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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1595~1649년)가 즉위하면서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실세가 됐다.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은 광해군 정책 대부분을 파기했다. 외교도 마찬가지. 광해군이 명나라 신의를 저버리고 후금과 외교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반정의 주요 명분이었던 만큼 외교 정책 전환은 불가피했다.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외교 정책의 기조로 했고, 이것은 신흥 군사 강국 후금(後金)을 자극시켰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은 인조의 외교 실책이 빚은 혹독한 대가였다.
1623년 3월 왕이 된 인조는 후금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후금은 이제 오랑캐로 멸시받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1626년 8월 후금에서는 태조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洪泰時·청 태종)가 즉위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젊은 시절부터 전공을 쌓은 청 태종은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선 정벌을 미약한 권력 기반 강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
이 무렵 1624년 이괄의 난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던 한명인의 아들 한윤이 국경을 넘어 후금으로 들어가, 새 임금이 즉위하자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과 박난영의 가족을 처형했다고 밝혔다. 조선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홍타이지의 전쟁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청 태종은 1627년 1월 8일 사촌 형 아민으로 하여금 조선 침공에 나서게 했다. 정묘호란의 시작이다. 3만5000여명의 병력은 1월 13일 압록강을 넘었다. 선봉에는 강홍립, 박난영 등 조선 출신 장수들과 통역관이 함께했다. 후금은 뒷날 보낸 국서에서 출병의 이유로 크게 네 가지를 들었다.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공격했다. 명나라 장군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 여진족과 한조의 도망민이 후금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조선이 방관했다. 누르하치가 사망했을 때 조선에서 조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평안도 의주를 점령하고, 일주일 후 얼음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내려왔다. 후금군은 진격 도중 “옛 임금(광해군)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면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후금의 침략에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장만을 도원수로 삼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면서 황해도 황주와 평산을 1차 방어선, 임진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소현세자는 분조(分朝·임시조정)를 맡아 전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때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당시 평양에는 8000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후금의 기세에 놀라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1월 24일 평양성이 함락됐다. 후금의 빠른 진격에 인조는 1월 27일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길을 서둘렀다. 기마족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화부 관아에 임시정부를 차린 인조는 대신들과 대책 회의를 하면서 전쟁 추이를 살폈다.
후금은 명나라 정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라 강화도 공략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에 협상을 제의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자는 것이 핵심. 격론 끝에 명나라와의 관계 단절은 거부하고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자는 제안은 수용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1627년 3월 3일 인조는 검은 옷을 입고 강화도 연미정 대청으로 나아가 형제 관계 서약식을 맺었다.
정묘호란은 후금의 침략 이후 50일 만에 종료됐다. 하지만 후금군은 철수하면서도 끝까지 백성과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벌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정묘호란 후에도 조정 내에서는 후금에 대한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이가 많았다.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후금을 명나라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점은 인조와 서인 정권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후금이 통상적인 조건의 10배가 넘는 무역대금을 요구하자 인조의 분노는 폭발했다.
전쟁의 여운이 어느 정도 사라진 1634년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이기고 짐은 병가의 상사다. 금(金)나라 사람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아군이 약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옛말에 ‘의지가 있는 용사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한다’고 했고, ‘군사가 교만하면 패한다’고 했다. 오늘날 무사들이 만약 자신을 잊고 순국한다면 이 교만한 오랑캐를 무찌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묘호란 때 그렇게 당했지만 내부 국방력에 대한 철저한 점검 없이 후금에 맞서는 최악의 길을 택한 것이다.
1636년 4월 세를 확장한 청 태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 수도를 심양에 정했다. 심양 천도는 명을 압박해 중원 정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명 정벌에 앞서 배후가 될 수 있는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군신 관계를 맺을 것도 요구해왔다. 청 태종의 요구는 인조와 조선 조정을 격분시켰다. 그러나 감정과 현실은 다른 법. 결국 힘과 국력이 문제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대책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로 국론이 갈렸다. 최명길은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현실주의적인 주화파의 입장보다 척화론이 대세가 됐다.
1636년 11월 말 청 태종은 조선을 응징하고자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총 병력은 몽골족 3만명과 한족 2만명을 포함한 도합 12만8000여명으로 12월 2일 심양을 출발했다. 청군 선봉부대의 장수는 용골대였고, 기마병은 마부대가 이끌었다. 1636년 12월 8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000여명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국경인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의 시작이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은 수도를 목표로 돌진한 청의 기마병 중심 공격에 별다른 방어를 하지 못했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다시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지만 청군의 선발대는 이미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해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을 돌렸고, 재위 기간 동안 세 번(두 차례 호란과 한 번은 이괄의 난)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하는 불명예 기록의 보유자가 돼버렸다.
찬바람이 유난히도 매서웠던 1636년 12월 15일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12만 대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청군은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성안에는 1만4000여명이 약 50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조선과 청군 사이에는 여러 차례 협상이 오고 갔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마저 함락되면서 그곳에 있던 왕족과 신하들이 포로가 됐다. 청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졌지만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은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최명길이 항복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자 옆에 있던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다시 모아 붙이는 우여곡절 끝에 항복을 청하는 문서가 만들어졌다.
1637년 1월 30일 아침, 산성에서의 격론 끝에 인조는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산성을 내려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왕의 복장 대신에 융복(戎服·군복의 일환) 차림으로 서문을 빠져나온 인조는 참담하고도 비통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수항단(受降檀·항복을 받아들이는 단)이 마련된 삼전도(三田渡·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곧이어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청나라와 군신 관계가 맺어지고 명의 연호 대신에 청의 연호 사용, 세자와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의 굴욕적인 협상이 체결됐다. 정축화약(丁丑和約)이라 부른다.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 태종은 승전 기념으로 자신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으니 바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을 기록했던 비석이라는 점에서 우리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한편으론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명분만을 내건 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함께 제시해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