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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주 목사
거룩한 보편 교회의 일체성과 통일성
우리가 교회사를 살펴 보면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 교파들은 각자 자신들의 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후 1세기부터 오랜 기간 거룩한 보편 교회의 역사는 여러 교파를 형성하여 왔다.
가장 넓게 보는 방식은 이러하다.
예루살렘 교회를 근거로 하여서 시작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역사는 주로 지금의 동방 교회가 속한 교회들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 그리고 지금 그리스 지방의 교회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전체를 포함해서 동방 정교회라 부른다.
그러므로 지금의 동방 정교회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세워진 거의 모든 교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서방 교회가 세워지는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개척하기도 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로마 교회이다.
로마 교회는 서방 라틴 계열의 교회들의 중심지로 그 의미가 크다.
물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북아프리카에도 거룩한 보편 교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성 어거스틴이 목회하였던 힙포가 있다.
그렇게 거룩한 보편 교회는 로마 제국 전역에 세워졌고 주후 313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 할 정도로 기독교의 세력은 커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지역적 정치적 상황 가운데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열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서로마 제국에 있었던 라틴 계열의 교회와 동로마 제국에 있었던 동방 정교회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동방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과 함께 국가 교회 형태로 세워졌고 서로마 제국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모두 초토화되었다.
다만 서로마 제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로마시에 세워진 로마 교회 만이 살아 남았다.
이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시에 기독교 정통 교회로 개종한 프랑크 족속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 로마 교회를 보호하는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되고 로마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 승격되면서 오직 로마 교회 만이 카톨릭 교회라는 분파성을 가지게되었다.
이렇게 중세로 들어가는 길목에 형성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를 양분하였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세력의 대부분은 동방 정교회에 속하고 오직 로마 교회만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역설적으로 급부상하여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거룩한 보편 교회라는 범주 아래에서 교리적 일치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사도 신경과 니케아 신경과 칼게돈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대한 수납이다.
두 교회 모두 거룩한 보편 교회가 공의회를 통하여서 선포한 공적 선포에 대하여서 받아들였고 모든 거룩한 보편 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자세하게 살펴보면 동방 정교회와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로 다른 점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보편 교회는 일치된 신조와 신앙 고백이 없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있게되고 이러한 종교 개혁은 서방 교회 만 흔들었던 것은 아니다. 헝가리 신앙 고백서가 세워질 정도로 동방 정교회도 종교 개혁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다만 동방 정교회 안에서는 하나의 개신교적인 형태로 세워지지 못하고 종교 개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16~17세기 종교 개혁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리고 18세기가 도래하면 거룩한 보편 교회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여져서 개신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것이 개혁 교회와 루터 교회와 여러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다.
정통 개혁 교회는 스위스 땅에서 시작되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울드리히 쯔빙글리와 마틴 부쪄와 하인리히 불링거 그리고 존 칼빈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노선을 따라서 스위스내에서 다양하게 꽃을 피운다.
그렇게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따라서 스위스 안에 쮜리히의 개혁 교회와 제네바의 개혁교회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스위스 내에서 다양한 개혁 교회들은 신학적으로 일체성과 통일성이 있었다.
물론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보면 약간의 다른 점이 있었으나 교리적 일체성을 훼손시킬 만큼의 차이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후에 스위스 땅을 벗어나서 개혁 신학이 보편화 되는데 기여한 교회가 제네바 개혁 교회이다.
제네바 개혁 교회는 존 칼빈과 그의 계승자 데오도레 베자가 사역한 곳이다.
제네바 개혁 교회는 시편송을 제작하여 예배에 있어서도 좀더 개신교적인 예배 형태를 갖추었다.
놀랍게도 스위스 땅에 세워진 개혁 교회들은 제네바 개혁 교회를 통하여서 일체성과 통일성을 가진 거룩한 보편 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 땅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핍박을 피해서 망명한 많은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이 제네바에서 피난처를 삼고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개혁 신학을 배우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프랑스 개혁 교회를 세웠다.
이는 순교를 각오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노고로 프랑스 땅에는 위그로라는 의미의 프랑스 개혁 교회가 세워졌다.
프랑스 개혁 교회가 세워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인물이 데오도레 베자이다.
여러번 프랑스 개혁 교회 총회에 참여하여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좀더 일찍 고인이 되어 버린 존 칼빈과 달리 데오도레 베자는 8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으면서 제네바 개혁 교회의 정통 신학을 프랑스 개혁 교회에 전승하였다.
프랑스 개혁 교회는 후대에 세워질 모든 개혁 교회의 모범이며 규범이다.
비록 프랑스 개혁 교회가 낭트 칙령의 폐지로 인하여서 그 지경이 축소되었으나 프랑스 개혁 교회는 그 이후에 세워지는 화란의 개혁 교회와 대영제국 장로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개혁 장로 교회는 프랑스 개혁 교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개혁 교회가 장로 교회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개혁 교회는 장로 교회적인 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후대 거룩한 보편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야 할 것을 모범과 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넓게되면 화란의 개혁 교회와 대영제국 장로 교회는 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프랑스 개혁 교회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화란의 개혁 교회는 도르트 총회의 결정을 따라서 일치 신조를 세워서 거룩한 보편 교회로서의 자태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대영제국 장로 교회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회합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통하여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산출하였다.
