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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어떻게 해야 하나>
목아박물관 작품
‘참선(參禪)’을 선(禪), 선정(禪定), 지관(止觀)이라고도 한다. 선(禪, 禪定)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의
속어 형 jhāna가 서북 인도에서 jhān이라고 발음이 된 것을 중국에서 한자로 선나(禪那)라 번역한 그것을 줄여
선(禪)이라 하게 됐다.
또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해서 정(定), 선정(禪定),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 정사유(正思惟)라 하고도 한다.
참선(參禪)이란 말은 선을 참구(參究)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본성(本性) 자리를 밝히는 데에 있다.
참선의 목적도 견성(見性)이요, 방법도 경성이며, 결과도 견성에 있다.
나아가서 명심견성(明心見性),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 보기 위한 수행,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간파하기 위해 ‘깊이 생각한다’ ‘고요히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관찰해 체득하는 것이 선의 일차적 의미이다.
이에 따라 무아적정(無我寂靜)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삼매(三昧)는 선정(禪定)과 거의 같은 뜻이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생명 진여불성(眞如佛性)과 하나 되는 것이, 이른바 참선의 목적이다.
삼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쉬어서 하나로 통일해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해 본 사람들은 짐작하겠지만,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나. 별별 생각이 다 나오지
않는가. 그 생각을 하나로 모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나. 그렇게 어려우니까 화두(話頭)란 법도 나왔다. 타고한
사람이거나 과거 전생의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은, ― 마조(馬祖), 임제(臨濟), 백장(百丈) 선사와 같은
분들은 그냥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 가능하다. 그냥 바로 내가 부처란 것을 느낀다. 그러나 범상한 사람들은,
잡다한 정보과다시대여서 좀처럼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기가 어렵다. 이른바 삼매 참선에 들기가 어렵다.
참선은 보통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아서 하는 좌선이 일반적이고,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들어감을 중시한다. 바로 삼매에 들어감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의 경우는 화두나 공안을 활용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는 좌선(坐禪)을 통해 본래의 불성을 스스로 깨닫는 수행법이다.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하면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간(看)하는 공부 방법이다.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간화선이라 한다. 즉, 간화선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불교적으로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간화에서 ‘간(看)’은 주시하다, 참구(탐구)하다는 뜻이다.
간(看)이란 대상을 그냥 스치듯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 그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깨칠 수 있어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할 때,
성품을 보는 견(見)의 구조 역시 확실하고 정확하게 본질,
― 핵심을 꿰뚫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저것 주변 상황에 한눈팔지 않고,
― 딴 생각하지 말고, 목표한 것에 정신을 집중해서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은
논리를 초월하는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의 참선법이다.
그리하여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인데, 이와 같이 화두 의정(話頭疑情)에 몰입하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고, 자세와 호흡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점에서 건강 위주의 호흡수련, 요가수련과 구별된다.
예로부터 참선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①신심(信心) ― 부처님도 깨달았듯이 나도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②의심(疑心) ― 화두는 의심이 생명이다. 의심은 지속적인 지구력을 도와주고
답을 찾게 되는 원동력이다. 의심이 없으면 답도 없다.
③용맹심(勇猛心) ― 백수의 왕인 사자와 같은 돌진력과 지구력을 말한다.
공부는 이런 용맹 정진심이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다.
그리고 불교에서 자기를 상실한 인간에게 참된 자기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참선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이 한국 불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간화선이란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화두(話頭)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수행해 나가는 참선법을 말한다.
“화두를 잡고 있으면 처음에는 사나운 소나 말처럼 마음대로 달아나고 망상 잡념이 생기고 또 해태심까지 생긴다. 그러나 퇴전하지 말고 계속하고 또 계속해 용맹정진을 다하면 반드시 화두라는 의심뭉치가 가슴에 꽉 차게 된다. 즉 늙은 쥐가 쌀 창고를 파고 또 파면 반드시 그것을 뚫고 쌀을 먹게 되는 것과 같이 참선법도 역시 이와 같다.
