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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소이(大同小異)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조금 다르다는 뜻으로, 큰 차이가 없이 서로 거의 비슷함을 이르는 성어이다
大 : 큰 대(大/0)
同 : 한가지 동(口/3)
小 : 작을 소(小/0)
異 : 다를 이(田/6)
(유의어)
소이대동(小異大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오십소백(五十笑百)
출전 :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잘났네', '못났네' 하고 다툴 때는 '도토리 키 재기'라는 속담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이다. '거기서 거기'는 실력이나 수준이 서로 비슷하여 견주어 볼 필요가 없음을 뜻하는 익은 말이다.
실력이 어금버금하여 쉽게 승부가 가려지지 않는 양자를 나타낼 때 '막둥이 씨름하듯'이란 속담을 쓴다. 이 우리말 속담을 한문으로 번역한 성어가 막동각저희(莫童角抵戲)이다. 줄여서 동각저희(童角抵戱)라고도 부른다.
동각저희(童角抵戱)는 '아이들의 씨름 놀이'라는 뜻으로, 큰 차이가 없이 서로 실력이 엇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한역 성어(한자어로 번역된 성어)이다.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는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비웃는다는 뜻으로, 양자 모두 큰 차이가 없음을 뜻한다. 초록동색(草綠同色)은 풀빛과 녹색은 같은 색이라는 뜻으로, 같은 처지나 무리끼리 어울림을 뜻한다.
또 난형난제(難兄難弟)는 사람이나 사물이 비슷하여 낫고 못함을 정하기 어려울 때를 이른다. 형이라 하기도 어렵고 아우라 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이나 사물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서로 비슷할 때 쓴다.
후한 말의 인물인 진식(陳寔)의 두 아들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진식의 손자가 두 아들에게 각각 누구의 지혜가 더 뛰어난지 물었다. 진식은 "형이라 하기도 어렵고 아우라 하기도 어렵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하여 낫고 못함을 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크게 보아 같고(大同) 세세한 부분에는 차이가 난다(小異)는 쉬운 글자로 이뤄지고 또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말에도 고사가 따른다는 것은 뜻밖일 것이다. 하지만 어엿이 장자(莊子)에서 비롯된 깊은 뜻을 가진 말이라 더 놀랍다.
바로 대동소이(大同小異)이다. '크게 보면 같고 작은 부분에서만 차이가 난다'는 뜻으로 일상에서 정말 자주 쓰이지만, 그 유래가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나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다.
장자(莊子)는 묵가(墨家)와 법가(法家) 등의 사상을 비판한 뒤에 도가사상을 펼친다. 그가 이들을 비판한 핵심 논리와 도가 사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분과 친소 관계를 초월하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한 묵가의 주장에 장자는 이러한 겸애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는 인위적이고 규격화된 도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억지로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도리어 인간에게 정신적 구속과 고통을 준다는 지적이다.
엄격한 법률(法)과 술수(術), 권력(勢)을 통해 군주 중심의 사회 질서를 통제하자는 법가의 주장에 장자는 인위적인 법과 제도가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망치고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고 보았다. 강제적인 규제는 백성들을 위선적으로 만들 뿐,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장자(莊子)는 이처럼 인위적인 규범(유가·묵가)이나 강제적인 통제(법가)로는 세상의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옳고 그름(是非), 아름답고 추함(美醜)으로 나누는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자연의 순리와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지향했다. 어떠한 사회적 통념이나 세속적인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고, 정신적인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삶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장자는 제자백가가 만든 모든 사상적 틀이 인간을 구속하는 '정신적 감옥'이라 여겼으며, 이를 깨부수고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뒷부분 친구인 혜시(惠施)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 곳에 이 말이 등장한다. 워낙 종횡무진의 비유로 나오지만 잡편(雜篇)의 마지막인 천하(天下)편에 실린 내용을 보자.
天與地卑 山與澤平.
천여지비 산여택평.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산은 못과 같이 평평하다.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산은 못과 같이 평평하다는 이 구절은 중국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 혜시(惠施)가 주장한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산은 솟아 있고 못은 움푹 패어 있어 서로 완전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혜시는 공간과 사물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파격적인 명제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우주라는 무한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땅의 높이 차이, 산과 못의 깊이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어디를 기준으로 잡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정해놓은 '높다', '낮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림으로써 사물 간의 절대적인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차별 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초연한 지혜로 이어진다.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일방중방예 물방생방사.
해는 장차 중천에 뜨지만 바야흐로 기울고, 만물은 장차 태어나지만 또한 마침내 죽는다.
