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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찬양과 현대 교회(시편 100:1~5)
2024년 4월 28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편 100:1~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종의 입술에 기름부어 주시사 말씀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있게 하셔서 모든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하나님 제공해주시고 나리어 주신 것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되, 우리 모두의 성도들에게 말씀이 선포될 때, 겸손히 받을 수 있는 정말 놀라운 영감 있는 시간 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예배에 대해 오늘과 내일의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재점검하고 또 우리가 옳게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되고, 또는 우리의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자꾸 움직여서 우리의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끔 어떤 때에는 세계적으로 기독교회가 어렵다고 할 때에 다 때려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해서 오늘을 마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자세도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제 가슴에 이만큼 사무친 것을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그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가능한 많은 것들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문제를 나누자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함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일찍 예수 믿은 분들이라면 죽을 때까지 아마 수천 번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런 성질의 예배였는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예배가 아니었다면 그 몇 십년을 거슬러 가서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동안 “아이, 괜찮아! 그냥 해!” 하는 식이었습니다. 우리 전 시대의 정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이 그냥 해도 돼.’가 범죄를 해도 ‘아이, 해도 돼.’로 변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고, 돌이켜보고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무궁 한번 준 이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신 길을 따라 가면서 ‘하나님, 어떻게 가요? 이렇게요? 그 다음에는요?’ 이렇게 좁은 길을 한 번 딱 가고 인생의 문은 닫혀 버립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얼마 간에는 그냥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의 삶을 아름답게, 또 조용하게 영광 돌리며 장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주어진 시간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자세. 여기에 대해서 저는 할말이 너무 많습니다. 경고할 것이 많고, 책망할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바대로 충실하게 하겠습니다.
전에 우리가 예배 드릴 때에는 이런 모습이 많았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하기 전에, 헌금송이 나오거나 찬양대가 찬양할 때 성경구절을 찾고 노트와 펜을 꺼내서 날짜 적는 사람, 주보에 설교 요지 보는 사람 등 찬양에는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찬양 끝나면 박수는 치는데 진심으로 감동돼서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체면 살리기 위해서 ‘쳐 줄게.’ 하는 식입니다.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말씀이 중요하지 다른 건 하찮다’라고 상대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찬양대에서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그런 어떤 분위기, 이 전체의 성도들이 약간 영감을 조금씩 앞으로 더 당겨주는,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의 마음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시간을 들이고 에너지를 들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을 하찮은 것으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예배의 요소라니까 억지로 하는 식으로 한다면 찬양 다 빼고 앉자마자부터 설교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되고, 우리 예배 드리는 그 모든 요소요소가 하나의 작품처럼 되어서, 하나의 굉장히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서 하나의 완성된 완성체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나님, 들으세요!’ 하고서 학예회처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아무 생각도 안 하시다가 “음. 그래 해 봐. 그냥 알아서 해. 나 기쁘게 해줘 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각자 신앙생활하다가 다 싸워서 이기고, 원수와 싸워서 이기고, 유혹과 싸워서 이기고 여기에 온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모여 있을 때에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군인들이 점오를 하고, 예비군들이 몇 개월 마다 한번씩 만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를 정비하고, 우리의 질서를 세우고, ‘다 잘 왔지? 우리 함께 모입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그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그 자세로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구원받은 자로서 나를 전면적으로, ‘일주일 동안 노력했습니다.’ 하고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여기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우리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존다고 하나님께서 ‘졸아?’ 하면서 꿀밤 때리거나 미니 벼락 같은 것 떨어뜨리시고 하진 않습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피곤한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몸이 ‘나는 못 견뎌. 바이!’ 하고 가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참여인데요?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진짜 경배하고,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서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는 어떤가요? 안내 위원이고 누구건 간에 설교 시간에 전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설교 듣다가 딴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여기 모인 회중을 보시고 ‘다 기특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다가 신앙을 잃지 않고, 신앙의 힘을 갖고 와서 여기서 예배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찬양할 때, “하나님 받으세요! 