결심을 하고 또 계속하면 번뇌 망상의 물결 파도가 아무리 세지만 화두를 찾는 힘에는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대중들은 해태심을 내지 말고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으로 화두만
잡고 매(昧)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언하대오(言下大悟)하리라.” ― 전강(田岡, 1898~1974) 스님
선불교에서의 ‘화두(話頭)’는 진리를 깨우친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기도 하다.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선 공부의 문제지라고도 할 수 있다.
참선하는 이가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화두에는 1,700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무자(無字)’ 화두이다.
중국 당나라시대 한 학승이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께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에 대해 조주 선사 내린 답이,
“무(無)”였다.
그런데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조주 선사가 왜 "무"라고 대답한 것일까? 바로 여기서 조주 선사가 무엇 때문에 무(無)라고 말한 것인지? 그 ‘무(無)’를 화두로 해서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이 의심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밖에 못 깨닫는다. 육신이 거짓 ‘나’라면, ‘참나’는 누구인가? 분명히 말하고, 듣고, 슬프고, 괴로운 줄 아는 이것은 거짓 ‘나’인가 ‘참나’인가. 육신의 송장을 끌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나’는 무엇인가. 이런 의심이 들어야 화두(話頭)가 들린다.
의심이 든다고 해서 알음알이로 풀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선어록(禪語錄) 좀 봤다 해서 아는 체 하면 큰일 난다. 화두 깨치기는커녕 자신의 마음자락 한 조각도 잡을 수 없다.
알음알이 잣대를 화두에 대는 순간, 착각에 빠지고 만다. 착각에 빠진 도인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참선 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야 한다. 언제 깨달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도 수행인에게는 큰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여러 공안(公案)을 천착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이 뭐꼬”, 내일은 “판치생모(板齒生毛)”, 모레는 “무(無)자” 화두를 들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나의 화두에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화두를 들어보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법향(法香)을 맡을 것이다. 그 법향은 교리(敎理)를 통해 느껴본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선(禪)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하듯 정진해 보면 부처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불자라면 자비를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것도 용해시킬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비심은 깊어진다.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이 천지를 움직일 것이다.” ― 정여 스님
“마음은 어린애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낼 줄 아는 마음자리는 백 년 전 이 세상에 태어나던 첫날이나 백 년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 날까지 늘고 주는 일 없이 항상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마음자리는 아득한 옛날 그 어느 시간에 비로소 생겨나온 것도 아니고, 자동차나 기계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낡아서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찾는 공부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 공부다.” ― 청담 스님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과 대승불교의 참선(參禪) 사이에는 다소 괴리가 있다.
불교에서 수행은 “명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참선을 한다고 해서 사유와 숙고를 빼버렸다. 동작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골고루 이야기하셨다. 걸어 다니고, 서 있고, 앉아 있고, 누워 있고, 부처님이 특정한 자세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에서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참선한다. 자세도 한 가지를 오래 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다. 행주좌와 어떤 자세든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 ― 전재성
참선 공부는 무엇보다 자기가 발심(發心)을 해야, 마음을 내서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가르치신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선을 통해서 역시 동일한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믿음이 있고 직접 그런 공부를 해보고자 한다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고, 다른 건 필요 없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판단에 의지해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반드시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서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왜냐면 아직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자기 생각에 의지해 자기 판단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바른 길로 갈 수가 없다. 깨달음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그 길을 간 분의 지도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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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선(參禪) 개요
참선의 의미와 요령, 그리고 실제 수행에 앞서 마음 다짐하는데 유용한 글이어서 옮겨온 글이다.
1) 참선은 열린 마음(開心)의 지향
참선은 곧 본마음ㆍ참나를 밝히는 작업이다. 본마음ㆍ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해 일찍이 티끌 세간 속에서도 물든 일이 없으며, 완전하다고 한다. 참선은 이러한 본마음ㆍ참나에 대한 확고한 인식 내지는 신심(信心)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올바른 참선의 선결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좌선의 자세나 모습 혹은 생활 선의 취지 등이 유사한 듯 보인다 해도 불교의 참선과 여타 종교의 명상
법과는 차이가 있다.
