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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으시더라
말씀/누가복음 4:1-13
요절/누가복음 4:2 찬송가/ 350장(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봄이 찾아왔습니다. 머지않아 화려한 봄꽃 잔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봄꽃이 화려한 것은 무엇보다 겨울의 시련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시련과 같은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를 이기심으로 본격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워나가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이 시험들을 이기셨을까요?
첫 번째 시험(1-4)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시고,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일종의 라이선스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주의 일을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1-2a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종종 등장합니다. 노아 때에 40일 동안 홍수가 계속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40일 동안 정탐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였던 기간도 40일입니다. 결국 40일이라는 숫자는 심판의 의미도 담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과의 만남, 교제를 상징합니다. 성령충만만 해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계시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교제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다. 또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습니다. 이 정도면 마귀가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영적으로 무너져야만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해도, 내 안에 말씀이 있고, 은혜가 충만할지라도 마귀가 시험합니다. 그야말로 마귀시험은 anycall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시험을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으시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3장에서 아담을 지나 하나님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았습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심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이 좋은 환경에서 마귀의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실패를 회복할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려면 먼저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라이선스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운전면회 따도 장롱면회로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먼저 연수를 받아 준비해야 제대로 운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말씀을 좀 안다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세례도 받고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적당히 살 때는 별로 마귀가 건들지 않습니다. 왜 안 건드리겠습니까? 이미 마귀의 뜻대로 살고 있기에, 굳이 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뭔가 신앙적인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 할수록 마귀는 오히려 더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 시험을 이겨야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시험이 될까요? 2b절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라 40일을 금식하신 것입니다. 금식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루 이틀도 힘듭니다. 많이 해야 3,4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3일 굶어서 남의 집 담장을 안 넘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금식은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0일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40일을 금식하시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합니다. 3절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가 이렇게 말 안 해도, 사십일이나 굶은 상태라면 이미 돌들이 떡덩이로 보이는 상황입니다. 우리 같으면 둥근 돌은 찐빵, 좀 작은 돌은 만두, 긴 돌은 김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이런 말을 합니다. 입맛이 다셔지고 침이 고이게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귀가 그렇게 말해도 내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면 시험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얼마든지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능력이 있으니 괜히 굶어죽거나 생고생하지 말고 그 능력으로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그 능력을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우선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이고 그것이 먼저입니다. 식욕은 인간의 모든 욕망 중에서 가장 먼저입니다. 생존을 위한 가장 절실하고 우선되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에 예수님조차도 굴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모든 사역의 우선은 먼저 이 욕망을 채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을 굶어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구원도 우선 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됩니다. 아담이 받았던 첫 번째 유혹인 ‘먹음직도 하고’의 문제에서 예수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먹어야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더 잘 오래 나를 먹여줄 직장을 찾고, 또 여기에 맞추어 일생 살아갑니다. 때론 신앙조차도 뒤로 밀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좋고 부르심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앞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늙고 결국은 삶이 끝납니다.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나는’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그러겠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이슬만 먹고 사실 수 있지만 우리는 사람이라 떡으로 살아야 돼!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떡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하셨던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40년을 만나를 통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들을 먹이고 살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통해 사람이 사는 것이 만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더구나 잘 먹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기분 좋게 합니까? 그래서 다들 ‘잘잘잘’의 삶의 목표입니다. 인천 어느 교회 표어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믿자는 것입니다. 참 좋죠. 그런데 문제가 뭔가요? 잘 먹어야 하고 잘 살아야 하다 보니 바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더구나 요즘 청년들은 취업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의 ‘잘잘잘’을 위해서 현재는 ‘절절절’매며 살아갑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절절매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다보니 신앙도 밀리고 삶도 뒤엉켜 버립니다. 심지어 한번 두 번 이런 삶의 욕망에 패배하다보면 욕망이 이끄는 삶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즉 잘 먹고 잘 사는 데까지 가려고 무진장 애쓰다보니, 잘 믿는데까지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완전히 패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때마다 절절매는 삶으로 이끄는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 제대로 삽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을 우선하도록 하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욕망이 아니라, 말씀이 이끄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 번째 시험(5-7) 5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트럼프가 미국대통령이 되자 그 권세로 모든 것을 뒤바꾸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뒤엎어지고 있습니다. 그 나비 효과로 태국에 있던 미얀마 난민들은 식량지원도 끊기고 난민병원도 문 닫아서 치료도 못 받고 있습니다. 정부 효율 극대화라는 미명아래 많은 지원 프로그램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미대통령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지금 마귀가 제안하는 것은 훨씬 더한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입니다. 그것을 얻으면 얼마나 폼 나겠습니까? 대단하겠지요? 사람은 뭔가 얻어서 폼 나게 자신을 드러내고 힘을 과시하고푼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험은 인정과 자존감에 대한 정신적 시험입니다.
