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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tter come from Nepal Pokhra #29
탕돈겔뽀의 생애,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티베트 연극의 또 다른 지평을 연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연극의 신’또는 ‘백발의 다리 도사님’으로 불리는 탕돈겔뽀(1385~1464)[6] 라는 승려이다. 그의 별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를 빼고는 티베트의 연극을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설역 연극사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는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우뚝하다.
가혹한 기후조건과 척박한 토양에서 살면서도 선천적으로 놀이를 좋아하는 이 민족의 특성상 춤과 노래와 연기 그리고 가면극이 하나로 합쳐진 연극이란 장르는 일찍부터 자생적 발생되어 점차로 발전되며 내려왔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도 7세기, 투뵈 제국 제38대 임금 치송데쩬 시기 건립된 쌈예 대사원의 준공 경축 행사 때 춤과 굿과 가면무 등이 공연되었을 정도로 티베트 연극의 연원은 아주 오래 되었다. 이런 사실은 사서들의 기록이나[7] 벽화로 남아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지만, 중요한 것은 단지 오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티베트 민중의 가슴 속에 얼마나 생생히 살아있느냐는 것이다. 연극은 그들의 놀이문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어서 서민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문화보다도 비중이 훨씬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의 현수교 다리>
물론 탕돈 이전에도 간단한 형식의 전통적인 연극은 이미 민초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을 불교적으로 각색하여 더욱 완성도를 높여 일반화시킨 작업은 바로 그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그는 <티베트 연극의 神>으로 추앙되어 소상(塑像)으로, 벽화로, 또는 탱화로[8] 그려져서 부처님과 나란히 공양대접을 받을 정도로 민중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 다리 도사,탕돈겔뽀 탕카>
그럼 이런 업적을 남긴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의 일생은 과연 어떠했을까? 참 여기서 독자들에게 먼저 이해를 구할 일이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짧은 사족을 붙여야겠다는 것이다. 실은 나는 이 흥미로운 인물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줄곧 어떤 노래를 흥얼거렸다. 때로는 낡은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가면서 입으로 따라 부르며 손으로는 이 글을 썼다. 어찌 보면 그 노래가 이 글의 테마송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그 노래는 바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bled water)>이었다. 이제는 이미 팝음악의 고전이 되었기에 요즘 신세대들에겐 낮이 선 것일지도 몰라도 70년대에 십대, 이십대를 보낸, 현재 중장년층이라면 너무나 귀에 익은 곡이어서 별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노래는 바로 불세출의 2인조 남성듀엣인 영국 출신의 유명한 싸이먼&가펀클(P.Simon & Garfunkel)이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유명한 노래이기 때문이니까.
이들 듀엣은 절대화음을 구사하는 것으로 팝음악의 이 부분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뭐랄까 다분히 철학적이라고나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당시 월남전으로 인한 반전운동의 한가운데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듀엣이었다. <험한 세상...> 말고도 <스카보로의 추억>․, <엘콘도로파사>, <미세스 로빈슨> 등도 역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여 우리에게도 널리 불려졌던 것이라는 설명도 역시 사족이 되리라…
그렇다면 독자들은 조금은 궁금해지실 것이다. 도대체 현대의 팝송과 티베트의 ‘연극의 신’이라 불리는 인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 서두를 길게 끌고 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실직고적인 대답은 이렇다. 바로 그의 생애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지닌 메시지와 너무나 닮았다는 점과 그 노랫말이 티베트의 어떤 전설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나도 어떤 연상작용 때문에 문득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는지는 애매하지만, 하여간 어느 날부터 갑자기 조금씩 이 의아함은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설마 하면서 도대체 티베트 연극의 원조와 현대 팝가수의 노래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라는 자문자답을 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의문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날이 갈수록 더욱 무거워져 마치 무슨 큰 화두처럼 무겁게 가슴 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래서 급기야는 낡은 팝송책을 꺼내 들고 가물가물하던 가사를 다시 음미해보면서 한편으로는 일생을 다리를 놓는데 바친 이 유명한‘다리도사님’의 일생을 다시 음미해보았다. 그럼 우선 기억을 되살려, 이 노래를 불러보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하자.
