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열형을 당한 사육신의 목은 저잣거리에 사흘 동안 효시되었다. 그리고 시신과 함께 새남터에 버려졌다. 서슬 퍼런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한 스님이 행자를 데리고 새남터 맞은편으로 건너가 시신 묻을 곳을 물색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늘린 시신 조각들을 바랑에 주워 담아 양지바른 노들나루에 묻고, 공주 동학사로 가서 그들의 극락 왕생을 비는 초혼제를 지냈다. 그가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이다. 숙종은 사육신을 복권하며 그들의 묘를 크게 조성했는데, 그것이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다.
몸이 약한 문종이 일찍 죽고, 12살 어린 세자[단종]가 보위에 올랐으나, 궐 안에는 금상을 지켜 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오직 막강한 힘을 가진 숙부들뿐이었다. 삼촌 수양은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왕위찬탈을 위해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의 조력을 받으며 김 종서, 황보인, 민 신 등 세종, 문종 때의 수많은 원로대신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에게는 사약을 내렸고, 금성대군, 혜빈 양 씨[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길러 준 사람]는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단종을 겁박하여 왕권을 빼앗았다. 그때 김시습은 푸른 꿈을 품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충격에 빠져 고민하고 통곡했다. 불의에 대항하려면, 벼슬길에 나가지 말아야 하고, 벼슬길에 올라 수양에 충성하면 인간의 도리를 버리는 것이었다. 결론은 비장했다. 그는 공부하던 책을 마당으로 내던져 불태웠다. 그리고 오세암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의 법명은 설잠[雪岑, 눈 덮힌 높은 봉우리]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출가와 환속, 재출가를 거듭하는, 방랑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최소한의 양심과 지조를 지키려는 나름의 저항이었고, 상처받은 영혼의 구도행이었는지 모른다. 역사는 수양의 불의에 항거하다 죽은 6명의 충신 [성삼문 ,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을 사육신이라 부르고,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며, 평생 자연에 은거하며여 저항한 사람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을 생육신이라 했다.
우리는 선교장을 나와 김시습 기념관으로 갔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김시습의 본관이 강릉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릉에서 시묘살이를 한 적이 있어, 그의 기념관이 강릉에 있다. 100평 정도 되는 전통 한옥이다. 들어서니, 김시습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서적들을 전시한 방이 나온다. 이 기념관에는 매월당 문학사상연구회의 소장품들과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김시습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다.
'금오'는 경주 남산의 금오봉에서 따온 말이다.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금오봉 용장사에서 승려로 머무를 때 썼다. 거기에는 5편의 한문 소설이 실려 있다. '금오신화'는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27년 최남선이 일본에서 목판본 '금오신화'를 발견하고, 잡지 '계명[啓明]'에 소개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정병욱 교수가 필사본도 발견했다고 한다.
우리는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상실로 갔다. 그의 어릴 적 모습부터 방랑객이 된 모습까지 스산한 면면이 스쳐 지나간다. 김시습은 세종 때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시습'은 논어 학이편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연유한 것으로, 학문을 닦아 큰 사람이 되라는 외할아버지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명민함이 뛰어나, 생후 8개월에 글자의 뜻을 알았고, 3세 때 놀랄만한 문장력으로 시를 지었으며, 5세에는 중용과 대학에 통달했다고 한다. 신동이란 소문이 온 장안에 파다해, 세종대왕이 그를 불렀다. 5세 김시습은 승지들 앞에서도 막힘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오세동자’라고 불렀다. 세종대왕도 감탄해서, 큰 학문을 이루면 중용할 거라 약속하고, 비단 선물을 내렸다고 한다. 그를 보기 위해 조정 대신들이 찾아오고, 종친들이 책을 사주고.... 어린 김시습에 대한 어른들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 그리고 세종과의 이 약속이 자라는 김시습의 어깨에 태산 같은 무게의 짐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스스로 단종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일생을 선택하고, 기인의 삶을 살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가 50세가 되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회한에 차 지은 시다.
少小趨金殿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英陵賜錦袍 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知申呼上膝 지신사(승지)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中使勸揮毫 중사(환관)는 붓을 휘두르라고 권하였지 競道眞英物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爭瞻出鳳毛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焉知家事替 어찌 알았으랴 집안일이 결딴이 나서 零落老蓬蒿 쑥대머리처럼 영락할 줄이야!
