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칼럼(2025.7.19)
<박정희 대통령의 등장으로 조국과 국민을 빈곤에서 해방시키다>
☆울산 정유공장 건설의
빛나는 역사
1. 박정희 영도자 시대 개막
박정희 장군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혁명을 성공시켜 정권을 장악하여 한국의 18년 6개월간의 영도자로 등장했다.
1961년은 1945년 해방 후 16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은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로 1인당 GNP가 81불 밖에 안 되는 세게 최빈국중의 하나였다.
아시아의 부국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북한이 230불 수준으로서 한국보다 3배나 더 잘살았다.
더 비참한 것은 패전 후 떠나가는 일본 외무성의 공식 서류에서 한민족은 기아와 빈곤으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자주독립국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박정희 장군은 혁명성공과 동시에 6개 항으로 구성된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공약 1,2 항에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하고 UN헌장과 국제협약을 수호한다고 했다
공약 4항에서는 절망과 기아선상에 있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박정희는 국민의 빈곤에의 탈피와 기아에서 해방을 목표로 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울산 공업센터 건설이었다.
2. 울산 공업단지 건설
박정희는 정식 정부가 생기기도 전인 61년 말에 상공부와 이병철 경제인 헙회 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61년 말에 울산공업 센터 건설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1962. 2월 3일에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공식 치사에서 "4천 년 빈곤의 역사에서 해방하고 부국을 만들기 위해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한다" 하시고는
"루루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화를 재현하여 민족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기 여기 모여서 기공식을 거행한다"라고 하셨다.
이날 기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송요찬 내각수반, 김유택 경제기획원과 관련장관 그리고 외국의 시절단으로 미국대사, 서독대사, 이태리 대사와 당시 UN군 사령관 겸 미 8군 사령관인 멜로이 장군 등 수많은 내외 귀빈과 인사가 참석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하기 위하여 긴급히 설치된 울산특별국 국장( 안경모 장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은 한국의 역사상 가장 성대한 기공식으로 착공을 알리는 발파소리는 공업 한국 건설의 신호탄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이 없었더라면 울산공업센터도 없으며 한국의 경제개발이 초고속으로 추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부는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석유화학, 비료공장과 발전소 그리고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 대현면등 일대를 울산공업센터로 지정한다"라고 발표했다.
( 종합제철은 울산 내항이 좁아 포항으로 이전하였음.)
3. 5개년 계획상의 정유공장 건설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 공약인 "국민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기 위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상의 제1호 공장이 울산공업 센터의 정유공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울산 정유공장 건설을 성공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박정희의 초기 경제개발을 성공시키고 나아가서 국민을 빈곤의 역사에서 해방시킬 수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거사가 되었다.
4.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 상의 울산 정유공장 건설 요약
사업명 울산정유공장건설
주체: 국영기업
공장규모: 일산 3만 5천 배럴
소요자금: 외자 1천6백만 달러
내자 35억 환
공기: 1962 착공, 1964 시운전
업체선정: 국제경쟁입찰(상공부)
제공자료 : UOP 기본설계
참고: 국제 경쟁 입찰 시 소요자금 절감 기대
정유공장 건설이 발표되자 한국에 석유류를 ICA 무상 자금으로 공급하고 있던 KOSCO를 구성하고 있던 ESSO St'd와 Shell 그리고 CALTEX는 미국이 ICA 자금으로 공짜로 석유류를 공급하고 있는데 왜 비싼 돈을 들여 정유공장을 지으려고 하느냐고 반대하였다.
5. 국영 댸한석유공사 설립
1962년 3월 대한석유공사 설립 후 정부가 62년 7월 24일에 법룰 1111호에 의거 대한석유공사법을 제정공포 하였다
이로서 62년 7월 24일 국영기업체로 대한석유공사(Korea Oil Corp KOCO)가 탄생되었다.
혁명정부 최초의 국영기업인 대한 석유공사의 사장( 이성호)을 비롯한 임원 임명은 최고회의에서 내려왔지만 기술이사만은 상공부 추천으로 정유공장건설에 공로가 많은 전민제 씨를 임명하였다.
6. 업체선정이 경쟁입찰에서 수의계약으로 변경
돌발사건이 발생했다. 625 동란시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의 은인인 밴플리트 장군이 미국의 대한투자 사절단장의 자격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최고회의 의장실에서 상공부 장관정래혁과 박충훈 차관에게 울산정유 공장 건설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온 미국의 Fluor Corp에 수의계약으로 맡기라는 공식 지령이 내려왔다.
국제 경쟁입찰로 여유 있게 계상된 1천6백만 불이 절감될 것이라는 희망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유공과 Fluor 사는 63년 12월 공장건설의 기간을 2개월 단축한 기계적 준공을 거쳐 64년 2월에 정상가동에 들어가서 역사적인 준공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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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공사대금 1차 지불금 3백만 불을 지불하고 나니 국고가 바닥나다
정부는 공사계약에 따라 정부 보유불로 1차 지불 금액인 3백만불을 지불하고 나니 정부의 외화 금고가 바닥이 나서 외화지불 불능상태에 빠졌다.
유공은 정부의 승인아래 메이저 오일의 하나인 미국의 Gulf Oil을 합작선으로 선정하여 Gulf가 63년 10일 유공의 주식 25%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건설자금 전액인 1천5백만댤러의 외자 도입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미 합작회사가 설립되고 공시금액을 지불하게 되었다.
1964. 5. 7일 울산 정유공장의 준공식은 울산 공업 센터의 준공식을 겸해서 거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최두선 국무총리 버거 미대사등 많은 내외 귀빈들의 참석과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성전을 벌였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호 National Project인 울산 정유공장 건설이 성공을 거두어 혁명정부는 경제개발에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8. 울산 정유공장 건설의 국가적
기여
합작 화사 Gulf Oil은 울산정유 공장이 64년 일산 35.000 배럴 규모로 가동한 이래 73년 말에 Oil Shock가 생길 때까지 5배 증가한 175,000 배럴의 정유공장을 건설하여 한국의 경제개발에 협조자였다.
73년 10월의 오일 쇼크 때 Gulf는 중동의 광권이 박탈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원유공급 삭감에 대하여 증량시켜 주고 한국이 오일쇼크를 원만히 해결해 준 은인이었다.
65년 Gulf Oil이 에머리 보고서를 가져와서 대륙붕 선언을 하게 하여 7광구까지 원유시추를 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유공은 박정희의 1,2차 경제개발 계획기간에 국가 1차 에너지공급을 충실히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방침에 의거 석유화화의 중심업체인 10만 톤의 나프타 분해공장을 담당케 하여 석유화학 대국건설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유공을 만든 공적은 이 당시에 젊은 시절 국가관을 가지고 일한 기술자들이다.
이들은 생에 최초로 근무한 유공을 잊지 못해 근무한 회사가 없어졌는데도 공장 시운전 당시의 기술자들은 KOCO CluB를 만들어 현재에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고 그 후의 약 50여 명의 기술자도 유목회라는 동호회를 가지고 교분하고 있다. 자랑스럽다.
울산 정유공장이 건설된 지 60여년이 지났는데도 활발한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