『당신이 의기소침해 하거나 당신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일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의 곁에 있으리라.
고난이 몰아쳐 찾는 친구도 없을 때 거센 물을 건너는 다리처럼 나를 바치리라.<중략> 험한 세상을 건너는 다리처럼』
나는 그 한 단어를 바로‘화신교(化身橋)’라 하겠다.
아, ‘화신교’! 인간의 몸을 눕혀야만 건널 수 있는 다리! 그냥 전설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다리. 이 풍진 이쪽 세상에서, 열반(涅槃,Nirvana)의 피안 저쪽으로 넘어 갈 수 있는 다리. 이 노래는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바로 맑은 영혼의 다리이고 대승보살의 다리였다. 이 노래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옛날에 어느 골짜기에 있는 암자에 스승과 어린 제자 수행자가 살았는데 하루는 큰 비가 내려 암자가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 급히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험한 계곡을 건너기 전에는 안전한 곳이 없었기에 다리가 꼭 필요하였지만 외나무다리는 이미 떠내려가고 없었다. 위험은 시시각각 닥쳐오는데 별 대책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스승이 제자만이라도 살릴 결심을 하고 계곡 사이에 솟아 있는 바위 위로 자기가 잠시 엎드려 있을 터이니 그 때 자기를 밟고 건너 뛰어 가라는 것이었지만, 제자가 선 듯 그 제안을 승낙할리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기에 마침내 둘은 눈물로 이별을 하고 스승이 임시 다리가 되어 누워있는 사이 제자는 스승을 밟고 건너 갈 수 있었다. 제자가 저쪽 편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다보니 스승은 이미 거센 물결에 떠내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살아난 제자가 죄책감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며칠 동안 울기만 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스승의 깊은 뜻인 것을. 제자는 마음을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가 며칠 뒤 물이 빠지자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암자를 다시 세우고 수행을 열심히 하여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전설이 아닌가?
사실 우리 주위에서 어떤 단어의 의미가 변질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많지만 보살(菩薩, Bhodhisattva)[9]이란 말처럼 통속화 된 것도 드물다. 절에 다니는 여인들을 대개 우리는 보살이라 칭하지만 절에 다닌다고 그들이 모두 보살은 아니다. 피나는 수행 끝에 대오하여 붓다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데도 미욱한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이 고해 같은 사바세계에 남아 있으면 다시 태어나 윤회를 되풀이하면서 그를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사람이 바로 보살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불경 속에서 살신공덕으로 붓다의 경지에 오른 많은 전생담(前生談, Jataka)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보다도 가까이에도 그 실례는 있다. 달라이 라마는 한 영혼을 가지고 벌써 여러 번이나 다시 태어나서 중생구제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보살이고, 그런 보살만이 화신교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예는 자기희생과 아가페적 사랑을 강조하는 대승철학의 상직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어느 특수한 경우는 정말로 이런 조건 없는 희생이 치러진 사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도 탕돈겔뽀의 경우도 그랬다고 한다.
그의 제자 아리빠가 다리를 놓는 과정에서 급류에 떠내려가 죽는 사건이 있다고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치 우리의 에밀레종의 전설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이 다리도사님이 다리를 놓을 때 양안을 이을 쇠사슬을 만들어야 했는데, 다리를 지탱할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쇠사슬이 자꾸 끊어져 공사가 난관에 빠졌다. 그때 꿈에 어떤 천신이 나타나서 어린 아이의 팔을 쇳물에 넣어 끓이면 가능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다음 날 정말 신탁대로 8세 어린이가 나타나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스스로 팔을 잘라 쇳물에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단단한 쇠사슬이 만들어져 다리는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물론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찌되었던 지극한 정성과 조건 없는 희생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설화임에는 틀림없다.
탕돈겔뽀가 <험한 세상의 다리> 라는 노래의 주인공일 수 있다는 가설은 다음 장에서 풀이해보기로 하고 우선은 이 노래 가사를 티베트불교 이론으로 해석해보기로 하자. 물론 이것들은 대승불교의 전문 이론인 사성제(四聖啼)나 12연기법(緣起法)을 동원하여 풀 수는 있겠지만 그런 난해한 이론의 전개는 뭐 불교교리서가 아닌 이 글에서는 별 의미가 없기에 최소한의 상식적인 비유법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보기로 하자.
