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이 나오면
정덕재
절반쯤 감긴 눈으로 치약을 짠다
군대에서 장기수 복역 같은 근무 중에
어느 날 아들은
치약을 짜는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고 했다
급하게 이를 닦고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안 하는 학생은 학교에 간다
이를 닦고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은 공장에 간다
바쁜 사람은 사무실에서 이를 닦고 출장을 간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천천히 이를 닦고
같은 길을 세 번 왕복하는 산책을 한다
아침에 치약을 짜도
저녁에 이를 닦아도
절반쯤 감옥에서는 걸어갈 길이 없다
외로움은
혼자라서 오는 게 아니라
갈 길이 막힌
절벽처럼 다가오는 법
밖으로 나오는 치약은 외롭지 않다
외나무다리 칫솔 위로 미끄러지듯 누군가 걸어 나온다
치약이 세상에 나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마중을 간다
기둥에 부딪힌 관계
영화 더 디그를 보고 난 이후
여주인공 캐리 멀리건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구글에서 사진을 골라
컴퓨터 모니터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바람에 날리는 단발머리는
들판에서 흔들리는 마른 풀
한 번 만난 뒤
여러 번 밥을 먹고 술을 마셨던 인상으로 중첩된다
밥집은 사라진 지 20년
술집은 열 번 넘게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술에 취해 부딪혔을 그때 그 기둥 하나
어루더듬어도 건조해진 지문에
낙서 하나 찾기 어렵다
처음 본 캐리 멀리건이
도마동 어느 초등학교 후문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면
부사동인지 대사동인지 늘 헷갈리는
여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면
분명 그녀와 나는
기둥에 여러 번 부딪힌
이상한 구조의 술집을 기억할 것이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그녀 곁으로 모여든
여러 개이 파일은 일렬종대 기둥으로 세워져
약속을 암시하는
32년 전의 암호를 만든다
캐리 멀리건이 아니어도 괜찮고 김미정이어도 괜찮다
― 정덕재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 2021)
정덕재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정치 풍자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청소년 시집 『나는 고딩 아빠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