다만 잉글랜드 땅에서는 개혁 교회가 정착이 되지 못하였고 잉글랜드 왕의 탐욕과 여러 정치적인 상황으로 영국 성공회가 세워졌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개신교 내에 거짓 교회로서 그 첫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잉글랜드 성공회는 도르트 총회에서 정죄된 알미니우스 교리를 따라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알미니우스 신학을 따라서 교회를 세웠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개혁주의 교회사에 첫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이다.
그리고 잉글랜드 성공회로부터 현대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 발생한다.
지금의 감리교와 성결교와 침례교파는 모두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로서 잉글랜드 성공회에게 신학적 신세를 지고 있다.
잉글랜드 교회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개신교 몰락의 역사는 그 이후에 미합중국 대륙에서 더욱 활성화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대영제국 황제와의 끝없는 종교적 분쟁의 결과로서 장로 교회 체제를 고수할 수 있었다.
대영제국의 왕정 복고는 대영 제국의 기독교가 초토화되고 왕이 원하는 황제의 교회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후에 집권한 올리버 크롬웰은 철저한 독립교회주의자로서 잉글랜드 분파주의 교회의 활성화에 일조한 인물이다.
그의 사후에 대영제국은 다시 왕정으로 회귀한다.
대영제국의 황제를 처형한 잉글랜드 독립파 급진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종교 혁명은 잉글랜드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왕정 복고 이후에 잉글랜드 기독교를 국교회로 굳히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정 복고 이후에 명예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까지 잉글랜드 국왕의 끝없는 탄압과 핍박과 압제를 견디어 내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후대에 모든 장로 교회의 규범으로 남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얼스터 장로 교회는 미합중국 장로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장로교회로서 그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이렇게 스위스 땅에서 시작된 개혁 교회는 프랑스에서 위그로 남고 화란의 개혁 교회로 남고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로 남았다.
그렇게 개혁 교회의 역사는 스위스와 프랑스와 대영제국 그리고 화란의 개혁 교회사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시대별로 그 활성화의 시기와 비활성화의 시기가 나누어지기에 시대적으로 동시에 그 의미를 살펴 볼 수는 없다.
다만 어떻게 개혁 신학이 후대에 전승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데 중요한 역사를 제공한다.
그리고 루터 교회이다.
루터 교회는 독일에서 발생한 종교 개혁의 결과로서 세워진 교회로서 독일 제후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무엇보다 정통 신학으로부터 어느 만큼 비켜나 있었던 루터 교회는 이신칭의 교리 외에 교리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였다.
루터 교회가 주장하는 루터주의는 정통 기독교 신학으로서부터 매우 벗어나 있다.
그럴뿐만 아니라 17세기에 사변적 정통주의로 나아가면서 일반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전혀 다른 종교로 변질된다.
그것이 17세기 할례 대학에서 있었던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의 할례 대학의 경건주의는 개신교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경건한 감정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은 후대에 개신교 신비주의 운동의 교두교를 형성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17세기 경건주의 운동은 16세기의 메마른 사변주의적 종교 형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루터 교회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에 잉글랜드에서 감리교 운동으로 불을 붙였다.
감리교는 웨슬 리가 세운 신성 클럽으로부터 발생하였다.
그들은 모든 기독교 정통 교리를 백안시하고 살피지도 않고 그냥 알퍅한 거짓 교리로 인간의 감정에 불을 질러서 기독교 정통 교리로부터 점차로 탈선하였다.
감리교는 성공회의 아류이다.
감리교의 감독 정치는 성공회로부터 가져온 것이고 구원론에 있어서 신인협동설도 성공회의 구원론과 동일하다.
그리고 감리교의 이러한 신인협동설은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감리교의 교리란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의 교리이다.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의 교리적 일치는 감리교 교리와 궤를 같이 한다.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은 지금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감리교 정신을 따라서 세워졌다.
성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 교회들도 모두 감리교 교리를 따라서 세워진 교회들이다.
모두 구원론에 있어서 신인협동설이다.
감리교의 등장은 정통 신학의 몰락의 역사에 신호탄이다.
감리교로 인하여서 모든 정통 신학은 신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버렸으며 기독교가 일종의 광신적인 종교 형태가 되었다.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살피기 보다는 종교적 열광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루터 교회의 역사로 돌아가서 살펴 보기로 하자.
루터 교회는 기독교 신학을 담당하는 교회가 되었다.
모든 현대 기독교 신학은 루터 교회로부터 나왔다.
그 영향력은 대단하여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이다.
루터 교회가 이렇게된 이유가 있다.
루터 교회는 그 시작부터 세속주의를 표방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 교회는 이미 세속화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아류로 남게 되었다.