사적(史的)인 관점에서 볼 때, 참선 대중화의 기반을 닦은 이는 육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 스님은 결코 몸의 좌선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으로 화두 드는 것도 주창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볼 것, 즉 견성(見性)을 강조했을 따름이다. 선지식의 지도로써 단박에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거나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돌이켜 확인하면 되는 까닭에 ‘단박(頓)’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장소에서 특이한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행할 수 있는 열린 참선이어야만 한다. 본 마음ㆍ참 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참선이란 일체의 형식과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선지식의 지도와
자신의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이다. 하지만 그 선지식조차도 다분히 자신의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있다. 마음이 열려있는 이에게는 자연 그대로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 아님이 없을 것이나,
마음이 닫힌 사람 앞에는 비록 불ㆍ보살과 달마 대사가 당장 나타난다 해도 크게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문은 열기 위해서 닫는 것이다. 이제 비록 참선이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수행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원칙일 뿐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몸의 좌선(坐禪)이며 마음의 화두 챙김(看話)인 것이다.
2) 참선의 기본방법 ―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
좌선의 자세에 관해서는 북송시대 종색(慈覺宗賾) 스님의 <좌선의(坐禪儀)>를 참고하면 된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점은 허리를 바르게 펴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호흡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으며, 복식호흡을 권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스스로가 오랫동안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해야 하는가.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바로 좌선은 안락(安樂)의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락이란, 말 그대로 편안하고 즐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좌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편안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우선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추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체의 바람을 놓고 쉬어야 한다. 심지어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의 헐떡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 생각의 분별(思量分別)과 ‘나’라고 하는 생각, 내지는 깨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대로만 하면 5분 앉으면 5분 부처다. 좌선이란 몸을 주저 앉혀 고요히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주저 앉혀 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앉아 있는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되고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마음ㆍ참나는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自性)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좌선을 하는 때에는,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차라리 사대(四大)로 된 물질 - 몸에 대해서는 '나'와 '내 것'에 매일지언정, 의식(意識)에 대해서 '나'와 '내 것'에 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분별(思量分別)이나 지견(知見)의 이해 및 알음알이로써 깨닫고자 해서는 백 천만 겁이 흘러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깨치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러한 알음알이는 모두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좌선에 임하는 것이 오히려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3) 참선은 바로 지금(當下)
‘5분 앉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다만 좌선할 뿐, 여타의 사념이나 동작이 일체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 '영원'을 희구한다. 하지만 그 '영원'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의 이 순간들이 '영원'인 것이 아닐까.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일 따름인 것이다. '바로 지금'을 떠나서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로서 절대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 지금'을 떠나서 마음의 평화나 육체적 안식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 편안함을 성취할 수 없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 성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후회, 설움 등 일체를 놓아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걱정 따위도 떨쳐 버린 채, 오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만 좌선에 몰두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연습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러한 마음가짐이 숙달돼야 비로소 생활선(生活禪)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좌선할 뿐, 이러한 습관이 어느 정도 익어가야만 비로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잘 따름이라는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이 와 닿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밥 먹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잠잘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대화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일할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살아갈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죽을 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좌선(坐禪)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수(實修)라고 하는 것이다. 좌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시간과 공간인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할 뿐'이라고 하는 '뿐' 연습이다. 이렇게 연습해서 마침내 몸도 잊은 듯 마음도 잊은 듯[심신탈락(身心脫落)]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점차 이러한 경지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게 돼,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백퍼센트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다(禪不屬修)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수행(修行)이라는 원인을 통해서 깨달음(覺)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상식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다. 참다운 도(道)는 상식에 기반하면서도 상식을 초월한다. 참선은 닦는데 속하지 않는(禪不屬修)다. 닦아서 터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졌으니 다시 부서질 것이다. 