해는 한가운데 뜨는가 싶더니 이내 기울기 시작하고, 만물은 태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죽음을 향해 간다는 이 구절은 중국 제나라의 사상가 혜자(혜시)가 주장한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하나로,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변증법적 세계관을 담은 문장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성과 소멸, 절정과 쇠퇴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한낮(절정)'이라는 순간은 존재하자마자 곧 '기묾'의 시작이며, '태어남'은 동시에 '죽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다. 결국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장자와 명가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인생의 전성기라 할지라도 자만하지 않고, 힘들고 쇠락하는 순간에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문구이다.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대동이여소동이 차지위소동이,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 이것을 소동이라 하고,
크게 보면 같으면서도 작게 보면 차이가 있으니,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 한다는 이 구절은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나오는 전국시대 명가(名家)의 사상가 혜시(惠施)의 말로, 사자성어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유래가 되는 철학적 구절이다.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유래가 되는 철학적 구절은 중국 고대 도가 사상서인 장자(莊子) 잡편 제33편 천하편(天下篇)에 등장하는 '대동이여 소동이(大同而與 小同異)'이다. 이 구절은 장자의 친구이자 전국시대 명가(名家)의 사상가였던 혜시(惠施)의 상대주의적 논변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사물을 거대한 전체의 관점(큰 틀)에서 바라보면 만물이 서로 비슷하고 같지만, 세밀하고 개별적인 부분(작은 틀)에서 들여다보면 차이와 다름이 존재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여기서 유래한 대동소이(大同小異)는 '크게 보면 같고 작은 차이만 있다'는 뜻으로, 큰 차이 없이 서로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소동이(小同異)는 큰 틀이나 전체적인 관점(대동)에서 보면 서로 같지만, 세부적이거나 작은 부분(소이)에서 들여다보면 서로 다르다는 뜻이고, 대동이(大同異)는 이어진 구절인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 한다"로 이어지며,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같음과 다름이 상대적임을 설명한다.
이 구절에서 유래한 '대동소이(大同小異)'는 오늘날 '큰 차이가 없고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여러 대상의 의견, 방법, 결과 등을 비교할 때 본질은 같고 지엽적인 차이만 있을 때 주로 사용한다.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만물필동필이 차지위대동이.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
결국 같고 다름이란 상대적 관점에서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같지만 작은 틀에서 보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뜻이 오늘날에는 차이가 없이 거의 비슷하다든지, 그게 그것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 한다는 이 구절은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 혜시(惠施)가 남긴 명제인 '대동이(大同異)'를 아주 정확하고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본래의 뜻은 '만물은 완전히 같기도 하고, 완전히 다르기도 하니 이를 대동이(큰 틀에서의 같고 다름)라 한다'이지만, 철학적 배경으로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라보는 기준과 규모(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다.
우주나 자연이라는 거대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 동물, 바위, 나무 등 만물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하지만 이를 세부적으로 쪼개어 보면 모양, 성질, 쓰임새가 저마다 전부 다르다. 즉, 같음과 다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관점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 깊은 철학적 용어는 현대에 오면서 일상 용어로 굳어졌다. 오늘날 대동이(大同小異)는 주로 '큰 틀에서는 같고 작은 부분에서만 조금 다르다', 즉 '거의 비슷비슷하다', '그게 그것이다'라는 뜻으로 가볍게 사용된다.
혜시가 말한 본래의 '대동이'는 단순히 '비슷하다'는 타협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만물을 넓고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철학적 권유에 가깝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크게 보면 같고 작은 차이만 있다는 뜻으로, 거의 비슷하여 큰 차이가 없음을 이르는 성어이다.
대동(大同)은 조금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같다는 뜻이고, 소이(小異)는 조금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음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 비롯된 말이다. 장자는 천하편에서 묵가(墨家)와 법가(法家) 등이 주장하는 논점을 밝혀 비판하고 도가(道家)의 철학을 선양한 다음, 뒷 부분에 친구인 혜시(惠施)의 논리학(論理學)을 소개하고 이에 자기 의견을 덧붙였다. 대동소이라는 말도 혜시의 말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장자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혜시의 저술은 다방면에 걸쳐 다섯 수레나 되는데 그의 도(道)는 복잡하고, 그가 말하는 바는 정곡을 잃었으며, 그의 생각은 만물에 걸쳐 있다.
