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참으로 씁쓸하다
윤정혁
요즘은 남녀가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결혼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아예 안 하거나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이리저리 이유야 많겠지만, 안타깝다. 세상이 달라져서, 또 그들의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해서일 것이다.
결혼식 풍속도 여러모로 많이 변했다. 엄숙하고 경건하던 모습이 점차 즐겁고 유쾌하게 변모해 가는 듯하다. 경박하다며 언짢아하는 이도 있지만, 결혼하는 당자들의 선택이라면 탓할 바가 아니다. 갖가지 축하 퍼포먼스가 결혼식장에서 펼쳐진다. 그렇기로 결혼식장을 놀이마당쯤으로 여기는 젊은이는 없을 터이고 그런 행위가 결혼의 엄중한 의미까지 퇴색시켜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속을 거스르거나 거역하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결혼식을 주재하여 진행하는 사람을 주례자라 한다. 흔히 주례라 부른다. 자격 요건으로 상당한 지적, 사회적 권위를 요구한다. 대개 신랑 신부의 스승이거나 양가와 인연이 닿아있는 저명인사가 맡는다. 마땅한 주례자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식장 측 전문 주례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의 지나치게 상투적인 혼례 진행이 그리 탐탁하지는 않다. 요즘은 주례자 없이 신랑 신부가 주체적으로 식을 치르는 경우도 많다.
주례는 성혼을 선언한 후 하객에게 신랑 신부를 소개하고 그들의 삶에 지침이 될만한 말을 해 주는데 이른바 주례사다. 주로 살다가 만날 수도 있는 역경을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지혜롭게 극복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가끔 사회적 역할요구가 추가되기도 한다. 육칠십 년대에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아들딸 낳아 잘 살라는 식의 고색창연한 주례사가 주류였다. 대체로 칭찬 일변도인지라 ‘주례사식’이라는 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주례는 그 결혼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이가 맡는 게 좋고 그의 말이 신랑 신부와 하객 모두에게 가 닿아야 한다.
그동안 많은 결혼식을 다녔지만, 인상에 남는 예식은 별로 없다. 몇 년 전에 내가 잘 아는 화가의 딸 결혼식에 간 적이 있다. 신랑이 일본인인 국제결혼이었다. 일본어를 잘하는 신부 아버지의 친구가 분주하게 통역을 하며 사회자 겸 주례자로 예식을 진행했다. 신랑 신부가 마주 보며 혼인 서약을 마치자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을 하객에게 소개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제 자식 다카하시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마쳤습니다. 지금은 전공한 산업디자인 관련 직장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영을 즐겼으며 책을 가까이했습니다. 멘델스존을 좋아합니다.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아이로 성장했다고 여깁니다. 제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한 것처럼 아들도 그의 신부를 사랑하리라 믿고 역할을 다하는 사회인으로 살아갈 것 또한 믿습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그는 옆에 선 그의 아내를 하객에게 소개했다. 그 외, 아들이 재학시절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거나 작고한 할머니에게 지극했다는 얘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듣고 있는 내내 그의 부정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진솔한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어조나 표정, 품격있는 태도가 한몫해서일 것이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쉰다섯에 정년퇴직했다.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않은 자식이 있어 일을 놓을 수 없었다. 다행히 어느 중소기업에서 다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세 해가 지났을 즈음의 어느 날 퇴근 무렵, 작업 현장의 한 젊은이가 찾아 왔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그가 내게 한 말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맘으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의 소중한 결혼식을 나같이 하찮은 인품의 사람이 망쳐서는 안 된다며 주례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설명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오죽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내게 부탁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를 보내고는 역시 거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행히 훌륭한 주례를 구해 결혼식을 치렀다.
그 이듬해 봄, 나는 난생처음 결혼식 주례를 섰다. 그사이 내가 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도 좋을 만큼 인격을 고양했는가? 아니다. 지난날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고교 후배가 집으로 찾아와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여동생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십사 부탁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으나 막무가내로 물러서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두 손 들고 말았다. 한마디 했다. ‘죽을 쒀도 나는 모른다.’
결혼식 전날까지 주례사를 고쳤다. 주제넘은 일 같아 개운찮았다. 그 옛날 내 결혼식 주례 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기억조차 못 한다. 주례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15포인트로 출력한 주례사는 A4용지 넉 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마누라 눈치를 보며 서재의 거울 앞에서 소리 내어 연습했다. 누가 봤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전에 직장 생활할 때 많은 사람 앞에서 행사를 진행해 본 적은 수차례 있지만, 딴판이었다.
결국, 연습했던 것과 달리 내 생애 첫 주례보기는 원고를 꺼내 읽는 것으로 끝났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려져서 하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 이놈의 짓을 다시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창피했다. 신랑 신부와 그들 가족에게 미안했다.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어서 그해 가을 나는 또 한 번의 주례를 섰다. 후배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굴욕적이었던 지난날의 기억을 소환하며 손사래 쳤지만, 막무가내 앞에 ‘내 이놈의 짓을 다시 하나 봐라’했던 다짐도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말했다. ‘죽을 쒀도 나는 모른다.‘
지난번에 써먹은 주례사를 찾아 몇 군데 손을 봤다. 서로의 인격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라는데 역점을 두었다. 결혼식 당일, 그래도 불안해서 간략한 메모를 단상에 두고 흘깃흘깃 곁눈질했다. 식이 끝난 후 양가 혼주가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다. 후배는 결혼한 아들이 승진했을 때도, 손자 손녀를 얻었을 때도 내게 보고했다.
몇 년 전인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내가 속한 글 쓰는 사람들 단체에서 여행을 떠나 목적지를 향해 가는 버스 안이었다. 한 사람씩 자기를 소개하는 순서였다. 그녀는 자기를 소개한 후 언젠가 자신이 결혼하게 된다면 주례를 꼭 내게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예상 밖의 말에 내심 놀랐다.
그녀의 말은 내가 그녀 결혼식 주례를 맡을 자격 여부와 상관없이 한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남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책을 읽다가,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결혼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의 말이 떠올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해쯤 전에 나는 우연히 그녀가 결혼해서 잘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쓴 주례사의 초고를 삭제했다. 일상에서, 제법 큰일도 금방 잊을 때가 있고, 하찮은 일인데도 그것이 의식의 한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애를 끓일 때가 있다. 인간사가 어떤 경우에는 그 일이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무관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으로 씁쓸하다.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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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에세이문학》 등단.
수필문예회, 에세이문학작가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남향집》
대구수필문예대학 1기 수료.
yoonj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