“당신이 의기소침 할 때나, 당신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일 때”는 요새말로 스트레스 받거나 슬플 때이니 이는 “인생자체가 고해(苦海)”라는 비유라 할 수 있고“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 곁에 있으리라.”는 대승보살의 자비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고난이 몰아쳐 찾는 친구도 없을 때”는 고해 속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있는 우리 인생살이를 비유한 것이고“ 다리 되어 나를 눕히리.”라는 구절은 바로 내 자신이 다리가 되어 남을 건너게 하리라는 대승보살의 의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어찌 보면 억지춘향 격이고 아전인수 식일 수 있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자체만은 누구도 부인치 못하리라 …
특히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히리.”라는 부분은 바로 대승의 핵심철학이며 또한 티베트 전설 속의 ‘화신교’를 직접 의미하고 있어서 의미심장함을 더하고 있다.
티베트를 포함해 우리 해동이나 중국, 일본의 불교는 북방불교 또는 대승불교라 부르고 있다. 마하야나(Mahayana)의 진수는 자기 혼자만의 해탈에 있지 않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 주고 남을 해탈하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혼자 깨달아 삼계윤회를 벗어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이런 이타행(利他行)을 생활철학으로 가져야하는 것이 대승불교도가 걸어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참된 이타행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완성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자기완성을 위해서도 이타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어, 마침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불교’로서의 보살도가 ‘스스로가 구원받는 불교’로 무의식중에 변질되어 대승이 어느 사이엔가 소승적인 자세로 되돌아간 셈이 되어 버리지나 않았는지?[11]
티베트 불교의 지향점은 혼자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지 않고 한 영혼을 가지고 수없이 윤회하면서 전생에서 못 다한 원력을 성취하려데 있다. 이 점이 바로 세계가 티베트 불교를 주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라는 이 노래, 특히 마지막 구절인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히리.”라는 부분은 불교철학의 패러다임에 물들지 않은, 서양노래 가사라고 보기에는 정말로 믿기지 않을 만큼 의미심장한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바로 이 구절은 바로 대승철학의 진수를 요약한 말이고 또한 티베트 전설 속의 ‘화신교(化身橋)’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의아심을 지나 경탄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하기야, 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활력소인, 인간의 따듯한 마음이야 어디 서양이 다르고 동양이 다르랴!
자 각설하고 이제부터 또 하나의 연결고리, 즉 이 노래의 주인공이 탕돈겔뽀 처럼 보인다는 그 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의 자취를 따라 우리도 설역으로 날아가 ‘쇼뙨’의 놀이마당으로 들어가 보자.
‘백발의 다리도사’라고 알려진 그는 상빠-까귀파의[12] 고승이다. 그는 법명 보다는‘자상빠 족뚜’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자쌍빠’란 ‘철교활불(鐵橋活佛)’을, ‘족뚜’[13]는 요가수행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철교를 놓은 밀교고승”을 의미한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연극이 공연되는 뒤편 무대 막으로 거는 대형 걸개용 탕카[14]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는 대개 하얀 수염을 한 신선 같은 노인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미 전설적 인물로 승화되어있기에 그의 전기는 대부분 과장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그는 모친 뱃속에서 60년을 살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 이미 백발이었다고 하는 식이다. 이는 그가 120세 까지 살았다는 전설에서 기인하지만, 실제로도 젊을 때부터 눈썹, 수염, 머리털이 모두 하얀색이었다고 한다. 그의 연보를 정리해보면 80세 까지 산 것은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평균수명보다 두세 배 오래 산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전설화는 그의 생존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서부 티베트로의 갈림길인 라쩨 인근의 충․리오치 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5세 때 벌써 양을 잘 몰고 다녔기에 유능한 목동으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 유년시절의 일화 또한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여기서 그것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생략하고, 다시 그의 연보를 대충 훑어보자. 어른이 되어 한 때 일년 동안 군인이 되었다가 후에는 부친을 따라 장삿길에 나섰지만 성품이 착한 그는 지방귀족의 모함에 빠진 동료를 구하느라 장사밑천을 몽땅 날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부친의 구박이 자심하자 보다 못한 모친이 권해서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창딩 사원이란 곳으로 가서 니마쌍게라는 스승 아래서 불법을 비롯한 의술, 공예 등의 다방면의 학문을 열심히 닦았는데, 당시는 이렇게 승단보다는 한 스승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상빠파’를 비롯한 밀교종파의 특성이었다. 이렇게 출가사문으로서의 기초를 익힌 그는 당시 전통대로 스승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이른바 만행(萬行)을 하게 된다. 일부 전기에는 그가 이 시기에 네팔과 인도까지 가서 딴트라수행법을 배웠다고 하나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하여간 이 시기에 그는 피나는 수행을 하여 마침내 ‘한 소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오(大悟) 때의 일화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가 어느 날 선정삼매에 빠져 있는데 문득 하늘에서 4명의 천녀들이 내려와 그의 주위를 돌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광대무변한 초원, 큰 언덕에서,
한 밀교 수행자가 공성(空性)을 깨달았네.
