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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빠짐과 노아의 제단
(8:1-22)
온 세계를 뒤덮은 홍수의 물결에 끝 없이 떠밀려 가고 있던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인류의 첫 문명이 바다에 묻히고, 모든 역사가 난파한 정황 속에서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영원한 제국을 꿈꾸며 폭력으로 사회를 물들이던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던 "사람의 딸들"이 홍수에 휩쓸려 갈 때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수 천, 수 만의 세대들과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갈 때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노아는 처음으로 세계의 종말을 경험하며, 고요한 절망감 가운데 있었을까, 혹은 믿음 가운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노아는 폭풍우와 굼실거리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온 세계의 파멸을 보며 베드로처럼 허무의 심연에 빠지며 허우적거렸을까, 혹은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바다 위를 걸어가는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노 저어가고 있었을까?
1) 전환의 축(8:1 상)
우리는 노아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셨다"라는 말씀을 듣자말자, 하나님의 생각을 갑작스럽게 듣게 된다. 이 미친듯한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셨고, 구체적으로 노아를 생각하셨다. 이 말씀은 홍수 이야기 전체의 전환점이 된다. 하나님의 기억으로 역사는 새롭게 움직인다. 하나님의 마음이 노아를 향해 움직이면서 방주의 방향도 새롭게 움직인다. 구약 성경에서 "기억"은 항상 "행동"을 뜻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하신 이전의 헌신 때문에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항상 의미한다"(B. S. Childs).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은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사 49:14). 그러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5절).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식을 유기하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은 경제적인 이유와 자신의 인생 목표를 위해 자녀들을 쉽게 유기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그녀는 요셉을 낳게 된다(창 30:24).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실 때, "은혜로" 기억하신다(느 5:19; 13:31). 주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실 때 폭풍은 멎었고, 그의 가족 뿐 아니라,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이 구원을 받는다(행 27:24 참조).
2) 물이 줄어 듬(8:1 하-5)
바로 앞 장에서는 물이 계속 불어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으며"(7:17), "물이 많아져 방주가 떠 다녔으며"(7:18), "물이 많아져 산들이 덮였으며"(7:19), "물이 많아져 15규빗이 올라 산들이 덮였다"(7:20). 결과적으로 "생물이 종류별로 다 죽었으며"(7:21), "코로 숨쉬는 생물이 다 죽었으며"(7:22), 다시 "종류별로 다 죽고"(7:23상), "모두 죽었다"(7:23 중). "오직 노아와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다"(7:23 하). 여기에 4중적인 "모두"와 "오직 노아"의 대조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자 말자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고 물이 줄어들게 하신다"(8:1 하). 이것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의 원형을 이루어 준다.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시며(출 2:24), "강한 동풍을 보내어 홍해의 물을 말리셔서, 백성들로 마른 땅을 걷게 하셨다"(14:21-22). 홍수가 끝나고 마른 땅에 발을 디디는 노아의 모습은 이후에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며 죽음을 경험하고 물에서 나와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자 말자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친다"(2절). 하나님께서 비가 그치게 하시니 비가 주님에게 순종한다. 홍수도 해일도 주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노아는 더 기다려야 했다(3절).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그는 150일을 더 기다려야 하였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도 노아처럼 아무 대책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엘리야도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엘리야는 자신의 제자를 "일곱 번이나 갈멜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또 올라가라고 명한다. 그는 "손바닥 만한 조그만 구름을 보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도한다(왕상 19:14).