김시습은 15세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강릉 외가로 갔으나, 곧 외숙모마저 죽어, 본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도 했지만, 몇 달 뒤 아내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했으나, 결국 승려 방랑객이 되어, 괴나리봇짐에 지팡이 하나 들고, 삭풍도, 폭염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계절 속을 떠돌았다. 절간에 칩거하며 면벽 고행하기에는 분노와 슬픔이 너무 컸던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기다리는 사람 없는,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정이었지만, 그중에도 수백 수의 시를 지었고,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남겼다.
어느 날, 세종의 둘째 아들 효령이 그를 찾았다. 효령은 이미 세조를 인정했고, 김시습이 어릴 때 책을 보내주기도 했었다. 효령의 간곡한 제안에 못 이겨, 김시습은 세조의 불경 언해 사업을 돕고, 세조를 예찬하는 시도 썼다. 원각사 낙성회도 참가했다. 거북한 자리였으나, 어쩌면 잠깐 감추어진 욕망이 고개를 들고, 화려한 영화의 길이 눈앞에 아른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금오산실로 들어가, 자괴감에 사로잡혀, 처절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김시습이 서른 네 살에 세조가 죽었다. 악몽과 병마에 시달린 고작 14년간의 왕위였다. 김시습은 못간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는지, 갑자기 환속을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그는 한양 수락산 계곡 물가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시절 그에 대한 일화가 <해동잡록>에 실려 있다........ 비 내린 뒤에 산골 물이 불을 때면, 종이를 찢어 백여 장을 만들어, 여울이 빠른 곳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혹은 절구, 혹은 율시, 혹은 고풍을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고, 쓰고 또 흘려보내고 종일토록 하다가 종이가 다 떨어져야 돌아왔다. 그는 새로 아내도 맞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도 지냈다. 그러나 혼인 1년 만에 아내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두 번째 결혼도 실패한 것이다. 그는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그리고 세월에 사그라진 가난하고, 고독하고, 병든 몸이 되어 공주 무량사를 찾았다. 또다시 세속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붙이 한 점 남기지 못한 채, 거칠고 고단했던 운명의 굴레를 벗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에 불교식 다비를 했다. 사리가 나와 부도를 만들고, 오세 김시습지묘[五歲金時習之墓]라고 새겼다. 우리는 김시습의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방으로 왔다.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과 매월당 문집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화면들이다. 명나라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금오신화'는 그 주인공들이 모두 비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만 현실이 아닌, 몽환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이들 이야기 속에는 현실을 초월하고, 자유를 구가하며, 불의에 대항한 자신의 삶이 단편적으로 담겨 있는지 모른다. '금오신화'를 기점으로 우리 문학사에는 여러 한문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김시습은 천성이 자유분방하고 심지가 지나치게 곧아, 시대의 와류에 타협하지 못한 고뇌에 찬 지식인이었다. 그는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등의 호를 가졌으나, 매화를 좋아해서 '매월당'이라는 호를 즐겨 썼다. 매화는 절의의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 속의 설매, 달빛 받은 월매, 안갯속의 연매, 물에 비친 침매, 가지 꺾인 절매, 오래 묵은 고매 등 많은 '묵매도'를 남겼다. 그는 벼슬을 한 적이 없어,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보다 야사에 많다.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김시습이 죽은 한참 뒤인 중종 때였다고 한다. 김시습은 사후에 재평가되었다. 그는 유, 불 사상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기인이었다. 일생을 동가숙서가식하는 삶이었지만, 율곡을 비롯한 후학들에게 백세 스승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정조는 그에게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남효온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했다. <금오신화> < 매월당집> < 매월당 시사 유록>등에 그의 글, 그림,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임종할 무렵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정리한 듯한 시, 아생[我生]이 눈에 띈다.
행간에 서린 허허로움이 깊다. 그는 꿈이 너무 높고 눈부셔, 좌절 또한 너무 깊고 어둡지 않았을까. 그는 인간 세상에 섞이지 못한 채, 외따로 떨어져 홀로 걷다 쓸쓸히 갔다. 나는 문득 그에게 묻고 싶다. 저세상에 가서도 이승에서 보낸 삶에 후회는 없는지. 저세상에서는 이승에서 보낸 그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마당에 서있는 비맞은 그의 시비가 당당하기보다는 스산하고 외로워 보임은 속진에 절은 내 눈 때문인지 모르겠다. 길.무간다
[출처] 김시습 기념관 [1월26일]|작성자 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