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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문>
🍒 작년 3월 제천 동부감리교회 실버대학에 장애인 사역에 관한 간증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급히 작성했던 간증문.
벌금을 물고 전과자가 된 것은 교회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딸 아이들 포함 가족은 일체 모르는 사항이라 혹시라도 아는 분들은 비밀로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간증이라고 하기보다는 부끄러운 지난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천과는 이웃해 있는 단양 영춘이 고향이고 제천이 외가인 올해 나이 만 쉰 여섯으로 장락동에 있는 작은자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조병수 목사입니다.
저는 본가와 외가를 통털어 제일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며 어려서부터 커서는 목사가 되겠다는 말을 입에 담고 살았었습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한 때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늘 입버릇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말한 때문에 신학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한 뒤에 다른 과정이 없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천에는 강릉에서 목회를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94년 제천에 와서 아내와 단 둘이 개척을 하고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목회 방향이나 관심은 사실 지금의 장애인 사역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불우아동들에 대한 사역부터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아내의 대학교 때 전공이 수학이라 소년소녀가장 아이들 수학과외를 지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소년소녀가장 아이들의 주소를 알아내어 아이들에게 수학지도를 해 줄테니 연락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학원에는 갈 돈이 없는 소년소녀가장 아이들이 그렇게 하면 아이들로부터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무 명 정도의 소년소녀가장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부모 있는 아이들도 억지로 등 떠밀려 학원에 가고는 하는데 부모없는 아이들이 아무리 공짜로 과외를 해 주어도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은 큰 무리겠구나 싶어서 수학 공부를 지도해 주겠다는 생각을 접고 반찬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날라다 주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푸드뱅크나 음식 나눔하는 단체들이 많이 생겨 났지만 25년 전에만 해도 반찬 나눔하는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 3년 가까이를 반찬 나눔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면서 주변에서 도움 주시는 분들이나 단체가 있어서 반찬 외에도 아이들에게 옷이나 다른 도움도 주고 할머니와 함께 2만원짜리 월세방에 살고 있던 두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하소 4단지 아파트에도 입주를 시켜 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 공생애 기간동안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장애우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지인이 보내 온 쌀 두 자루를 가지고 떡을 해서 떡 한 박스는 영월 연당에 있는 예가원에 갖다 드리고 한 박스는 장애인 선교단체인 밀알선교단에 갖다 드리면서 밀알선교단 일을 돕고 함께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밀알선교단이 지금보다 활발한 사역을 하는데도 직원이 없어서 파트 타임 직원으로 일해 달라는 부탁에 일주일에 3일을 사무실에 나가 일을 도와 드리면서 한 달 사례비 20만원을 받으면 단 한번도 사례비를 받아 오지 않고 사례비를 받는 그 자리에서 봉투를 다시 바꿔서 20만원을 그대로 감사헌금으로 내 놓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밀알선교단 사역을 돕다가 지금에 정신장애인을 만나고 특수 목회가 아닌 특수 목회를 하게 된 사연은 정보신문 교차로나 화제신문 광고란에 정신병원에서 종이접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된 것입니다.
초등학교(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종이학과 돛단배를 시작으로 종이접기를 좋아하게 되어 틈틈히 종이접기를 배워 둔 탓에 종이접기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볼 때마다 부담이 되어 마침내 정신병원에 전화를 걸어보게 되었고 제가 전화를 하기 한 달 전쯤에 종이접기 봉사 들어 오는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병원에 환자들이 많으니 들어오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정신장애인법이 많이 바뀌어 환자들을 계속 내보내고 밖에 퇴원해 나간 환자들은 입원이 까다로워 다시 들어 오는 경우가 많지 않아 입원 환자가 300명이 조금 넘는데 당시에만 해도 정신병원 입원환자 수가 500명이 넘었었습니다.
종이접기 들어간지가 20년이 넘었거나 20년이 다 된 것 같으니 지금보단 젊고 싱싱할 때라 그런지 종이접기에 환자분들이 많이 내려왔었습니다.
