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당당하다. 떠났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처럼 마음을 낮춘다. 입혀 주신 옷으로 빛난다. 새롭게 주신 삶을 누린다. 삶으로 선포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알지도 못한 사람을 믿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알아가면서 믿음이 생긴다. 순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우리가 아들이어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먼저 아들이다. 다만 아버지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 아들이다.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셨다. 그분은 네 아빠시다. 네 아버지시다. 너는 그분의 아들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순서다. 내가 믿어서 아들이 된 것인가? 아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아들인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먼저 택하심이 있었다. 그다음에 성령님이 오셨다. 하나님과 내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것을 알게 하셨다. 이 앎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다. 믿어서 부자관계가 된 것이 아니다. 부자관계인 것을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이 앎이 먼저요, 믿음이 따라왔다.
이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온다. ‘내가’ 믿은 것이 아버지와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안다. '내가' 믿어서 구원을 가져온 것으로 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성령께서 알게 하신 그 아버지는 누구신가? 지난날의 경험으로 안 육신의 아버지와 닮으셨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분이신가? 가정 안에서의 불완전한 아버지에 대한 경험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같지 않다. 그 아버지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큰 오해가 없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끊임없이 사랑하시고(요일 4:19)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아버지시다. 아끼는 것이 없으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는 아들이요, 상속자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 아버지를 힘써 아는 것이 모든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온 오해를 바로잡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