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카페 바리스타
전 호준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키스처럼 달콤하다. 어느 시인의 “커피 예찬”이란 시구(詩句)다. 커피에 대한 찬가인지 정의(定義)인지 무딘 나로선 아리송하지만, 은연중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부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식사 후 커피를 마신다. 당번은 당근이다. 언제부터 내가 부부 카페 바리스타가 되었는지 기억은 없다. 마지막 쌀래끼가 밥통(胃)에 도달하기도 전에 “영이 아빠 커피!” 아내의 커피 타령이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로 시작되는 T.V 커피 광고가 떠오른다.
커피포트에 불을 지피고 적당량의 커피와 설탕, 크림을 잔에 버무린다. 끓는 물을 조절해 정성껏 저으면 오늘 아침 부부 카페 영업은 땡이다.
어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연평균 512잔에 이른다고 한다. 어떤 기호음료보다 커피에 쏠리는 사랑이 도를 넘고 있지는 않은지? 이렇듯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커피, 인류는 어떻게 알고 언제부터 먹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자료를 검색했다.
6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살던 “칼디”라는 양치기가 있었다. 가뭄에 말라가는 초원을 떠나 평소에 가지 않던 먼 곳까지 염소 떼를 몰고 갔다. 얼마 후 “칼디”는 한 무리 염소들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에 놀랐다. 비정상적으로 흥분하고 날뛰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상히 여긴 “칼디”는 염소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중, 입속에 빨간색 열매를 넣고 아작아작 씹는 것을 발견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에 “칼디”도 그 열매를 따 먹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자 이상하게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지며 춤이라도 출 것 같은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이 커피의 원조로 인류에게 커피의 효능을 알린 계기가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여온 것은 약 100년 전으로 커피를 처음 맛본 사람은 고종 황제라 한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마신 것이라 전해온다.
내가 커피를 처음 맛본 것은 아마도 50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60년대 중반 농촌지역 면 소재지에 다방이라는 커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 도시에서 고향을 찾은 친구 손에 이끌려 들어간 허름한 목조 2층 “샘 다방” 촌뜨기 나에겐 환상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담이 일어서며 어서 오세요. 다소곳이 인사를 한다. 텅 빈 다방, 한가운데쯤 커다란 사각형 어항 속에는 금붕어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잔잔한 멜로디에 정신이 몽롱했다.
빨간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한 앳된 아가씨가 기다린 듯 쪼르르 달려와 옆자리에 바짝 붙어 몸을 기대며 차는 뭘로? 하며 쳐다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진한 향수 냄새에 정신이 아찔하다. “커피! 블랙으로~” 친구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했다. “오빠! 나도 한잔” 생긋 눈웃음으로 영문도 모르는 소리를 하며 일어선다. 왼쪽 벽면 사각형 틀 안에 모나리자가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맛본 블랙커피. 뜨겁고 쓰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떤 차(茶)보다 우리나라 곡차(막걸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곡차를 싫어하는 아내는 정 반대다. 오직 커피 마니아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처럼 카페나 커피 전문점을 찾지 않는다. 분위기를 모르는 무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만만찮은 가격의 명품 커피 진가를 모르는 무감각한 혓바닥이 탈이다. 평소 즐겨 마시던 믹서와 자판기 커피에 길들어진 입맛 탓이리라, 커피믹스는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제품으로 오히려 커피의 원조 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고종황제의 아픈 마음을 달래준 커피, 러시아로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하니 아이러니하다.
부부는 살면서 닮아 가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나도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아내를 따라간다기보다, 퇴직 후 맥이 끊긴 술자리 때문인 것 같다. 몇 해 전 정기 건강검진 결과 당 수치가 올라간다는 판정이 나왔다. 설탕을 줄여야 할 것 같아 믹서와 자판기를 되도록 멀리하고 자진 바리스타가 되었다.
“커피 배달이요!” 마주 앉아 병아리 물 먹듯 마셔보는 키스처럼 달콤한 커피 한 잔의 여유, 행복한 오늘 하루가 익어 간다. 오늘은 무엇 무엇을 해야 하고 누구를 만날 계획이며 혀끝에 녹아드는 커피 향 같은 대화가 조곤조곤 이어진다. 잔을 비운 아내는 앵무새 같은 한마디를 오늘도 잊지 않는다. “역시 커피는 당신이 탄 것이 내 입엔 짱이야!” 잘 먹었다는 인사인지? 허풍선인지? 아내의 부추김이 밉살스럽지 않은 걸 보면 부부 카페의 한번 바리스타는 영원한 바리스타? 2018.6.6
첫댓글 숙제가 늦어 지각생 심정으로 글을 올리고보니 같은 입장의 동료가 있어 반갑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나의 글과 비슷합니다. 늙어가다보니 동변상련의 신세가 된것 같습니다. 아네의 커피시중 들어야 하는 노인 신세. 그래도 커피 맛있다고 칭찬이라도 있으니 나보다는 낳은 편입니다. 허긴 내가 내린 커피에는 단맛이 없으니까. 잘 읽었습니다.
커피 이야기가 나오니 다방이 생각납니다. 다방 아가씨가 영양 보충하라고 커피잔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서 스푼으로 저어줍니다. 그리고선 "오빠 나도 한잔 사주세요."합니다. 사 준 커피를 날름 마시고선 다른 남자 손님에게 갑니다.ㅎㅎ
올리신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부부카페바리스타 알바?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부부가 함께 커피 한 잔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아침을 여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보여 부럽습니다.대화를 할 때, 커피든 다른 종류의 차든 찻잔이 앞에 놓여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면 찻잔이 놓여져 있을 때 그림도 아름다울뿐 아니라 대화도 훨씬 더 부드럽고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부러움을 느끼며 잘 읽었습니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커피 맛을 몰라 그냥 따라만 다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고,
무엇보다 막걸리 체질인 촌사람에게 커피는 맛없고 비싼 이상한 음료였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다방에 대한 추억을 읽으니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저절로 연상됩니다. 오손도손 커피를 마시는 노부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부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옛날식 다방은 요즈음 점차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그런 다방이 보존되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부카페의 바리스타가 볶아 놓은 커피향이 우리 수필카페에도 은은히 풍기는 것 같습니다. 커피 한잔에서 부부의 금슬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을 통하여 옛날 다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글 잘 음미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믿거나 말거나라는 커피의 원조에 대해서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두분이 오붓한 향을 즐기시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우리집 커피 배달은 언제 올런지 기다려 집니다. 그래도 고맙게도 요즈음은 밥 먹고도 꼭 잘먹었다 하지요.커피도 역시 사모님같이 저가 탄 커피가 맛있다고 하고요.요즈음은 밭에서 일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와서 맘으로라도 칙사대접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