종이접기 시간에 저를 20년이나 보았으니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지금은 10명 안팎의 인원이 참석을 하는데 처음에는 30명이 넘게 종이접기에 참석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정신병원에는 10년 이상, 20년 이상된 환자들도 제법 있어서 처음 종이접기 들어 갈 때 만났던 분들이 그대로 있기도 하고 병원 안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
정신병원 종이접기와 함께 보건소 산하기관인 정신병원에서 나온 분들을 관리하는 정신보건센터에 종이접기 봉사를 나가면서 만난 정신장애인들이나 알콜환자들이 교회를 나오면서 원하지 않았던 특수목회를 하는 장애인 교회처럼 되어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수목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고 특별히 병든 자, 귀신들린 자(정신장애인)들을 많이 만나는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당연이 해야 할 일이지 특수목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한 사람 두 사람 정신장애인들이 교회에 출석을 하고 많을 때는 흔히 말하는 미친 사람들(죄송)이 15명 가량이나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일 지긋지긋할 정도로 힘들게 하는 이들을 꼽으라면 알콜환자들입니다. 역전에 10년 노숙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알콜환자가 퇴원해서 전화를 주었더군요.
저는 지금도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면 다 알려 줍니다.
혹시라도 도움 줄 일이 필요한 이들이라 그렇게 합니다.
역전에 10년 노숙하던 알콜환자가 퇴원해서 나오자 마자 또 술을 마시고 터미널 앞 모텔에서 이들 통안 술에 취해 자다가 정신 차리고 전화 했다고 해서 만났더니 술을 끊어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친구 한 명이 역전에 노숙하고 있는데 그냥 두면 죽게 될 것 같다고 해서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갔더니 그 때가 11월 말쯤인데 역전 앞 삼익상가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 새까만 몰골로 웅크리고 흔한 말로 술이 떡이 되어 자고 있더군요.
겨우 흔들어 깨워서 커피를 뽑아다 한잔 먹이고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더니 자기 묵었던 모텔에 데리고 가서 재우고 씻기고 해서 다시 보자고 해서 그 다음날 만났더니 그래도 멀쩡해 보이는 몰골이더군요.
그렇게 해서 집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주고 한 사람은 성도교회 장로님이 운영하는 목욕탕에 취업을 시켜주고 일을 하게 했는데 진짜 감당이 안되더군요.
첫 월급을 타던 날 고기를 사 주겠다고 불러내서 저녁을 사 준 뒤에 곧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더니 그 길로 또 다시 역전의 용사가 되어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노숙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주를 사다가 안주도 없이 한 병을 비우면 곧바로 오바이트를 한답니다. 그러고 하루 종일 또 술을 먹고...
역전에 있는 것을 목욕탕 장로님하고 찾아 내려가서 잡아 오면 보름 정도 일하다가 또 다시 역전으로 가고 동네 슈퍼에는 알콜 환자니 술을 주면 절대 안된다고 이야기 해 두었는데도 다른 알콜 환자들이 술을 사 가지고 오니 감당이 안되고 사 가지고 오는 술을 빼앗아서 술을 쏟아 버리기도 꽤 많이 했고 혹시나 목욕탕에 출근하지 않을까 싶어 자취방에 가서 같이 자고 새벽 4시 반 목욕탕 일 갈 때 목욕탕 앞에까지 같이 데려다 주고 밤 10시 30분 일 마칠 때는 목욕탕 앞에 기다리다가 데리고 오고 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한 4개월만에 다시 역전의 용사로 돌아가 버리고 한 사람은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퇴원을 안 시켜 준다고 전화를 해서 교회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하더구요. 그것도 말을 얼마나 이쁘게 하는지 아무 때나 불 지르지 않고 예배시간에 사람들 있을 때 불을 지르겠다고 하더군요. 불 지르겠다고 하던 사람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던 해 술 때문에 역전부근에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목욕탕 일을 하던 사람은 다행이도 그 이후로 10년이 넘었는데 정신병원에 들어 오지 않고 밖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길에서 우연히 두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알콜 환자들의 습성은 돈을 뜯어 내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고 술만 먹으니 가족들은 돈을 주지 않고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 내거나 돈이 될만한 것을 들고 나가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술로 바꿔 먹습니다. 돈을 많이 떼이기도 하였고 만나던 알콜 환자들이 이미 많이 죽었는데 그 가족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자기 오빠인데도 죽이고 싶다고 하고 자기 동생인데도 차라리 나가서 죽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역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알콜 환자도 아니고 교회 나오던 성도들의 자살입니다.