그것도 힘든 조건을 요구하면 다 그림의 떡입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7절. “그러므로 내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에게 절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이번 한번만 눈 감으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다 아닐지라도 만약에 누군가 내게 이번 한번만 적당히 넘어가주면 1억을 주겠다고 하면, 그래서 폼 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홍콩 3박4일 공짜로 여행시켜드리겠습니다. 일본 유럽 공짜로 여행시켜드리겠습니다. 한국 들어오실 때 가방 하나만 들고 들어와 주세요. 그래서 청년들이 많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약운반책이 되는 것입니다. 금괴밀수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작은 것에도 넘어갑니다. 이런 유혹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에 숨은 떡밥이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누군가가 마귀에게 넘겨주어서 지금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는 말입니다.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맡겨 주셨던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위가 마귀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지금 세상의 주인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법적으로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사람들은 욕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는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이야?” 하나님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합니다. 악이 득세하고, 악을 행한 자가 오히려 큰 소리칩니다. 세상의 온갖 거짓과 음모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이 넘겨준 이 악한 세상을 되찾고자 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죄 값을 치르고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한 번만 절하면 마귀가 받은 것 다시 돌려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고생할 것이 없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세상의 영광과 권위를 다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유혹입니다. 이제 고난의 길을 가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을 되찾는 값을 치러야 하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달콤함 유혹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달콤한 유혹들이 다가옵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자기의 자리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욕망입니다. ‘자리 자랑’으로 표현되는 인정과 영광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인정과 영광을 얻으려면 고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이번 한번 이것 눈감아 주면 학점 줄게, 데이터 살짝 바꾸면 박사학위 그냥 나와, 그러면 폼 나게 살 수 있어 하는 유혹이 옵니다. 하다못해, 이번 이 건만 잘 넘어가게 해 주면 벤츠 뽑아드리겠습니다. 하는 유혹이 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 그럴 줄 알았던 사람이 검찰청 포토존 앞에 섭니다. 자기 인생이 폭망합니다. 한 목자님이 말하기를 ‘받는 자는 주는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 마귀의 종이 됩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선택을 하는 순간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만 봐주는 순간 그것은 부정부패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결국 쉽고 편한 길로 세상의 영광을 얻으라는 사단의 달콤한 유혹은 독이 든 사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번에도 신명기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귀가 세상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권위와 영광도 얻고 거기에다 하나님도 경배하고 섬기면 좋지 않을까요? 그럼 서로 좋은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요, 마귀를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자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의 권위와 영광을 마귀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방법으로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고난을 통해 세상을 얻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세상의 권위와 영광이 악은 아닙니다. 좋은 학점, 학위,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을 얻어서 폼 나게 사는 것이 결코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자존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그것만을 얻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마귀적인 방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세상은 과정보다 결과를 갖고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얼마나 얻었느냐는 것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 루저냐 위너냐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보다 먼저 과정을,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영광을 얻기 위해 쉽고 간편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난을 받으셨지만 결국은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시고 고난을 통해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신 예수님의 결론이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화답이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삶은 자기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영광과 권위를 얻는 것을 우선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마귀를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방법으로 세상을 얻고자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가운데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에는 루저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진정한 자리가 있고, 내 삶이 있고 내 존재가 있습니다. 무엇을 얻고 폼을 잡아야 나의 자존감이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에 진정한 나의 자리가 있고 나의 자존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시험을 이기며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고, 복된 삶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진정한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 시험(9-13) 9절. 마귀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그리고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10,11)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 내리라고 하면서 시편의 두 말씀(91:11,12)을 인용까지 하면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시험일까요? 먼저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우리로 하면 교회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뛰어내릴지라도 보호하겠다는 약속의 말씀까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신앙적이고 영적인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들고, 아예 깨버리고자 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고자 하는 분명한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과연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도우시는가? 더구나 약속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대로 정말 나를 지켜주시는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확인해보고자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시편에 이 말씀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뛰어내리면 보호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사는 자를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를 위해 뛰어내리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보호해주시면 다행이지만 안보호해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지시겠지요? 그것으로 끝나면 치료하면 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마음에 의심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 지켜 주신다는 섭섭함, 약속의 말씀대로 안 된다는 실망감이 들어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영적인 유혹입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더구나 내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내 삶의 방향을 잡습니다. 때론 그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그 약속대로 다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뛰어 내렸는데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집니다.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박살이 납니다. 그러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힘듭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는가? 그럼 왜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가? 하며 신앙이 흔들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이 들어옵니다. 어떻게 나에게 또 가족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는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들어옵니다. 심지어 나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why me? 하는 의심 속에 심하면 하나님도 부정하게 되는 심각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번에도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하고 받아들여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시험하고 의심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깨지고 실패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의심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깨지고 실패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의심하고 시험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출제한 문제를 맞추어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내 말을 들어줘야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나에게 더 나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내 작은 그릇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심으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주의 일을 시작할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화려하게 꽃피워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내 기준과 내 판단이 아니라,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가운데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점에 가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3가지 방법...등 이런 류의 책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 떠나갑니다.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내 기준과 내 판단이 아니라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가운데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매번 신명기 말씀으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와 싸운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세상은 마귀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를 실효지배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므로, 마귀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시험을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시련 뒤에 피는 봄꽃처럼 하나님 안에서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