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을 숨긴 상자
가장 특별한 경우는 상자에서 부인이 쓴 글들이 발견되는 경우다...
아내의 상자 속에 있던 원고들은 대부분 가족들끼리 읽고 간직했다. 이런 점에서 강정일당(姜靜一堂)의 경우는 더욱 특별하다. 상자속에 있던 유고(遺稿)가 문집으로 당당하게 출판되었다.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尹光演)은 부인 죽고 난 뒤 4년뒤 그녀의 문집을 간행했다. 그는 아내의 문집을 가지고 친척인 대사간 윤제홍에게 간다. 그 사연이 <정일당유고> 서문에 적혀있다.
어느 날 소맷자락에서 작은 책자를 내놓는데, 제목을 <정일당유고>라고 하였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저의 죽은 처자가 지은 시문으로 상자속에 들어있던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제 처는 일찍이 시문은 부녀자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서 한 번도 내놓지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죽었지만 평소의 뜻을 손상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 이 책을 영구히 없어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아내의 유고를 앞에 두고 눈물을 터트리는 남편 그에게 부인은 매우 특별했다. 부인이 낳은 아홉 남매는 가난으로 인해 모두 첫돌을 맞이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윤광연의 본가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온 가족이 유랑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윤광연은 상복을 입은 채 충청도와 경상도를 다니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이런 남편에게 부인은 자신이 바느질과 베짜기를 밤낮으로 해서 죽이라도 끓일 테니 학문을 하라고 하며 글공부를 권했다...
강정일당은 살아 있을 때 남편이 써야 할 글을 대신 짓기도 했다.
이런 글들 가운데 한편이 이직보(1738 - 1811)에게 들어갔다. 정조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정일당의 시를 칭찬했다. 정일당은 우쭐하기는 커녕 자신의 저술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로 한다. 다른 조선시대 여성 문인들처럼 자신의 문재(文才)를 자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후 10여명이 넘는 조선의 문사들이 강정일당의 죽음을 추모하는 만장을 지었다. 강정일당의 행장은 삼종 형제였던 강원회(姜元會)가 짓고, 묘지명은 형조판서 홍직필이 찬술하고, 유고집 발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송치규가 지었으며, 서문은 윤제홍이 썼다.
여성으로서는 유래가 없는 일이다.271 - 274쪽.
선비의 아내, 류정월, 2014년, (주)위즈덤 하우스 역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