즉, 인과(因果)에 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마조(馬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자성(自性), 즉 본마음ㆍ참나는 본래 완전하다. 그러므로 선(善)이라고 해서 취한다거나 악(惡)이라 해서 버린다거나 공(空)을 관찰해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공연히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한 생각 망념(妄念)이 삼계 생사(三界生死)의 근본이니,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으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의 위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은 오직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애면 될 따름이다. 즉, 도는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평상심(平常心)이 도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이란 평상시의 마음을 뜻한다.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듯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계에 부딪쳐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이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처럼 안심(安心)을 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 무엇도 더 이상 멀리 찾을 것이 없으며, 완벽해지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해 나가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본마음ㆍ참나에는 이미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에 입각한 수행이란 결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며, 본마음ㆍ참나를 지켜나갈 따름이다. 이것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상태를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날 때 얼른 이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때 유용한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5) 참선은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
닦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거든, 그 생각을 얼른 화두로 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한 군데에 초점(Focus)을 맞추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쉽다. 가령 동일한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가 지속해 날지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쏟다보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TV를 볼 때, 어느 한 채널에서 공포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하자. 그때에 공포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차라리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택함으로써 관심을 바꾸는 것이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에 입각해서, 화두를 통해 무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이다. 이것은 집중형 간화(集中形 看話)와는 다르다. 집중형 간화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화두에 몰두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삼매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다. 무심형 간화는 이와 달리 애당초 무심 상태로 출발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화두를 챙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무심이란 아무런 잡념이 없다는 뜻이다. 곧 '무의식적 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좌선을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저 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한 무심상태가 흔들릴 때에 얼른 화두를 챙기는 것이 무심형 간화이다. 역순경계(逆順境界)가 나타나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는 순간 무분별심으로서의 화두를 챙김으로써 본마음ㆍ참나 즉 평상심으로 돌이킬 따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순경계는 끊임없이 외부나 혹은 내심에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지속적으로 화두를 챙겨나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평상심으로서의 무심을 우선적인 전제로 하고 있는 점에서 집중형 간화와는 입각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중형 간화는 상당한 끈기와 집중을 요하는데다가, 의도적 방법으로 인해 자칫하면 상기병을 유발시킬 수 있다. 아울러 미래지향적 태도가 생겨나기 쉽다. 그래서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짧은 시일 안에 공부를 마쳐보겠다고 욕심내어 달려들었다가 중도하차하기 쉽다.
그렇지만 무심형 간화는 철저히 현재 지향적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평상심이 도(道)임을 굳게 믿고, 현재에 몰두하면서 다만 흔들릴 때마다 화두를 챙겨 본마음을 회복하면 그 뿐이다. 이때의 화두는 마치 관운장의 청룡도와 같다. 청룡도는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과 맞닥뜨렸을 때 휘둘러야 유용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무심형 간화는 실생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실생활에의 몰두에 참다운 가치가 부여되고, 나아가 주위와의 부딪힘 자체가 유용한 수행기회가 된다. 그럼으로써 좌선은 다만 연습에 불과할 뿐이요, 생활이 실전이 됨으로써, 우주가 수련장이고 만나는 이마다 선지식이 돼,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닦을 수 있는 열린 참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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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산(九山) 스님의 <화두 참구법(話頭參究法)>
◇ 초심자(初心者)에게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욱"하는 마음인 육단심이 동하면 상기병(上氣病)이 나기 쉬우니 상기가 되지 않도록 기식(氣息)을 잘 조절해야 한다.
입지여산立志如山) 하고 안심사해(安心似海)라
그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도 마음은 바다와 같이 안정(安靜)해야 한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천 가지 만 가지의 의심을 오직 "이 뭣고"라는 화두(話頭)에 집중시켜 되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부가 점차 깊어지면 정식(情識)이 자연히 희박해진다. 정감(情感)은 망상이요 화두는 진성(眞性)이기 때문에 화두가 순일(純一)해지면 망상이 자연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여롱여치(如聾如痴)라, 귀머거리와 같고 바보 같아서 봐도 보는 것이 아니요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계가 오면 기뻐하지도 말고 자나 깨나 앉으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오직 화두(話頭)만을 일념(一念)으로 참구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란 광석(鑛石)을 제련(製鍊)하여 순금을 잡아내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간의 두통이 생겨도 참고 육체적으로 피로나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화두를 잡을 때에는 흐르는 물에 배를 거슬러 밀고 올라가듯 전력을 다해야 한다.
망상만 심하게 끓어오를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행(布行)을 하라. 그러면 망상이 저절로 가라앉고 화두가 다시 성성(惺惺)해진다. 이때에 화두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느 때는 얼음 위에서 배를 밀듯 술술 나가고,
어느 때는 우물 안에 소를 몰아넣는 것처럼 화두를 잡으면 다시 빠져 나가고 또 잡아도 자꾸만 빠져 나간다.
