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8
원론과 충동한 효심
개혁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을 국장도감 도제조(國葬都監都提調)에 명하고 호조판서 정역과 전 유후 권진,
공조참판 이천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청평부원군 이백강, 판좌군도총제부사 박자청, 전 부윤 서선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임명했다.
“이번 대비의 병환에 부처에게 빌어 살기를 구함이 지극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또 내 성미가 불도를
좋아하지 않는고로 칠재(七齋)만 시행하고 법석의 회(會)는 베풀지 말라.
또한 치상은 힘써 진실한 것을 좇고 사치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국가 사무는 병조가 선지(宣旨)를 받아
각조(各曹)에 내려 시행케 하라.”
태종이 대비의 국장 지침을 내려 주고 병조참의 윤회를 불러 세종에게 전지했다.
“능침(陵寢) 곁에 중의 집(僧舍)을 세우는 것은 고려 태조로부터 시작되어 아조(我朝)에서도 개경사와
연경사가 있다. 이제 대비 능침에도 중의 집을 지을 것인지 그 가부를 의정부와 예조에 문의하여 만일
창건함이 마땅하다고 하거든 그 이유를 묻고, 불가하다고 하거든 그 불가한 이유를 물어라.
그러나 나는 절을 짓지 않고 법석(法席)의 회(會)도 개설하지 아니하여 이후로부터 이를 법으로 세우려 한다.”
권력과 유착하여 타락한 불교가 고려 망국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규정한 태종 이방원이다.
부패한 고려를 뒤엎기 위하여 혁명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이방원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배불(排佛) 의지가 강렬했다.
아들 세종의 간절한 소망
“불씨(佛氏)의 거짓은 소자도 알지 못함이 아니옵니다. 다만 대비를 능소에 모신 후에 빈 골짜기가 쓸쓸할 것
같아 절집을 세우고자 합니다.
곁에 정사(精舍)를 짓고 깨끗한 중을 불러 두면 서로 위로하는 도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사를 짓지 말라 하심은 소자가 차마 못 견디는 바입니다.”
세종이 절집 짓기를 간청했고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이 개경사와 연경사의 예를 들어 세종의 의견에
동조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 개경사가 있고 신의왕후 한씨의 후릉에 연경사가 있었다.
“불도의 그 심오한 뜻은 신이 감히 알지 못하오나 이전에 신이 애비 죽고, 어미 죽고, 자식이 죽사오매,
병들었을 때마다 성심으로 기도하였으나 그 효험이 없었습니다. 대비의 병환 중에 주상께서 지성으로 치성과
법석을 드렸는데 효험이 없고 응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일도 이와 같아온 즉, 절을 세워서 명복을 구한다는 것은 당치않사오니 절을 세우지 마시어 만세의
법을 삼게 하소서.”
영의정 유정현이 반대했다.
“내가 주상의 ‘빈 골짜기가 쓸쓸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그 말의 깊이에 눈물이 나온다.
허나, 산릉은 내가 백세 후에 들어 갈 땅이다, 비록 깨끗한 중을 불러 모아도 뒤에 늘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운 중의 무리가 내 곁에 가깝게 있게 된다면 내 마음에 편하겠느냐?
건원릉과 제릉에 절을 세운 것은 태조의 뜻이었다. 나는 법을 세워 후사(後嗣)에 보일 것이니 만세 후에 자손이
좇고 안 좇는 것은 저희에게 있다. 절을 두지 말라.”
“절을 두려는 것은 불도를 좋아함이 아니옵니다. 건원릉과 제릉에도 다 있고 명나라 금상황제도 태조 고황제(
高皇帝)를 위하여 보은사를 세웠으며 모든 사대부가 그 부모를 위하여 재사(齋舍)를 두는데 만일 대비 능에
절을 두지 않으면 깊이 유한(遺恨)이 될 것이옵니다.”
박은과 이원이 주청했다.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정의 신료들이 충돌한 것이다.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론자와 효심은 유교의 덕목이라는 명분파가 부딪친 것이다.
“대비께서 평소에 성녕을 위하여 승당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소자가 불효하게도 ‘국모(國母)께옵서 불도를
믿고 절을 창건하시는 것이 불가하옵니다’ 하였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효자는 그 어버이가 죽어도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니 비록 불도를 믿지 않더라도 어찌 감히
모후(母后)가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배불정책과 아들의 효심이 충돌했다
세종의 효심은 간절했다. 세종의 지극한 정성에 유정현이 돌아섰다.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예조판서 허조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보은사를 설치한 것은 고황제를 위함이 아니옵고 고려의 90여 능에 절을 둔 것이 다만 세 능뿐이었습니다.