당신만 받으세요! 우리가 제일 멋있게 준비했습니다!” 하고 화려하게 기교를 내서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우와! 우와! 내 정서적으로 너무 편안해져, 갑자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제 생각에 그분의 딸꾹질 소리가 우리 소리보다 100배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자세, 우리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찬양은 마치 부수적인 요소로 보는 것 같습니다. 시편 98편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형태가 이랬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 내용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시대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인생의 주어진 할 일이 무얼까요?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찬양합니다!’ 하는 것이 무얼까요? 오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은데, 선포해야 될 내용은 너무 많아서 저도 좀 고민이 되는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예배하는 행위가 뭘까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신이 나 있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 주께 감사함으로 평생을 기뻐하는 것.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감사.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데려가실 거야.’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보고싶은 건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것, 우리가 뿌듯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 이 자체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 예배 잘 드립니다! 하나님, 이 멋있는 찬양 받으세요! 저 예배 시간에 엄청 집중하고 있습니다. 딱 집중하고 있는 거, 보이세요?’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찬양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지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자기가 좋아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98편에 보면, 빠르게 훑어보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만나서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떠들고 자기들이 좋아했습니다, 자기들이 신났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학예회 같은 것을 엽니다. 받으십시오.’ 연습해가지고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즐거워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래~ 해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내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편 98:1~30)
이제 ‘찬양하라’ 내용이 나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양할찌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찬양할찌어다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다 외칠찌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찌어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편 98:4~9)
하나님은 지옥에 갈 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그 속에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것. ‘얘가 나한테 뭘 잘하나, 안 하나?’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가?’ 하나님의 의가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시니, 그가 의를 행하시니 우리에게는 행복이 돌아오고 혜택이 돌아옵니다. 그 자체에 대해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의를 베푸시니 내게는 온갖 복이 들어왔도다. 하나님 나를 구원하셨구나. 의를 그가 행하시니 내가 구원받았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일생 얼마 안 남았지만, 나는 소망을 갖고 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감사해서 자기들이 즐겁게 뛰는 노는 모습을 보시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찌어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찌어다(시편 149:1~5)
이러한 말씀은 수도 없이 펼쳐지는데, 포인트는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그가 구원하신 구원에 대해 계속 거기 거하면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베푸신 것으로 인하여, 또 그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그 나라를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할 때 어떻습니까? 로마서 10장10절에 보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는구나. 음. 나는 마음으로 믿어.’ 하고 누가 “마음으로 믿어요?” 하면 “믿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요?” “믿어요, 믿어요, 믿어.” “시인해요?” “나 예수로 구원받았어요.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하면 끝인 줄 압니다. 너무 쉽습니다. 이런 고백은 거짓 사기꾼들도 다 합니다.
사단의 일꾼들도 똑같이 합니다. 그들도 “믿어~” 하고, “나 예수 믿어요~” 합니다. 로마서에 말하는 것은 그런 것 아닙니다. 진짜 믿고 시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실제 삶으로 보여야 합니다. 자세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 믿습니다!”라고 누구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 손 드시오.” 하면 양손 다 들고, 발까지 다 들 것입니다. 원수도 여기 숨어 들어와서 자기도 같이 손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흉내를 못 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찬양을 하다가 하품했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하다가 가사 틀리고 음이 틀려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찬양하는데 그 바탕이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입으로 시인한다는 건 우리가 이 찬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한국 교회 지금 축소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시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우주가 서서히 팽창하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축소된다는 것처럼, 서서히 팽창하다가 줄어들 때에는 확 줄어들 것입니다. 인구가 줍니다. 교회도 줄어듭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이렇게 축소한다는 걸 봤어야 되는데.