마치 위대한 왕이 언덕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대는 ‘탕돈겔뽀’란 이름을 얻었네.』
이 게송(偈頌)은 그의 이름의 운자(韻字)풀이로써, 큰 언덕은 ‘탕’자, 공성은 ‘동’자, 위대한 왕은‘걀뽀’가 되어 “큰 언덕위에서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인물”이란 뜻으로, 후에 그의 법명을 암시한 것이다. 이후로도 그의 광야를 헤매는 두타행(頭陀行)은 계속되었는데, 험준한 산악지방이 많은 설역의 특성상 그도 당연히 다리가 없는 깊은 계곡을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야만 했다. 그런 불편을 겪을 때나, 어떤 때는 무리하게 시냇물을 건너다가 사람이 떠내려가는 참사를 그의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하면서 그의 가슴 속에는 하나의 원력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일생을 다리를 세우는 일에 바치기로 한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한 대승보살로써의 자아의식이 눈을 뗬다고 보여 지는 대목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이 중생을 위해 복을 지을 때, 심한 번뇌와 슬픈 상처 그리고 게으름을 모두 재난으로 여겨 마치 듣기 좋은 춤과 노래처럼 말로써 위로해준다. 그리고 산 속에서 들짐승처럼 거주하고, 동굴 속에서 마치 들쥐들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중생을 위해 복을 지을 때 마땅히 몸으로써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입으로 중노릇하지 말고 몸으로 중노릇 하라”는 고언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이 법문은 마치 탕돈걀뽀의 양심선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대목이어서 눈길을 끈다.
하여간 그로부터 그는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이 사업에 길고 긴 평생을 매달려 대승보살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 그렇게 하여 평생 총 120여개의 나무다리를, 58개의 큰 쇠사슬다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20여개는 존재가 확인 되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도 3개나 된다고 한다.
1430년에 그가 처음 만든 다리는 라싸 근교의 츄술[15] 근방에 있었다. 이 다리는 강물 속에는 교각이 없고 양쪽 기슭에서 굵은 쇠사슬로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발판을 깔아 다리무게를 지탱하는 일종의 조교(弔橋, Suspended Brige)였다고 하는데, 실패작이어서 곧 끊어졌지만 연구와 실패를 거듭하여 마침내 여인들의 목걸이에 착안하여 쇠사슬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여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게 되었다 한다.
무슨 일을 하던지 금전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고금을 통해 마찬가지였던지 다리를 놓아야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이 다리 도사님도 무한정 들어가는 돈을 소규모의 개인적 보시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지 한 가지 방법을 구상해 내었다. 그 인연의 출발은 바로 산남지방의 고도(古都) 총게의 어느 장터에서 일어났다고 그의 전기들은 하나 같이 그 동기부여를 관음보살의 여성적 화신인 쪼마여신[16]의 안배에 의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적고 있다.
