켜 줍니다. 또한 포만감을 높여주어 체중조절을 위한 식이요법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2. 불용성 식이섬유
구조가 두껍고 거칠며 소화관을 지나는 동안 물에 녹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대변을 굵게 만들어 줍니다. 대장에서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지 않습니다.
* 소화
초식동물은 셀룰라아제라는 소화효소가 있는데, 이는 볏짚이나 풀줄기 등의 섬유질 성분을 소화시켜 줍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셀룰라아제를 만들지 못하므로 섬유질을 소화하지 못하며 일부 섬유질이 대장에 살고 있는 대장균에 의해 분해되는 정도입니다.
* 효능
1. 수용성 식이섬유 - 젤 형태의 식이섬유는 음식물의 소화 흡수 속도를 지연시키므로 위장이 비워지는 시간이 늦어지므로 오래도록 포만감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 위장 관을 비우는 속도가 느려지면, 식후 당이 흡수되는 속도도 느려져서 혈당이 급속 히 높아지지 않고 서서히 올라가므로 췌장에서 혈당을 조절하기 위해 인슐린을 많이 분 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뇨를 관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수용성 식이섬유는 소장에서 콜레스테롤, 담즙산과 결합하여 몸 밖으로 배출되는 특성이 있어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데 효과적입니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수용성 식이 섬유를 심장병 예방 효과 A등급(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있음)으로 분류했습니다. 실제로 1992년 하버드대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통밀로 만든 빵을 먹는 사람들이 흰밀로 만 든 빵을 먹는 사람들보다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50%나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통 밀 빵에는 흰밀 빵의 3배에 달하는 섬유질이 함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 섬유질은 자신의 무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수분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이 부드 럽게 되고, 대변 양이 많아지므로 장의 연동운동이 촉진되어 변비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 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들이 남긴 찌꺼기들과 특히 발암성 물질까지 청소해주기 때문에 깨끗하고 건강한 우리 몸을 위한 필수적인 성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불용성 식이섬유
- 완화제 효과로 인해 변비를 예방하여 장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식이섬유입니다. 물에 녹지 않기 때문에 위장 관을 그대로 통과합니다. 불용성 식이섬유는 음식의 위장 관 통과속도 를 빠르게 합니다.
* 어떤 음식에 섬유질이 많을까요?
1. 통곡류
현미, 보리, 귀리, 통밀, 호밀 등 통밀로 만든 빵에는 흰밀로 만든 것보다 3배나 많은 섬유질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2. 콩과식물
녹두, 강낭콩, 대두, 완두콩, 팥 등 콩은 용해성과 불용성 섬유질이 함께 있으므로 곱게 갈아서 깨소금, 견과류 등을 넣고 그대로 먹는다면 아주 고소하고 부드럽습니다.
3. 과일류
사과, 오렌지, 라몽, 레몬, 바나나, 배, 자두 등 영국의 조나탄 로오즈박사 연구팀은 여러 가지 과일이나 채소의 수용성 식이섬유가 대장균과 같은 유해한 박테리아의 장벽 침입에 예방 효과가 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나나와 브로콜리의 수용성 식이섬유가 대장균의 감염을 45~82%나 줄였다고 합니다.
4. 채소류 - 브로콜리, 당근, 양파, 양상추, 시금치, 케일 등
5. 뿌리채소 - 고구마, 우엉, 무 등
6. 해조류 - 미역, 다시마 등
7. 견과류와 씨들
아몬드, 땅콩, 호두 등 단백질과 건강한 지방도 풍부하게 들어 있으므로 종류대로 골고루 먹으면 좋습니다.
8. 버섯류 – 표고버섯 등
-> 중요한 것은 어떤 음식이든지 가공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신선한 상태로 먹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는 점입니다.
별로 내세울 것 없어 보였던 섬유질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나요? 앞에서 눈에 띄게 일하는 사람이 있고, 앞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조용히 치워주고,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섬유질처럼 작은 일에 충성하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연합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