이렇듯 어려울 때도 그저 끊임없이 화두를 잡고 나가면서 죽을 판 살판 애써 정진하게 되면 화두는 점점
익어진다. 익은 망상은 설어지고 설었던 공부는 익어져서 화두가 서서히 수중(手中)에 들어오게 된다.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선근(善根)이 익어지고
어느덧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오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옛 부처나 조사(祖師)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토록 갖은 노력을 다 했던 것이다.
석가세존은 싯달태자(悉達太子)라는 왕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야수다라와 같은 아내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히말라야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갖은 고행(苦行)을 하면서 하루에 보리알 하나로 연명(延命)하기도 했다.
드디어 보리수나무 밑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았다. 그리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6년간 고행하였다.
이것은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고 정진(精進)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그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신 것이다. 이분을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은 인간뿐만 아니라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요 삼계(三界)의 스승이신
대도사(大導師)가 되신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아 완전(完全)한
인격을 성취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십종병(十種病)
대개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신이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누가 이상한 말을 하면
그것이 진리인 양 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예(例)가 허다하다.
옛사람은 공부(工夫)하는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는 것을 가을철 풋밤을 까는 것에 비유하였다.
밤이 익으면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진다. 그때는 밤을 까려고 하지 않아도 밤알은 자연히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익지 않은 밤을 억지로 까게 되면 밤알이 으깨어진다.
공부도 이와 같아서 깨치지 못할까 염려하지 말고 제반사(諸般事)를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애를 쓰다 보면 알밤이 터지듯 자연히 툭 터지게 된다. 그러나 간혹 요행수를 바라기도 하고 선지식(善知識)이라는 사람이 말을 실수하여 공부를 그릇되게 하기도 한다.
또 날개 안 돋은 새끼 새가 날아가려고 퍼덕거리다가 떨어져 죽듯 공부가 딱지도 떨어지기 전에 조실[祖室]이나 선지식 행세를 하려다가 망신당한 사람이 허다하다. 이런 선병禪病을 방지하고 자기가 자신의 꾀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십종병(十種病)을 열거하여 후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열 가지 병(病)은 보조국사께서도 분명히 가려 놓았으니
구도인(求道人)은 신중히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유(有)와 무(無)의 견해(見解)를 내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조사공안(祖師公案)인 화두를 깨치고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조주 무자화두(趙州 無字話頭)를 식심(識心)으로 "무(無)"는 "유(有)"에서 "유(有)"는 “무(無)"에서 나왔다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진리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따지고 분별하여 이 "무"자 화두를 알았다고 떠들어 대며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술책을 쓰는 것이 병이다.
둘째, 진무(眞無)의 무(無)로 헤아리지 말라.
인간만이 불성(佛性)이 있고 개는 불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불성은 우주에 충만하거늘 꿈틀거리는 미물뿐만 아니라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에 이르기까지 불성이 없는 곳이 없다. 어디에는 불성이 있고 또 어디에는 불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
셋째, 이치로 따져서 알려 하지 말라.
불법(佛法)은 깨치는 것을 근본 종(宗)을 삼는다.
이치 “理"자로 불교를 아는 체하는 것은 불교를 비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道)는 깨치는 것이요, 상식적으로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식적으로 따지고 이치로 헤아려 알려 하는 것이 병(病)이다.
넷째, 오직 식정(識情)으로써 이러하고 저러하다 하지 말라.
식심(識心)으로 따지거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과 논장(論藏)과 조사어록(祖師語錄) 등에서 문자(文字)에 집착하여 배운 지식으로 사량(思量)하지 말라. 깨칠 것이 따로 없다며 불법을 사랑 분별로써만 이해하려는 것을 선문(禪門)에서는 지해병(知解病)이라 한다.
다섯째, 눈을 꿈적거릴 줄 아는 바로 이것이라 하지 말라.
불법(佛法)은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고 자기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안을 결택한 장부가 깨칠 것은 생각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고 또는 꿈적거리는 이것인 줄 알면
자성(自性)을 어둡게 하는 별몽병이다.
여섯째, 말재주만 부려서 아는 체하지 말라.