또 사람들이 기독교회에 매력을 못 느낍니다. 살짝 옛날 스타일이 그 다음 세대까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스타일이 대체적으로 다 비슷합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습니다. 교회는 매력이 없다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합니다. 교회는 현실감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 그 때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는 해답을 많이 못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의 해답은 다른 데서 찾고, 교회에서 점점 떠납니다. 교회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 세대를 ‘mz’라 부르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mz세대라 하면 ‘어린 애들’로 여겼는데, 지금은 그들이 어른입니다. 저보다 더 수염도 나고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들이 더 어른스럽습니다. 그들하고는 정서가 안 맞습니다. ‘내가요? 왜요? 내가요? 걸요? 왜요?’ 이게 mz입니다. “너 이거 해.” “이걸요? 내가요? 왜요? 니가 하세요.” 이런 세대거든요.
그런데, 조금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 식으로 하면, 꼰대는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거의 사회에서 중심적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10년 안쪽으로 그들이 완전 중심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그 밑의 세대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mz빨리가! 우리가 올라간다!’ 밑에서 막 밀고 올라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독특한 종류의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세대들에게 오늘날 교회가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전혀 그들에게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모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니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나마 기독교의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이 있으니,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튜브가 활성화됨으로써 찬양팀들이 우후죽순 막 일어납니다. 그들이 기독교 교회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기독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건 찬양 사역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튜브에 찬양 채널에 보면 ‘불신자지만 노래가 좋아서 듣고 있습니다.’ 하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지만 이 노래 좋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듣는 것입니다. 어떤 정서, 배경 이런 것들이 다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노래가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을 설명할 그 설명거리, 자기 인생을 설명해주는 어떤 그런 거울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노래는 일단 마음이 끌리고, 그 다음에 가사 내용으로는 ‘고맙구나. 이렇게 축복하는 노래구나. 인생은 이렇게 해서 저런 식으로 무조건 다투어서만 되는 것은 아니구나. 나를 위해 생각해주는 그러한 너그러운 그러한 마음들도 있구나.’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옛날 물려받은 신앙의 모습으로는 우리의 인생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기도로요? 이전에는 ‘5시간 안 하면 너는 자격도 없어. 신앙인의 자격도 아니야!’ 하는 식으로 함부로 생각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럼 5시간 기도하면 되나요? 기도 조금 하면은 숨이 딱 막히고 슬픕니다. 마음만 아픕니다. ‘이거 해주십시오. 저거 해주십시오. 하나님…’ 마음은 무겁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대신 다 설명을 해 줍니다. 기도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했더니 쟤가 날 억울해서 나를 째려보는데 제가 너무 분통이 터져 가지고 그래서 저도 한번 눈을 흘기려고 하니까 그 때는 또 없어지고 뭐…’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나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같이 찬양을 부를 때에 다 녹아 들어갑니다.
여기 있는 성도들도 다 하나님으로 인해 그걸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지하고, 좋아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좋아하는구나. 하나님께 인생을 걸었구나.' 찬양할 때 나도 참여하고 여기 같이 있는 것이 내게는 예배고, 내게는 찬양이란 말입니다. 노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같이 있는 것이. 찬양은 가사가 딱 맞지 않아도 함께하는 것자체로 몰입이 됩니다.
또 되풀이돼서 선포되는 말씀과 같습니다. 깨달은 것이 많아집니다. ‘이런 찬양은 좀 재미없다.’ 그러더라도 들으면 오히려 더 깊이 감동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만드는 사람들도 성경 내용을 잘 알고, 복음의 내용들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위로가 됩니다. 물론 저 같은 경우 바쁘니까 항상 음악 듣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여러분과 함께 찬양하는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하나님 아래서 가장 떳떳한 시간,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당신의 주신 영광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아주 흥분해 있고 가득 취해 있고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것으로 인하여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땠습니까? 성경에 보면 1년에 봄과 가을에 몰려 있는 절기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절기가 많습니다. 칠칠절, 오순절, 무슨 절들이 많은데 무엇을 할까요? 부흥회 같은 것도 했겠지만 쉬면서 노는 것입니다. 춤추고 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구해 놓고서 ‘야, 편히 쉬어!’ 그들이 공휴일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평안하구나, 하나님 안에서.’