드디어 홍수가 시작된지 일곱째 달이 되자,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문다(4-5절). 물은 점점 줄어 노아의 나이가 600세 되던 해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그의 눈 앞에 드러났다. 아라랏이란 지명은 후대 앗시리아 시대에 우라르투(Urartu)로 알려진 곳이다(사 37:38; 렘 51:27). 이곳은 거대한 산악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과 터키 동부 지역과 유프라테스의 상류를 이루는 지역과 반 호수(Lake Van)와 우르미야 호수(Lake Urmia)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Youngblood 103). 아마 노아 방주는 북쪽 우라르투 지역보다 남쪽에 안착하였을 것 같다. 현재 지명으로 '아라랏' 산은 러시아 경계지역에 있는 터키의 북동쪽에 있다. 방주가 산에 도착하자 말자, 노아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었을까? 그는 "홍수를 보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람들의 조롱 가운데 방주를 지었고, 이제 노아와 그의 모든 식구들 뿐 아니라, 모든 짐승들까지도 드디어 땅에 도착하였다. 배가 산에 닫는 그 착지감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3) 땅이 말라 감(8:6-14)
그러나 노아는 다시 40일이 더 지나 비로소 방주의 창문을 연다(6절). 앞에서 홍수 직전에 "여호와께서 노아를(방주에) 닫아 넣으셨다"고 말했다(7:18). 따라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문을 열고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창문은 열 수 있었다." 노아는 이제 창문을 열고 방주 밖을 내다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주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8:15-17).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은 아직까지 안전하지만, 완전한 구출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마른 땅을 딛기까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8:14).
노아는 창문을 열고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계속 보낸다. 이것은 방주 안에서 홍수가 끝나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는 노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이 왜 이렇게 빨리 줄어들지 않는가?" 하고 노아는 조급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흙탕의 땅을 함부로 다닐 수가 없다. 드디어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입사귀를 가져왔을 때(10-12절), 노아는 감격하였다. 땅에 새로운 생명의 움이 돋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더 기다린다(10, 12절). 땅이 완전히 마르자,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12절). 홍수기사의 저자는 노아가 정확하게 1년을 방주 안에서 지내며 기다렸다고 한다(7:6, 11; 8:13-14). 얼마나 지루하고 고적한 시간이었을까?
4) 방주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8:15-19)
노아가 601살 된 첫 달 초하룻날에 드디어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13절), 그 다음 달 27일이 땅이 완전히 마른다". 이 때 주님은 1년 동안의 긴 침묵을 비로소 깨뜨리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방주에서 "나가라"고 명하신다(8:15-16). 너무나 모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노아에게 들렸다. 노아는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을까. 주님은 노아에게 "모든 식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하신다(15-17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 말자 방주를 나온다(18-19절). 다시 한번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과 노아의 "순종" 패턴이 나타난다. 노아는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즉각적으로 받들고 따른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하시면 "들어가고" 방주에서 "나오라" 하시면 "나온다." 노아는 세밀한 부분까지 완전한 순종을 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노아의 순종은 후에 아브라함의 순종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에게 임한 것 같이(8:15),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다(12:1 상). (2)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하신 것 같이(8:16), 아브라함에게는 "네 땅에서 나오라"고 명하셨다(12:1하). (3)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 같이(8:18),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나온다(12:4). (4) 이 직후에 노아가 제단을 쌓은 것 같이(8:20),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12:7). 믿음의 사람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있는 유사성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5) 노아의 제단과 하나님의 결심(8:20-22)
(1) 노아의 제단(8:20)
노아는 지난 365일 동안 배를 타고 홍수 속에 살았다. 이제 그는 수중 생활을 마치고 지상 생활로 다시 돌아온다. 노아는 막막했을 것이다. 배에서 내린 감격도 잠깐이고, 너무나 낯선 땅에서의 새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가 옛날에 살았던 땅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새로 발을 디딘 땅에서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다. 방주 안에서 눅눅하게 젖은 물건들을 내려 놓고 말리며, 가구들을 새롭게 만들며 살 집을 준비해야 했다. 양식과 물과 거처를 마련해야 하므로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방주에서 나오는 병든 짐승들을 보살피고, 연약한 짐승들의 살 곳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단부터 쌓는다. 자신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에게 예배드릴 장소를 먼저 마련하고 있다. 이것이 노아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다. 새로운 역사는 제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출발을 해야하는 인류의 미래는 하나님께 쌓는 제단에 기초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노아의 제단은 성경에서 처음 나타나는 제단이다. 이후에 노아의 모범을 따라 아브라함(12:7; 13:18), 이삭(26:25), 야곱(33:20; 35:1)이 어디로 가든지 먼저 제단을 쌓는다. 