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이야기
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심경의 원제목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인도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 사용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슷한 음을 빌려다 쓰는 경우와 뜻이 비슷한 한자로 옮겨 적는 경우이다. '마하'의 한자표기는 산스크리트어의 비슷한 음을 빌려 적은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서의 뜻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마하'란 뜻은 크다와 많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보통 마하살이란 말이 있는데 '살'이라는 것은 인도어 '사트바'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그 뜻은 중생이다. 그래서 '마하살'은 큰 중생 즉, 우주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중생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반야'는 지혜를 뜻한다. '바라밀다'는 인도어 '파라밋타'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바라'는 '저 언덕'이라는 뜻으로 이상세계, 서방세계, 정토를 나타내고, '밀다'는 '건너다'란 뜻이 된다. 그런데, 인도에서 이 바라밀다를 '바라'와 '밀다'를 떨어뜨려 읽으려 건너다가 되고, '바라밀다'를 붙여서 읽으면 '건넜다'는 과거시제가 된다고 한다. '심경'의 심은 핵심이라는 의미로 해석 하는 게 올바르다.
이제 반야심경의 원제목 '마하반야밀다 심경'은 '큰 지혜로 저 언덕(이상세계)로 건너가는 핵심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2. 관자재보살
반야심경은 원래 관자재보살이 심제자 중 하나인 사리불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주인공은 관자재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관자재'는 불교 경전에 따라 관세음, 준제보살, 심일면 관세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자재 보살의 인도어 본명은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 사트바이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중생의 고통일지라도 내 부모, 내 자식을 보듯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있고, 이를 한자로 옮길 때 관세음이나 관자재로 옮긴 것은 음을 빌린 것이 아니고 뜻을 빌려서 적은 것이다.
현장스님의 경전번역 이전에는 관세음이라 쓰였고, 그 이후 경전 번역에는 관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고 표기하는 반야심경은 현장스님 이후에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륜스님의 말씀으로는 뜻으로만 봤을 때 관세음보다는 관자재가 더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이란 말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이고, 이는 인도말의 '보디사트바'의 한자어 표기이다. '사트바'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중생을 뜻하고, '보디'는 깨달음을 뜻하는 말로써, '보디 사트바' 즉, 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보살은 완전히 깨달은 자인 부처와 깨닫지 못한 중생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고 한다. 깨달았지만 부처가 되지 않고,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깨닫게 인도하는 그런 사람들의 통칭이다. 이는 바로 다같이 깨닫고자 하는 대승 불교의한 특징인 것이다.
3. 개략
반야심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이다. 이 말은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집착도 없고, 번뇌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고통과 번뇌를 이야기할 때 4고와 108번뇌라 이야기 한다. 이 때 4고는 생로병사를 말한다. 참고로 8고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4고에다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고 보통 108번뇌라고 하는 것은 육경(색,성,향,미,촉,법)과 육근(안,이,비,설,신,의)그리고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번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통과 번뇌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는 육바라밀이라는 수행법이 있는데, 이것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로 이루어져 있다.
4.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연기법
반야심경의 중요 내용 중에 하나가 연기법이다. 이것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들로만 봐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5. 모든 것은 변한다. - 제행무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또 하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변한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를 이루고 있는 육체와 정신도 변하고, 이 우주도 탄생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보면 '불생불멸'이란 말이 있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은 영원 불별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생도 없고, 멸도 없다'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이 말은 즉, 모든 것은 변화일 뿐이지, 생겨나는 것, 없어지거나 죽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로 변하는 것이다. 한 생명의 탄생 또한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변화의 산물인 것이다. 세상은 그래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줄지도 늘지도 않는 것이다.(부증불감)
연기법과 제행무상만 잘 이해해도 반야심경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이 된다.
6.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이라고 하면 색즉시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색(현상)과 본질은 하나라는 소리이다. 즉, 물질이 곧 에너지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은 바로 E=mc^2의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같다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만물은 본래 형체도 없고, 성품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만, 집착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번뇌가 있으니 이를 없애라, 고통이 있으니 이를 없애라고 하는 말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원래부터 번뇌는 없었고, 고통이 원래 없었음을 터득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인도말 '갓데 갓데 파라갓데 파라상갓데'를 한자로 옮겼다가 우리말로 발음한 것이다.
이것은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혼자 저 언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한테 함께 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이 또한 반야심경이 대승불교의 핵심임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