저도 노래하는 동안에는 많이 잊습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할까? 삶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저도 머리가 아픕니다. 인생을 누가 설명을 해주겠습니까? 인생 계속 되돌려서 기도로 표현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것만 해주십시오. 저거 해주십시오.’ 계속 반복할까요? 찬양은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이 찬양 속에 나를 넣어서 나를 위로하려 합니다.
찬양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체로서 모입니다. 여기 참여한 사람들 중에 ‘에이, 뭐 저런 걸 하고 있어? 에이, 찬양 빨리 끝내지. 왜 이렇게 모르는 노래들을 하고 있어?’ 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찬양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신자의 정신, 수 천년을 온 신자의 정신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끼어 있는 것이, 참여가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나는 이거 모르는 찬양이네. 나는 재미없어. 아는 걸 해야지. 재미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맞는 찬양을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안 맞습니다. 이를 테면 연세가 있는 성도들에게 맞는 찬양을 하면 젊은 성도들은 ‘어우, 너무 고리타분하고 너무 옛날 노래. 너무 재미없어. 어떻게 나 졸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둘이 싸워야 할까요? 가위바위보로 결정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합니까?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찬양하는 것이 나 즐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 즐거워. 나 마음이 시원해.’ 나 해결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러 온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예배에, 우리 경배에 참여하러 왔습니다. 모르면 뒤에서 그냥 춤을 추더라도 여기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노래를 몰라도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찬양에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사람, 주신 은혜에 대해서 참여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예배를 마치 자기를 돕는 시간으로, ‘나 시원하게 해줘~ 말씀으로 나 시원하게 해줘~ 감동시켜줘. 목사! 시원하게 해줘 나를. 아, 목사가 시원찮다.’ 이런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저는 누굴 시원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죄인들을 깨우치고,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찬양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일주일동안 ‘하나님, 나 당신의 은혜로 잘 보호되고 있습니다. 나 당신 것입니다.’ 하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우리는 교회가 즐거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와, 젊은 성도들 노래 잘하네~!’
우리 민족성이나 사회상은 찬양할 때 점잖게 서서 하지만, 다른 지역에 가면 춤추면서 찬양하는 데가 많을 것입니다. 인류는 우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간, 천년 단위로, 몇 천년 동안은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곡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떻게 할까?’ 지금 우리는 옛날 찬양을, 벌써 몇 백 년 전, 200년 전, 250년 전 이런 때에 정해 놓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인데, 그쪽으로만 맞추면 젊은 세대들이 안 좋아하고, 또 젊은 세대에게 맞추면 나이 드신 분들이 안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당분간 찬양으로 전체적인 지배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같은 것을 보고 ‘와, 영화 멋있어!’ 하는데, 사실은 그 배경에 음악이 쭉 흐르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에 더 와닿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찬양 없으면 이 건조한 우리 마음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슬퍼도 노래, 기뻐도 노래 계속 노래합니다.