노아의 모범이 그의 영적인 후손들을 통하여 계승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사업과 학업과 결혼과 가정이 우리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최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최우선에 둠으로써 진정한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아는 정한 짐승을 가지고 홍수 후에 번제로 제사를 드린다(8:20-21). 노아는 자신의 가축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골라 산 채로 태워드린다. 최고의 제물이 아니면, 참된 제물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바치는 노아의 제물을 받으신다(8:21; 레 1:7). 아마 여기에서 노아는 감사제의 성격을 띤 번제를 드린 것 같다. 세계적인 대홍수의 파국에서 노아와 그의 모든 식구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감사 제사로 보답한다. 이리하여 홍수 후에는 노아를 통해 예배하는 영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새 날의 모습이 그 윤곽을 드러내기 전에, 새 날의 계획을 정하기 전에 노아와 같이 제단을 쌓지 않는 사람, 그의 제단을 쌓지 않고 성서의 한마디 말씀도 읽지 않은 채 슬그머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사악한' 사업가, '사악한' 아버지, 또는 '사악한' 어머니로서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이다"(헬무트 틸리케).
하나님은 노아의 번제를 "향기로 받으신다"(8:21). 노아의 번제는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친 제물은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완전한 제물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께 바쳐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이라고 말한다(엡 5:2).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뜻과 생각이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었다. 즉 제물은 단지 물건이나 짐승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격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권한다(롬 12:1).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보낸 헌금이 "향기로운 제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그들이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다하여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빌 4:18).
(2) 하나님의 결심(8:21-22)
홍수가 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직접 말씀하셨다(7:1). 이제 여기에서는 독백의 형식으로 두번째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이르신다"('amar 'el libbo). 즉 "마음으로 속으로 다짐하셨다"(<공동역>, <표준새번역>). 홍수 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이 근심하셨다(6:6). 다시 한번 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언급함으로써, 홍수의 시작(6:5-8)과 끝 부분(8:20-22)을 연결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두 가지 결론을 내리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신다(8:21).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와 악 때문에 홍수를 보내셨다(6:5). 이제는 사람의 죄 때문에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 "악하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착하지 않다"든가, "친절하지 않다"든가, "부드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속에는 인간 자신과 공동체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기심과 배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홍수의 공포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좌절한 듯한 모습이다. 아무리 무서운 심판이 와도 인간은 변하지 않고,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
둘째로,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다(22절). 여기에는 계절의 순환을 추수(심음과 거둠), 온도(추위와 더위), 계절(여름과 겨울)의 세 쌍으로 표현하고 있다. 홍수 기간 동안 이 모든 변화가 깨어졌지만, 이제 새롭게 재개될 것이다. 마지막 쌍을 이루는 "낮과 밤"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지만, 홍수 기간 동안 밤낮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하루하루의 정상적인 순환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날과 계절의 순환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은 왕의 칙령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대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인내하실 것이며, 자신의 세계를 지속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때문에, 창조계를 향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깊고 심해도, 하나님께서는 창조계를 자신의 뜻대로 유지할 것이며 종말론적인 완성을 이루실 것이다. 홍수 보다 더 큰 재앙이 없었는데도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바뀔 수 있겠는가?
창조계를 유지하겠다는 하나님의 헌신 때문에, 이제부터는 시간과 계절이 역사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고정된 법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렘 33:25). 그러나 여기에서는 땅에 대한 전반적 저주가 해제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창 3:18). 또한 이 절은 구원사적 대전환을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contra 김이곤), 단지 홍수를 통한 세계적인 파국은 피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다음 장( 9:1-17)에서 상세하게 확대되어 설명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조계를 유지할 결심을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결심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헌신의 댓가가 커진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고통을 느끼시는 하나님과 반역적인 세상과의 갈등 관계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변해야 할 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것이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이룬다(롬 3:25).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랑과 연민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