선(禪)은 깨달음으로 근본을 삼는데 조금 알았다고 쓸데없이 맹갈(盲喝-깨닫지 못한 사람의 할/喝)이나 하고 구두선(口頭禪)으로 일삼지 말라. 본분납자(本分衲子)가 열심히 정진하다가 공부가 어느 정도 익어가 식심이 동하면 불조(佛祖)의 공안(公案)을 아는 체하거나 약간의 혜안(慧眼)이 열리면 남을 능가하여 말을 잘하는 것으로 자기의 장기를 삼는 것이 허다한데 이것은 선문(禪門)의 구두선병(口頭禪病)이라 한다.
일곱째, 공공적적(空空寂寂)한 데서 공(空)을 지키지 말라.
처음 공안(公案0을 참구할 때에는 망상9妄想)이 아니면 혼침이요 혼침(昏沈)이 아니면 망상이다. 망상,
혼침(昏沈), 화두(話頭), 이 세 가지가 뒤범벅되어 싸움을 할 때가 가장 어려운 고비이다. 이때를 당해서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공부가 안 될수록 화두를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생각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근고(勤苦)하여 정진하면 홀연히
화두도 망상도 혼침도 없이 적적하게 몇 시간을 넘기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무기공(無記空)이다.
이 역시 일종의 무기공병(無記空病)이니 경계해야 한다.
여덟째, 공안을 생각할 줄 알고 봉(棒)을 들 줄 아는 이놈이라 하지 말라.
공안이 순숙(純熟)해져서 자기 마음이 해태굴(懈怠窟)에 빠지면 올바른 경지에 나아가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취모리(吹毛利)를 일으켜서 온갖 역경을 돌파하고 활연히 깨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생각 방황하여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도무지 진취가 없게 된다. 이때에 생각하기를 도(道)라는 게 별것 아니며 환경 따라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은
인적위자(認賊爲子)라, 도둑놈을 아들 삼는 것과 같은 병(病)이다.
아홉째, 문자(文字)로 인증하거나 인용하지 말라.
대도(大道)는 유식(有識)과 무식(無識)을 초월한다.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간혹 문자에 집착하여 박학다문(博學多聞)하고 의리(義理)로 따지고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이 부처라고 인정하지만 이 같은 사고방식은 바로 부처님과 그 경전(經典)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다.
종문(宗門) 중에서는 ‘천계만사량(千計萬思量)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모든 사량분별이 불 속의 한 점 눈과 같아서 설사 깨쳤다 하더라도 그 깨친 곳에 심천(深淺)이 있는 것이다. 깨친 후에도 깨달았다는 생각인 각견(覺見)과 내가 부처라는 생각인 불견(佛見)과 중생이라는 생각인 중생견(衆生見) 등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만 한다.
그런데 하물며 사량계교와 의리로써 깨달음을 이해하려는 치견(痴見)은 입해산사(入海算沙)니 소지장(所知障)이요 문자병(文字病인) 것이다.
열째,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지 말라.
수행(修行)을 스스로 가장하지 말라.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지 말라 함은 공부한다는 납자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잡고서 죽을판 살판 노력하여도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익힌 습기 때문에 업력(業力)은
강하고 혜력(慧力)은 약하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렵거늘 애써 정진하는 마음은 희박하고 일상수용
(日常受用)에만 팔리고 혹은 안일주의에 빠져서야 어찌 공부하는 자세라 하겠는가?
설사 결제(結制)중에 약간의 정진을 했다손 치더라도 해제(解制) 석 달 동안에 동분서주하는 십자가두(十字街頭)의 생활을 하니 자연 결제중에 익힌 정력(定力)이 약화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다음 결제 때는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 셈이 되고 만다. 오늘도 이만 내일도 그만, 금년도 이대로 명년도 그대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도 누구나 죽음의 문에 이르는 것이다. 미심(迷心)으로 오도(悟道)를 기다렸는데 사문(死門)에 먼저 이르니 그때야 후회한들 무엇하랴. 이것이 미정(迷情)을 가지고 깨쳐질 때를 기다리는 살림살이인 병(病)이다.
생사고生死苦 벗어남에 알음알이로 미치랴
금싸라기 눈에 들매 허공꽃이 쏟아지네.
만 길 벼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걸림 없는 법 연설하고 남의 눈을 저울질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