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당시 59세의 이세종을 직접 만난 윤남하는 이세종의 모습을 기록하기를 “키는 170cm가 되어 보였고 체중은 50kg쯤 되어 보이는 깡마른 분인데 한복을 진한 회색으로 물들여 입었고 검정 고무신을 맨발에 신고 있었다”고 했다. 이세종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님 댁에 살면서 가난을 면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이세종은 지게가 닳아지도록 열심히 일하여 1920년경에는 등광리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세종은 나이 30세에 열 네 살의 시골 처녀 문재임과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이세종은 무당의 말대로 개천산(開天山) 기슭에 산당을 지어 놓고 아들을 얻기 위해 치성을 쏟았다. 그래도 아들이 없자 병들어 눕게 되었고, 무당마저 죽게 되었다. 이 일이 이세종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40세쯤 이세종은 성경을 구해 읽는 중에 예수를 믿고 회심하게 된다. 그리고 등광리에서 노라복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을 때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등 여러 교파를 알아 본 후에 장로교가 가장 낫다고 여겨 장로교를 택한다. 아마도 말씀을 읽고 회심한 이세종에게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가 가장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
정경옥에 의하면 이세종은 “때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 한다... 주일이 되면 혹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혹은 전도나 구제하러 나가기도 하고 혹은 혼자 산에 올라 명상하기도 한다.”고 했다. 정경옥의 말대로 이세종은 사경회가 있을 때는 광주교회에 갔으며, 자주 나주 다도면에 있는 방산교회에 나갔다. 그 곳에서 제자 이현필을 만나기도 했다. 이세종은 광주 중앙교회 최흥종의 소개로 저녁 예배 강사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세종은 주로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동산교회에 다녔다. 엄두섭에 의하면 이세종은 이 동산교회에서 3년이나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세종은 등광리의 자신의 산당에서 주로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당시 등광리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산당에서 홀로 혹은 제자들과 함께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이세종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화순 지방의 안학수와 한국의 젊은 평신도 지도자들, 특히 김교신을 비롯한 여러 무교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세종은 이들과 같이 평신도로서 성경을 가르치며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지만,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했다는 점은 그 당시 다른 평신도 무교회지도자들과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이세종은 당시 기성교회가 행락주의로 흐르고, 환난당하면 안 모이고 평안하면 갈아치우는 것과 행위 없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비록 그가 당시의 무교회주의자들과 비교해서는 교회를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