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의 역사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히틀러가 탄생시킨 ‘비틀’에서부터 폴크스바겐의 역사는 시작된다. '소형차의 명문'으로 자리잡아온 폴크스바겐은 98년 롤즈로이스와 람보르니기를 사들여 최고급 세단과 수퍼카까지 거느린 유럽 제일의 메이커로 떠올랐다. 폴크스바겐는 2001년부터 대형차 부분에서도 진출할 예정이다 , 또 같은 플랫폼으로 여러 차종을 만들어 생산단가를 줄이는 등 21세기를 위한 장기전략을 세우고 있다.
1998년 5월 7일, 전 유럽 자동차 메이커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BMW의 롤즈로이스 인수가 굳어질 무렵, 폴크스바겐이 BMW의 5억6천800만 달러보다 훨씬 높은 6억9천만 달러(약 7천728억 원)를 제시해 롤즈로이스를 가로챈 것이다. 이로써 폴크스바겐은 소형차뿐만 아니라 중형차(아우디), 초호화 세단(롤즈로이스)을 아우르는 대메이커의 위치를 탄탄하게 다지게 되었다(단, 롤즈로이스 상표권은 2005년부터 BMW로 넘어간다). 이보다 두 달 전에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아들 소유였던 이태리 람보르기니까지 손에 넣어 ‘수퍼카’까지 자사 카탈로그에 올리고 있다. 최근 유럽 최고의 뉴스 메이커로 불리우고 있다.
폴크스바겐의 역사는 1930년 독일 남부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타입8 반더러(Wanderer)’를 완성하면서 시작되었다. 폴크스바겐은 1930년대 나치스정권의 자동차 대중화 정책에 따라 1938년 설립되었다. 그는 독일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겠다고 큰 소리 쳤으며, 독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동차 전용 고속 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고속 도로 건설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장장 1,600km에 이르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인기를 모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이 아우토반 위를 달릴, 전 국민의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마음에 꼭 맞는 차를 만들 사람은 자동차 설계의 대가 포르쉐 박사밖에 없었다.
당시 포르쉐박사는 다임러 벤츠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설계 사무실릉 차렸을 무렵으로 독일의 실제적인 통치자였던 히틀러는 모든 국민이 자가용을 갖게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 수 있는 차, 연료 1X로 14.5km 이상을 달릴 수 있으며 정비가 쉬운 차 그리고 값은 1천 마르크 이하인 차"를 설계해 달라고 주문했다.
포르쉐는 히틀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오백 마르크는 될 겁니다. 그보다 더 싼 자동차를 만들기는 힘듭니다." "포르쉐 박사, 그건 당신이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만들기만 하시오, 차값은 내가 정합니다."
그 말은 들은 포르쉐는 가슴이 뛰었다. 평범한 국민들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값싼 소형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포르쉐의 오랜 꿈이 아니었던가!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딱정벌레 모양의 괴상한 차를 본 히틀러는 머리를 갸우뚱했으나, 70일 간의 성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자 매우 흡족해했다.
이렇게 해서 1934년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고 공장까지 지어졌다.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히틀러는 새 국민차에 ‘카데프’(KDF, Kraft der Freude의 머리글자, 기쁨의 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초의 폴크스바겐은 히틀러가 말했던 1천 마르크보다 100마르크가 더 싼 900마르크 였다. 100km를 달리는 데 기름은 겨우 7리터밖에 들지 않았으며, 다섯 사람이 탈 수 있는 조그만 세단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이 딱정벌레 차를 갖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냥 주는 것은 아니고, 폴크스바겐 우표를 발행해서 그 우표를 900마르크 어치를 사 모은 사람에게 폴크스바겐 한 대를 준다는 것이었다. "오토바이 값으로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그건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폴크스바겐 우표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 33만대의 판매예약까지 받았다. 하지만 폴크스바겐에 걸었던 사람들의 꿈은, 1939년 히틀러가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국민들에게 우표를 팔아 긁어모은 돈은 모조리 전쟁 준비에 들어갔고, 폴크스바겐 공장은 군수 공장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조립중이던 국민차는 급히 군용차로 변경되어 악명 높은 독일군과 나치 친위대를 태우고 전장과 시가지를 누볐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퀴벨바겐과 슈빔바겐 등이 그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의 배려로 공장이 재건되었고 국민차가 굴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 차는 공냉식 수평대향 4기통 1.1X 25마력 엔진을 뒤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방식이었다.
한편, 패전국이 된 독일은 영국, 프랑스, 미국, 구소련등 연합국에게 전쟁 배상금을 물어 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라 안의 돈은 모조리 전쟁 준비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배상금으로 줄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 끝에 독일 정부는 폴크스바겐 공장과 딱정벌레 차를 내놓고 재정적인 어려움음 타개하기위해 미국 메이커와 합병을 원했으나 GM, 포드 등이 이익이 남지 않는다고 외면했다. 폴크스바겐공장은 거의 파괴되어 있은 상태였고, 괴상하게 생긴 딱정벌레차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되자 할 수 없게된 독일국민들 스스로 주린배를 움켜지고 폴크스바겐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5년 연방과 주정부소유의 국영회사로 사업을 재개하였고, 1948년부터는 "비틀(Beetle)"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던 폴크스바겐이 해마다 생산대수를 늘리면서 독일재건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1955년이 되지 주문이 밀려 차가 없어 못 팔 지경이 되었다.