상왕 만세 후에는 반드시 태종이 되실 것이온 즉, 태종의 원묘에는 아니 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마땅히 궁 동편에 정사(精舍)를 세울 것을 윤허하여 주소서.”
건국28년.
태종은 창업과 함께 강력하게 추진해왔던 척불정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들의 도성 출입금지. 사찰의 통폐합. 사찰이 과다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 환수. 산중 권력으로 군림했던
회암사의 축소.
이러한 조치들이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았고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도덕성이 뿌리를 내리는 데 일조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불교는 내세를 믿는다. 유교는 충(忠), 효(孝), 신(信), 의(義) 등 현실세계의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태종은 철저한 성리학적 관점에서 내세를 믿는 불교를 배척했으나 유교의 덕목 효와 중첩된 것이다.
창업의 명분이었던 국가 기조가 대비의 훙(薨)으로 말미암아 기로에 선 것이다.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야 하는가? 수정해야 하는가? 태종의 원론과 세종의 효심이 충돌한 것이다.
“주상이 산릉에 절을 설치코자 하나 불법(佛法)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다, 나로 하여금 이 능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절을 짓는 것도 가하나, 만일 내가 이 능에 들어가게 할 터라면 절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태종의 뜻은 단호했다.
능침사찰은 창건이든 중창이든 세종대의 신륵사를 비롯하여 세조의 봉원사, 성종의 봉은사, 선조의 흥국사,
정조의 용주사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능침사찰은 신앙이라기보다 유교의 효심과 불교의 기복신앙이 융합한 결과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능실의 방석(傍石)과 개석(蓋石)을 전석으로 쓰려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워 백성에게 해가 되고 죽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전석(全石)을 쓰지 말라.”
절집 문제에 단안을 내린 태종이 능실에 쓰는 석재(石材)에도 지침을 내렸다.
국장 석실은 영조척으로 가로 214cm(7尺) 세로 245cm(8尺) 깊이 337cm(11尺)에 이르며 두께 76cm(2,5尺)의
전석을 사용했다. 전석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경한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에 이보다 더 큰 개석이 덮였다. 이 모든 돌을 한 장짜리로 고집하지 말고 경우에 따라서는 2장 이상으로
쓰라는 것이다.
“전석(全石)을 쓰지 않으면 편리하기는 하나 두세 조각으로 쓰는 것이 전석으로 쓰는 것과 같이 견고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구례(舊例)도 아니니 지극히 민망할 따름이옵니다.”
세종이 전석 사용을 간청했다.
“전석을 사용하면 돌이 넓고 커서 운반하기가 곤란하여 혹여 군사들이 다쳐 죽을까 염려한 것이다.
옛글에는 석실이란 글만 있었고 전석(全石)을 쓰라는 예문은 없었으니 비록 쪼개어 둘로 만들어도 튼튼하기가
전석과 다름이 없을 터이니 주상은 염려할 것이 없다.”
단호하게 엄명한 태종이 지병조사(知兵曹事) 곽존중을 앞세워 안암골 석산을 찾았다. 채석장에는 석공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산릉에 쓸 돌을 다듬고 있었다.
전석을 발견한 태종이 석공을 시켜 철퇴를 내려치도록 했다. 커더란 덩치의 전석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 때 세종이 보낸 지신사 원숙이 달려왔다.
“지신사가 오는 것으로 이미 주상의 뜻을 알았다. 돌아가서 전석이 두 조각났다고 아뢰어라.”
창덕궁으로 돌아온 태종이 예조판서 허조를 불렀다.
“석실을 전석(全石)으로 사용하다가는 큰 폐단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석공들에게 계(啓)하지 아니하였던가?
법을 세우지 아니하면 뒷사람들이 무엇을 본받을 것이냐? 오늘 명한 일을 헌릉의 형지안(形止案)에 법으로
기록하여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모두 다 이 법을 따르게 하라.”
“전석의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산릉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감히 계하지 못하였나이다.”
“내가 이번 국장에 두어 가지 법을 세웠노라. 능 옆에 절(寺)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과 법석(法席)을 개혁시킨
것이며 전석을 쪼개서 두 개로 하는 일이다.”
창덕궁을 나선 대여가 마전도(麻田渡)에 임시 가설한 배다리(舟橋)를 건넜다. 마전도는 송파나루터다.
대모산에 도착한 대비는 깊이 439cm(13척 3촌)의 천광(穿壙-관을 묻을 구덩이)에 묻히고 흙이 뿌려졌다.
영광과 슬픔의 생을 살다 간 한 여인이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음. 209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