여러분, 저도 기계같이 일합니다. ‘내가 기계인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그냥 소모품입니다. 기계가 망가지면 죽는 것이니, 기름 칠 새도 없이 계속 돌립니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버틸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음악을 틉니다. 음악이 좀 리듬있게 쭉 나오면 마음이 풀어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 음악입니다. 쿠쿵 칙, 쿠쿠쿵 칙, 쿠쿠쿵 칙, 쿠쿠쿵 칙 하는 리듬 그 자체로도 뭔가 시원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곡을 어떻게 할까 저는 고민합니다. 이렇게 하면 조금 연세든 성도들에게 맞을 것 같고, 이렇게 하면 젊은 성도들이 ‘아이, 우리 안 해. 갈래.’ 할 것 같고. 중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선곡하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양쪽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당한 선에서, 50대 후반 정도의 성도가 ‘아, 이거 괜찮아.’ 할 정도 그냥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도 연령대가 높은 쪽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겠어요? 저는 너무 바쁘지만 코피 터지게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mz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 mz성도들은 목사님 따라간다고 하겠지만, 나는 당신들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려고 합니다. 노래도 ‘아, 싫어! 이거 나랑 스타일이 안 맞아.’ 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당연히 안 맞습니다. 저도 옛날 80년대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조금 알 수는 있겠습니다. 이해를 조금씩 해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패는 찬양을 성실히 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공하느냐, 안 하느냐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찬양 다 빼고 하자? 무슨 담력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80년대에 가스펠송으로 한국에 기독교 신자가 천만까지 이르렀습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하는 가스펠송 때문에. 또 우리 찬양대도 많이 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다 70년대에 나온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많이 부흥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 성락교회도 예배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스펠송이 70년대의 가스펠 송으로 멈춰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젊은이들에 대해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으면 그들도 좋아야 되고, 내가 싫으면 그들도 싫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매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거 해라!’ 명령하지 말고 왜 그런지를 얘기해 주십시오. 나도 삶의 지표로 삼고 싶습니다. 삶의 어떤 레퍼런스로 삼고 싶습니다.’ 하는데, 교회가 설명은 안 해주고 ‘아이, 그냥 알아서 해. 알아서 그냥 따라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찬양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고, 예배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굴곡진 그런 것 말고요. 신앙은 자기 마음의 회개입니다. ‘하나님, 평소에 내 마음을 아시니 내 마음을 인도하시고, 내 마음을 지배하시고, 내 마음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내 마음이 나까지 구원합니다.
‘내 마음 다해~ 주 이름 찬양해~ 내 안에 힘이 되신 주~’ 하는 가스펠송이 있는데, 그 가사가 시편 150편, 149편에 다 근거가 된 내용이었습니다. 가사를 거기서 갖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천년 넘게 부른 것입니다. 그 시를 곡조만 다른 곡조로 해서. 어디선가 어느 부족이 어느 시대에 불렀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외치며, 은혜에 푹 젖어서 자기들의 구주가 그들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도 그들을 행복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말 많이 오셔서 참여해 주시고, 연령대를 불문하고 노력하고 하는 것 감사해요. 바로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해 드리려고 오늘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의 형식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형식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입니다. 우리의 형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데에 보람을 느끼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원하기를 잘했구나.’ 우리 모두가 구원받은 자로서의 본분이, 마음의 본분이 다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찬양할 때 이런 부분을 생각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예배는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질서를 지키고, 어떤 예의를 갖추고 이런 것을 다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말씀드렸습니다. 본질은 우리가 ‘예배 드린다. 찬양하자.’ 할 때 긴장해서 겨우 입만 움직여 찬양하는 모습은 맞지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맨 앞에서 저 뒤에 있는 성도 끝까지 “찬양하자.” 그러면 다들 꼿꼿이 서서 경직된 모습으로 찬양합니다. 찬양은 그런 것이 아닌데. 우리가 단체적인 본분으로서, 단체의 차원에서 하는 거고 개인들이 다 기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형제 자매, 내 교회가 찬양할 때에 나는 교회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찬양하고 있다면, 내가 이 노래를 부른다, 안 부른다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이들이 노래하고 있고 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들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작업이 뭡니까?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이해하신 분은 ‘아멘’하시기 바라겠습니다. 마음으로 찬양하실 분은 ‘아멘’하시기 바라겠습니다. 마음으로 얘기하실 분은 ‘아멘’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 미래에는, 우리 앞에는 형식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과 은혜에 대한 진정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로 가득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있을 많은 일들을 고민하고, 착실히 대책을 세워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 ‘100프로 오케이.’라는 해결책은 얻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 갑니다.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 찬양 속에 하나님 뵙길 원하고, 우리 예배 속에 하나님 정말 잘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신앙생활을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정말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우리 단체, 우리 연합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우리 성도들을 다 도와주시고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우리 주님, 우리의 머리로 모시고, 주의 몸 된 우리들로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우리 주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우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기에,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에 보람을 느끼실 수 있는 주께 찬양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기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나 만족이 아닌 진정 주님 보시기에 의로운 우리의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20240428 마음의 찬양과 현대 교회(시편 100:1~5)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