내가 사는 제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함에 인터넷으로 매일 제천지역 뉴스를 검색해 보는데 2012년 11월 29일 의림지에 모자가 동반자살했다는 기사가 올라 있기에 저런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 교회 나오다가 다른 교회로 간 정신장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목사님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하는데 아차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의림지 못에 동반 자살한 이는 교회를 나오던 정신장애인인 형제와 그 어머님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정해 둔 원칙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은 차없는 목회를 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내 교회서 옮겨 오는 이는 안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 교회서 옮겨 온 이는 다시 돌려 보내거나 아예 인사도 안 시키고 손님처럼 대하니 결국 다시 돌아가거나 다른 교회로 가더군요.
그런데 다른 교회 다니는 정신장애인들이 있으면 길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 교회 오라고 이야기 하는데정신장애인들이 다른 교회 나가 보았자 말을 섞을 사람도 없고 적응을 못하고 결국 교회를 계속 옮겨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접고 말더군요. 그래서 길에서 볼 때마다 우리 교회 오라고 이야기 해서 온 사람들이 몇 있고 어머니와 함께 자살했던 형제도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로 옮겨 온 형제이고 약간의 우울증이 있던 어머니는 아들을 따라 세 번 교회를 나왔었습니다. 사고 나기 전 주에 교회를 안 나왔길래 전화를 했더니 아픈 목소리가 느껴지길래 좋아지면 교회 나오라고 했는데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어떻게 장례를 치뤄야 할지 감당이 안되었었습니다. 다행이 그 형님네 가족이 동부교회 출석을 하고 있어서 장례식장에 오셨던 동부교회 부목사님께 사정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 장례집례를 부탁 드려서 동부교회 부목사님이 장례 집례를 해 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에도 교회 나오면서 중국집이나 치킨집에 배달 일을 하며 꼬박 꼬박 십일조까지 하던 형제 하나가 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가족 중 그 형제만 교회 다니고 있었는데도 교회장으로 해 달라고 해서 제가 장례 집례를 했었습니다.
교회 나오던 사람들 중에 정신 장애인들끼리 결혼을 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썩 반기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원해도...
제일 먼저 결혼한 사람 중에 남자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 다니면서 학원 근처에도 못 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지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그 어머니 말씀으로는 서울대 졸업을 보름 남겨 두고 발병했다고 합니다.
조울증(뜬다 가라 앉는다) 환자인데 교회 나오면서 좋을 때는 괜찮은데 조증으로 뜨게 되면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때로는 예배시간 5분 전까지 붙들고 말도 안되는 시비를 겁니다.
오전 11시 예배에 자기 기도를 시켜 달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나 기도 시키는 것 봤냐? 집사 아니면 기도 시키지 않더냐? 그랬더니 기분 나쁘다고 기도 시켜 주지 않아서 교회 안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11시 예배는 안 오고 오후예배는 나옵니다. 조증으로 떠서 상태가 안 좋으면 담배도 얼마나 많이 피우는지 예배 끝나기가 무섭게 교회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워 물고 꽁초를 길에다 휙 휙 버리고 해서 야단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냐? 교회 사람들이 예배 끝나고 담배 피우고 꽁초나 길에 버리고 욕한다 했더니 자기가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으면 청소부 할 일이 없어져서 청소부가 사라지기 때문에 담배꽁초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니가 담배꽁초 버리지 않아도 청소부는 그대로 존재한다 했더니 목사직 걸고 장담하느냐고 묻더군요.