한편 미국시장에도 진출했으나 미국실정에 맞지 않는 너무 작은 차체와 소극적인 판매전략으로 판매부진을 면치 못했다. VW의 초기 한 해 판매대수는 1천 대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5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이 차를 갖고 귀국해 ‘비틀(딱정벌레)’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기 시작하면서 미국시장에서도 인기가 올라가 1959년 유럽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100대 생산을 돌파했다.
비틀의 판매호조에 힘입어 VW은 1969년 아우토 우이온(아우디의 전신)을 손에 넣었고, 이어 1972년에는 1천500만7천34대의 비틀을 생산함으로써 포드 T형의 단일차종 생산기록을 깼다. 비틀의 높은 인기를 이용한 개조모델도 선보였다. 1955년에 나온 카르만 기아가 대표적인 예다. 1961년 VW은 1.5X 엔진을 얹은 VW1500을 내놓았고 65년에는 패스트백 타입의 1600L도 선보였다.
1978년 많은 인기를 모았던 비틀은 아쉬움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때까지 생산된 비틀은 1천900만 대였다. 비틀은 40년간 같은 모양을 유지했으나 메커니즘과 편의성을 끊임없이 개선해 단종 될 때는 초기모델과 똑같은 것이 단 한가지도 없었다. 계속된 품질개선이 인기요인이었던 것이다.
비틀이 단종되자 독일에서는 차에 검은 리본을 달고 ‘비틀, 너를 영원히 사랑해’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생산재개를 요구한 소동이 일었다고 한다.
구형 비틀은 1998년 뉴 비틀이 나오기까지 브라질에서 계속 생산되었다. 뉴 비틀은 신형 골프 메커니즘을 이용해 만든 앞바퀴굴림차다.
둥근 루프 라인과 오버 펜더가 초대 비틀을 닮았지만 속은 완전히 달라졌다. 엔진 역시 골프에서 가져온 2.0X 115마력과 1.9X 디젤 터보를 얹고 5단 세미 AT와 4단 AT를 쓴다.
VW은 70년대 들어 소비자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타입의 차를 만들었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비틀의 정신을 이르면서도 현대적인 차로 등장한 것이 파사트(1973년)와 골프(1974년)다. 특히 골프는 비틀에 버금가는 큰 인기를 얻으며 VW의 주력차종으로 자리매김했다. VW은 1974년 3월에 시로코, 1975년 폴로, 1977년 데비, 1979년 제타, 1981년 산타나 등 소형차를 차례로 내놓았다.
창립 50주년을 맞는 1988년에는 3세대 파사트와 코라도를 선보였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자동차박물관에는 13만4천여 명의 근로자가 사인한 파사트 설룬이 보관되어 있다. VW은 1982년에 스페인의 세아트(Seat), 1990년 체코의 스코다(Skoda)를 인수해 아우디와 함께 4개의 자동차 메이커를 거느린 유럽 최대의 메이커로 떠올랐다. 현재 멕시코, 브라질, 중국, 스페인, 체코 등에서 10여 개의 공장을 돌리고 있다.
현재 생산되는 모델은 루포와 루포 TDI(3X카, 1X로 30km를 달리는 차), 폴로, 뉴 비틀, 골프IV, 골프 세단인 보라, 골프 카브리오, 파사트, 샤란 등이다. 지난해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선보여 화제를 모았던 초저연비차 루포 TDI는 3기통 1.2X 디젤 터보 인터쿨러 61마력 엔진을 얹고 1X로 33.33km를 달린다.
폴크스바겐은 21세기에도 앞서 나가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짜놓고 있다. 아우디, 세아트, 스코다 등과 플랫폼을 같이 써서 19개 플랫폼을 2001년에는 4개로 줄이고 2002년 19개 모델을 51개로 늘리겠다는 목표가 그것이다. 롤즈로이스와 람보르기니를 갖고 있는 폴크스바겐은 더 이상 ‘소형차의 명문’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VW은 BMW M시리즈와 벤츠 AMG 버전에 대항하는 고성능 버전들도 내놓고 있다. 골프 세단형인 보라의 보디 패널을 경량소재로 바꾸고 V6와 V8 엔진을 얹은 보라 RSi가 대표적인 예다. 올해 2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는 4인승 고급 세단 뒤에 짐칸을 단 네바퀴굴림 크로스오버카인 컨셉트카 AAV도 선보였다. 이 차의 디자인은 2002년 발표를 목표로 포르쉐와 공동개발중인 SUV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폴크스바겐의 공격적인 경영은 현재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저돌적인 개혁을 해나가고 있는 인물은 93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피에히 회장이다.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인 그는 포르쉐 911 개발에 관여했던 일류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피에히가 이끄는 한 폴크스바겐에는 후퇴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