개신교 내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너무나 닮은 교회가 루터 교회이다.
그러면 어떻게 루터 교회는 개신교 신학을 담당하는 기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루터 교회의 국가주의 교회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루터 교회에서 성직자가 되는 것은 독일 국가 기관의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루터 교회 성직자들에게는 다른 교회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신실성이라든가 혹은 내적 부르심의 증거들이 요구되지 않는다.
오로지 독일 국가 교회로서 루터 교회에 합당한 성직자란 매우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고위 공무원이다.
독일의 루터 교회의 성직자란 전문직 고위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지적 수준을 요구받는다.
독일의 루터 교회의 성직자가 되려고 하면 모두 신학 분야에 박사 수준의 신학적 재능을 요구받는다.
그러므로 철저한 지식 교육을 통하여서 성직자를 세우기에 독일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은 탁월하다.
독일의 루터 교회의 목사는 그 사회의 검사, 판사, 의사, 대학 교수들 보다도 더 높은 지적 수주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독일의 루터 교회의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이 대체로 높을 수 밖에 없고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대단할 수 밖에 없다.
그 사회의 천재들을 모아서 신학 훈련을 시키고 루터 교회의 목사로 세우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국가 교회 형태인 루터 교회는 세속주의 교회이다.
그래서 세상의 학문적 업적에 따라서 조금씩 신학의 기존을 바꾸는 혁신적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 마허의 신학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을 그대로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제자 알브레히트 리츨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후대에 현대 신학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불트만이나 칼 바르트도 모두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정통 신학으로 많이 돌아온 칼 바르트 조차도 신정통주의라고하여서 애매한 신학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서 알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류에 불과하다.
이러한 루터 교회의 행보에 반대로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은 반지성주의로 치달았다.
루터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태동시켰고 모든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은 종교 정서주의 교회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혼란 스러운 유럽 개신교의 역사는 미합중국 기독교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것이 제 1 차 대각성 운동을 필두로 점차로 몰락해 가는 미합중국 기독교의 본질이다.
제 1 차 대각성 운동은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연합하였다.
그 주축이 되는 성직자들은 대체로 건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인간의 감정에 불을 질러 버리는 이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종교 활성화 운동은 그 시대에 꽤나 성과를 얻었으나 그 결말은 참담하다.
정통 신학의 몰락과 외면과 훼파로 치달았다.
그래서 그 감정의 불이 꺼질 때 즈음에 제 2 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시작된 미합중국 기독교의 제 2 차 대각성 운동이 그것이다.
이 제 2 차 대각성 운동으로 더 이상 성직자의 지적 훈련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도 된다.
오로지 얄팍하고 허약한 진리의 이해를 가지고 인간의 감정에 좀더 과격하게 불을 지르면 교회가 부흥한다.
제 2 차 대각성 운동은 매우 불건전한 종교 활성화 운동이었다.
제 2 차 대각성 운동 이후에 더 이상 기독교는 진리가 불필요하고 종교적인 감정만 부추키면 되는 괴이한 기독교가 되었다.
이미 제 2 차 대각성 운동의 이후에 기독교의 진리는 전반적으로 몰락하였고 그러므로 신학은 몇몇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졌으며 그 전문가들이 어떠한 주장을 하여도 신자들은 관심 밖이다.
그래서 더욱 현대 신학은 감시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어짐으로서 제멋대로 더욱 본 궤도로부터 이탈하였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선두 주자이지만 그 외에도 그 영향력 아래에서 다양한 분파주의 신학들이 우후죽순 일어났으나 일반 신자들은 관심 밖이다.
일반 신자들은 신학 자체에 대하여서 관심이 없다.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회중들이 서로 모여서 즐거워하는 종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떠한 교회 형태를 표방하던 상관없이 대부분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은 회중교회가 되었다.
회중들 다수의 주장을 따라서 교회가 세워지는 형태의 회중 교회이다.
이러한 회중 교회는 미합중국 기독교 내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다.
루터 교회와 감리교회의 두 주축으로부터 비롯된 개신교 몰락의 역사는 그렇게 현대 신학계는 루터 교회의 신학이 주도하고 현대 종교계는 감리교회와 그 아류의 교회들이 주도하는 형태로 거대한 교세를 형성하였다.
어디에도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미합중국 기독교의 현재 상태이다.
미합중국 기독교이 혼동은 그대로 구한말 조선의 기독교에 이식되었다.
실로 어지러운 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시작한 조선의 기독교의 역사이다.
거룩한 보편 교회가 유일하게 다시 회복되는 방도는 신학은 정통 신학으로 신앙은 그 정통 신학에 기반한 참된 예배의 회복과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사려된다.
우리 하나님의 인내로 기다리심이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룩한 보편 교회가 회복되는 유일한 은혜의 방도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보편 교회의 일체성과 통일성이란 거룩한 보편 교회가 선포한 공적 선포로서 신조와 신앙 고백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거룩한 보편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서 세워질 수 있는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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