어느 날 탕돈걀뽀가 장터를 거닐고 있었는데, 수많은 인파가 모인 곳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헤치고 들여다보니 놀이마당이 벌어진 가운데 아름다운 여자들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있었는데, 한판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열광하며 푼돈을 수북이 던지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탕돈걀뽀는 간밤의 꿈이 문득 생각났다. 민족의 수호신이며 자비의 화신인 쪼마 여신이 오색 무지개 빛깔의 선녀 옷을 입고 나타나 춤을 추는 꿈이었다. 이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저녁 때 그녀들의 숙소를 찾아가 그의 신분을 밝히고 그녀들의 출신내력을 묻고는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원래 유랑극단의 피를 이은, 한 가족인 7자매[17]였는데, 가난이 죄가 되어 부모들과 같이 밥벌이를 나선 참이었다. 그러나 백발의 유명한 라마승이 중생을 위해 함께 좋은 일을 하자는 말에 크게 발심하여 즉석에서 유랑극단의 고문역으로 그를 맞아 들였다.
원래 다재다능한 탕돈걀뽀는 이 유랑극단의 특성을 잘 응용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단순한 연극이나 가면극의 대본을 좀더 불교적으로 채색하고 또한 줄거리도 흥미롭게 보강하고 복장 같은 것도 여인들에게는 오색 무지개 빛깔의‘라모-선녀’옷을 입혀서 선녀처럼 아름답게 꾸몄다. 말하자면 재래식 놀이를 한 차원 높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는 산남지방에 산재한 귀족들의 장원들과 크고 작은 사원들, 그리고 전국의 장터를 찾아다니며 공연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는 의외로 대성공이었다.
12세기 중엽, 당시 티베트의 정세는 원나라의 무력을 등에 업고 2백년간 설역을 지배하던 싸갸파의 뒤를 이어 씨족종단인 팍모둑파가 내탕지방을[18] 본거지로 하여 전국으로 세력을 펼쳐나가던 시기였기에 고대 토번왕조의 도읍지였던 총게나 신흥도시 내탕이 속해있는 얄룽짱뽀강 남쪽 강기슭으로 펼쳐진 산남지방은 새로운 분위가 감돌고 있었다. 또한 세력 있는 귀족들도 대거 모여 있어서 그들 대장원의 곡간에는 재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도 탕돈걀뽀라는 인물의 탄생을 돕고 있었다. 다리를 놓는 일은 누구에게나 시급한 사화간접자본이기에 파크모주 종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교적으로 새로 각색된 감동적인 연극 스토리에 취한 관객들은 앞 다투어 보시금을 내 놓았다. 더구나 아름다운 여자가 대거 출연하는, 새로운 대형극단의 떠들썩한 분위기 탓에 그 효과는 더욱 클 수밖에 없어서 막대한 자금력을 필요로 하는 다리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다리에‘답교(踏橋)놀이’라는 일종의 개통식도 함께 곁들여서 시주금을 낸 귀족들과 원근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또 한번 놀이마당 한판이 질펀하게 벌어졌다. 나팔, 징, 꽹과리, 북 등을 앞세워 다리를 밟는 이 의식은 우리의 그것과 여러모로 비슷하여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사족도 함께 곁들인다.
하여간 이렇게 이 다리도사의 유명세는 날로 더해져 전국 각지에서 초청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기에 극단 자체로서도 새로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사원에서 공연되던 벙어리 가면극인 ‘참’춤은 벽사(辟邪)적 의미에 치우쳐 장엄하기는 하지만 놀이로써의 대중성이 모자랐고 또한 전통적인‘라마마니’[19]라는 구연설화체(口演說話體) 공연은 불교적인 소재란 단순성 그리고 입과 귀로만 전달되는 한계성이 있어 역시 놀이문화로써의 중심축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에 탕돈걀뽀에 의해 새롭게 다듬어져 춤, 민요, 기악연주, 구연설화, 가면극, 무술, 기예(技藝), 그리고 연극이 한데 어울려진 종합예술적 놀이마당은 상․하류층이냐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던 단순한 연극은 탕돈겔뽀 라는 인물에 의해 양 날개를 달게 되어 설역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고 또한 자신은 후에 <연극의 신>으로 또는 <대장장이 신>으로 추앙되어 신의 반열에 들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졸저, 『티베트 문화산책』(정신세계사, 2004년) 부분발췌>
첫댓글 그야말로 험한세상 다리가 되셨네요ᆞ그노래 가사에 그런 깊은뜻이 ~~
노래와 춤의 힘
역시~ 내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