그 서울대 법대 나온 형제로부터 고소를 당해서 벌금형 300만원을 물고 합의금 150만원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를 다니던 여자분이 약간에 정신장애가 있는데 1년 여 교회를 안 나고 있을 때 정신보건센터에 프로그램에 나오다가 종이접기 프로그램에서 만났는데 정신본건센터에서 우리 작은자교회 나가면 안되겠냐고 전화를 걸어 와서 1년 가까이나 교회를 쉬고 있던 분이고 정신장애인이라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서울대 나온 형제가 이 여자하고 눈이 맞아서 본처를 버리고 이혼을 해 나갔을 때 그 내용을 간단하게 교회 인테넷 카페에다가 올린 것을 문제 삼아 고소한 것이었습니다.
형사재판 벌금을 물고 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민사 소송을 걸어 왔더군요.
아예 돈을 뜯어 내려는 작정을 하고 그 일을 문제 삼아 계획적으로 정신병원에 두 달이나 입원을 하고 소송을 했던 것입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전공을 제대로 한 번 살려 본 것이지요.
교회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웠으면 되었을텐데 서울대 법대 나온 형제나 눈이 맞아 나간 여자나 툭하면 이유없이 교회 다른 정신장애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람들이라 교회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과는 상관없이 그 일이 있기 1년 전 쯤에는 조증으로 떠서 제게 전화해서 죽이겠다 그러고 맞장 떠서 싸우자고 하는 등 3일 동안 협박 문자를 보냈었는데 그 일로 저는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던 성도였고 정신장애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소를 하고 한 4개월 여 동안 계속 전화와 문자에 시달렸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다가 깨면 1시간 밖에 안 지났고 또 자다가 깨면 1시간 밖에 안 지난 것이었습니다.
그 때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그나마 이겨내고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감사찬송'을 계속 틀어 놓고 들었습니다.
저를 고소한 이는 벌금 300만을 물고 전과자를 만들어 놓고 합의금까지 150만원을 받아 낸 그 다음 해에 주일날 세 번을 또 다시 교회를 왔더군요. 오후 예배 때 와서 점심도 먹고 혼자 스스로 커피도 타서 마시고 저한테 자기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고 상담도 해 오더군요.
용서까지는 되는데 사랑하는 것은 잘 안되더군요. 성경에는 원수까지 사랑하라 했는데 원수가 되니 사랑하는 마음이 잘 안되더군요.
저를 고소했던 형제도 작년 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인테넷 뉴스 기사에 유서까지 써 두고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한 것으로 봐서는 우울증이 와서 자살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서에 저한테 사과한다고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있었으면 그 가족들이 제게 그 말을 전해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은 적혀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신장애인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작년 3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 정신병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목화자들과 찬양 사역자들이 기름값도 못 드린다는데 섬기러 와 주고 계십니다.
지난주엔 보니 동부교회 출석했던 분이 입원했더군요.
얼마 전엔 몇 번 인사를 나눈 단양에 목사님도 입원한 일이 있었구요.
연세대 신학과 나온 분은 25년 가량 병원에 입 퇴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주어지면 정신장애인 시설을 하고 싶습니다.
수년 전 부여에서 목회하는 같은 교단 침례교 목사님이 오갈 데 없는 알콜 환자를 교회서 데리고 있다가 칼에 찔려 목사님과 사모님이 돌아가신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까지껏 힘들어도 죽는 것 뿐인데 어떻겠습니까?
아니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인데 죽으면 어떻습니까? 교회 나오던 정신장애인 본인도 죽었지만 어머니를 폭행해서 돌아가시게 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힘들더라도 죽더라도 그 길 기쁨으로 가려 합니다. 감사하며 가려 합니다.
그 길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9. 3. 9
첫댓글 목사님 승리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