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을 훔치다 / 곽주현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네 시다. 얼굴을 씻는 둥 마는 둥 고양이 세수를 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빈속에 겨우 물 한 잔만 마셨다. 다섯 시에 박물관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서둘러 가야 한다. 이 나이에 이렇게 이른 시각에 움직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지만, 사진 동호인들이 만나는 날이라 마지못해 따라간다. 참석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말하지 않겠지만 친목을 다지려면 함께 해야 한다. 매달 첫째 토요일을 출사(出寫) 일로 정하고 촬영을 나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목적지까지 여섯 이전에 도착해야 원하는 풍경을 찍을 수 있어 일찍 서둔다. 일출 직전의 시간에 맞추어 가려고 그러는 거다. 그 무렵의 빛이 하루 중 가장 순해서 카메라를 좀 다루는 사람은 이 시간대를 놓치지 않는다. 태양이 구름을 헤치고 솟아오르며 뿜어내는 빛은 날마다 새 세상을 열어 보인다. 풀꽃은 잠에서 깨어나고 나뭇잎은 반짝거린다. 사진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인더 안으로 당겨 셔터를 누른다. 촬영지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린다고 한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곳인데 나는 처음 가본다.
옥정 호수(전라북도 임실군에 있음)에 도착했다. 전망 좋은 곳을 찾아 산을 오르는 데 경사가 급해서 숨이 가쁘고 다리가 뻐근해진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예전 같지 않다. 우리는 이제야 오르고 있는데 어깨에 카메라를 걸친 사람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 앵글을 들여다본다. 한참을 기다려 봤지만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있고 물안개도 피어오르지 않는다. 날씨가 흐리고 시간도 늦어서 원하는 풍경을 보기 어렵다. 이러면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어도 별 소득이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카메라로 호수를 응시하고 있다가 그만두고 눈을 뗀다. 같이 온 분이 또 허탕을 쳤다고 혀를 차며 아쉬워한다. 촬영하러 다니다 보면 이런 때가 자주 있어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 일기 예보를 자세히 보고 왔어도 시시각각으로 조화를 부리는 자연의 변화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이곳은 가을 물안개가 좋기로 이름이 나서 사진가들이 많이 모인다는데 오늘은 한가하다.
산들이 이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물이 맑고 깊어 보인다.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다. 물고기를 닮아서 붕어섬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체나 영락없는 붕어 모양이다. 커다란 어항에 금붕어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것 같다. 머리와 몸통은 물론 지느러미까지 마치 물 위에 그려 놓은 듯 또렷하다. 양껏 먹어 배부른 금붕어가 옆으로 누워 헤엄치는 형상이다. 그곳을 연결하는 멋진 출렁다리도 있다. 자리를 옮겨가면 몇 컷을 찍는다. 호수에 물안개가 일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풍광을 담아낸다면 좋은 작품이 될 것 같다. 아쉽다.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묵직한 망원렌즈를 몸통에서 분리하고 삼각대를 접어 정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전문가 수준에 이른 동호인들은 챙길 것이 많아 늘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다. 피사체가 돋보이게 하려면 렌즈 교환 등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해서 다양한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랑 카메라 한 대만 어깨에 메고 여행자처럼 다닌다. 필수품인 삼각대조차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 많은 것들을 마련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전문가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다. 그래서 경력은 10년 가까이 되지만 여전히 초보 수준이라 어디가서 사진 말이 나오면 모른척 한다. 맘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몇 컷을 담아 즐겨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음 촬영 때는 앞서 저장된 것을 대부분 다 지우고 새롭게 시작한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피사체를 보고 셔터를 누르지만, 사람마다 다른 느낌의 사진을 얻는다. 카메라를 잘 다루는 사람은 별것도 아닌 것을 특별하게 담아낸다. 빛의 미세한 차이를 잘 감지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므로 찍고 또 찍어서 자연을 보는 남다른 감각을 터득해야 한다.
사진은 무엇보다도 구도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피사체를 주제와 부제로 나누어 조화가 잘 되게 화면에 배치하고 찍어야 하는 데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다. 기본 틀이 잘 된 사진만 있으면 다양한 편집기술로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원판에 없는 뭉게구름을 가져온다거나 푸른 들판만 있는 곳에 양 떼가 풀을 뜯고 있는 목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좋은 영상은 70%가 편집기술로 얻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진은 사실적인 것이 생명인데 그렇게 원래 것보다 너무 다르게 고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진을 하다 보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자연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나뭇잎이 햇빛을 받으면 종류마다 다르게 반짝이는 것이 보이고 바람, 구름, 나무, 풀잎 등 모든 사물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똑 같은 사물이지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헤엄치듯 나른다. 찰칵. 또 가을 한조각 훔쳤다.
첫댓글 아, 사진 취미를 10년 하셨군요. 여전히 초보 수준이라는 겸손의 말씀 곱씹게 됩니다.
정말 초보 수준입니다. 사진을 좋아만 했지 공부는 안 해서
그렇습니다.
와, 10년이나요?
그럼 이번 문학기행 사진은 선생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하.
아이고, 핸드폰 사진은 누구나 전문가입니다.
이 제목이 훨씬 선생님 글과 잘 어울리네요.
고맙습니다.
글도 잘 쓰시는데다 사진까지. 멋진 인생 가꾸시네요. 매력이 넘치십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취미 수준입니다.
선생님의 섬세한 표현이 사진에서 나왔군요. 사진도 글만큼 좋을 것 같아요. 열정, 멋지세요.
글, 사진 다 어려워요.
같은 기계로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낸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그러게요.
"찰칵. 또 가을 한조각 훔쳤다." 선생님의 가을 풍경 정말 멋지네요
글이 유려해서 마치 흐르는 물을 보는 듯합니다.
좋은 취미 가지셨어요. 선생님의 일상을 훔치고 싶을 만큼 글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