이 구절은 장자(莊子) 천하(天下) 편에 나오는 매우 유명한 대목이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풍부함을 뜻하는 남복오거(男腹五車) 또는 수레 다섯 대 분량의 책이라는 뜻의 오거서(五車書), 학부오거(學富五車)이다.
장자가 그의 절친한 벗이자 논쟁 상대였던 명가(名家)의 사상가 혜시(惠施)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 핵심 의미와 비판의 말이다.
'다섯 수레나 되는데'라고 했다. 당시는 대나무 조각(죽간)에 글을 쓰던 시대였으므로,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은 엄청나게 방대한 지식과 저술을 의미한다. 장자 역시 혜시의 박학다식함은 인정했다.
'그의 도는 복잡하고'라고 했다. 혜시의 학문이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지엽적인 논리와 개념 분석에만 치우쳐 지나치게 번잡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말하는 바는 정곡을 잃었으며'라고 했다. 말장난 같은 논리적 기교(궤변)에 빠져, 세상의 근본적인 진리나 삶의 핵심(정곡)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그의 생각은 만물에 걸쳐 있다'라고 했다. 세상 모든 자질구레한 현상과 사물에 관심을 두느라, 도리어 마음이 산만해지고 도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치열하게 논쟁한 라이벌이었지만, 서로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지음(知音)이었다. 장자는 혜시의 방대한 지식과 논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도(道)'에 이르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다. 지식에 집착하기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를 중시했던 장자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다음 문장은 중국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혜시(惠施)의 역설을 담은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일부이다.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 구절들은 감각을 초월한 우주의 절대적인 상대성과 논리적 모순을 설명하며,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목적이 있다.
혜시(惠施)가 말했다.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지대무외, 위지대일; 지소무내, 위지소일.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대일(大一)이라 하고, 지극히 작아서 속이 없는 것을 소일(小一)이라 한다.
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
무후불가적야, 기대천리.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올릴 수가 없지만, 그 크기는 천리(千里)나 된다.
이 말은 중국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혜시(惠施)가 남긴 명제이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편에 기록된 ‘혜시십사(惠施十事)’ 중 일부로, 공간과 사물의 상대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동양 철학의 대표적인 역설이다.
대일(大一)은 무한히 큰 우주나 공간을 뜻합니다. 너무 커서 그 너머의 '밖'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전체이다. 소일(小一)은 무한히 작은 물질의 최소 단위를 뜻한다. 오늘날의 원자나 쿼크 같은 개념으로, 너무 작아서 그 내부에 더 이상 '속(안쪽)'이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보는 사물의 크기는 모두 상대적이다. 가장 큰 것(우주)과 가장 작은 것(점)은 결국 '하나(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나눈 상대적인 구별일 뿐임을 말한다.
여기서 '두께가 없는 것(無厚)'은 기하학에서의 '면'이나 '선'을 의미한다. 수학적으로 두께가 0인 면은 아무리 위로 쌓아 올려도 높이(부피)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면 자체는 가로와 세로로 끝없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에, ‘천리(千里)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가질 수 있다. 감각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성립하는 공간의 성질을 보여준다. 사물의 본질은 감각적인 경험(쌓을 수 있는가)만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뜻한다.
요약하자면, 혜시는 이 논리들을 통해 '인간이 정한 크기, 높이, 안과 밖이라는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이를 통해 사물에 대한 편견을 깨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만물일체(萬物一體) 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天與地卑, 山與澤平.
천여지비, 산여택평.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산은 못과 같이 평평하다.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일방중방예, 물방생방사.
해는 정중앙에 뜨는 동시에 기울고, 만물은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간다.
우리가 볼 때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산은 솟아 있고 못(연못)은 깊고 평평하다. 하지만 우주적인 무한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높은 산이나 깊은 못의 차이는 미미한 먼지에 불과하다.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이라는 인간의 분별과 기준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지를 지적한다. 절대적인 공간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해가 정남쪽(중천)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方中), 그것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간(方睨)이다. 생명 역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늙음과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삶과 죽음, 성함과 쇠함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변화 과정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혜시는 이러한 역설적 명제들을 통해 결국 '하늘과 땅은 한 몸이요, 만물은 모두 동일하다(天地一體也, 萬物大同也)'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정해놓은 시공간의 기준, 선과 악,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편견 없이 포용하라는 지혜를 담고 있는 깊이 있는 고전 구절이다.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대동이여소동이, 차지위소동이;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 이것을 '소동이'라 하고,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만물필동필이, 차지위대동이.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유래가 된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의 구절로, '크게 보면 같고 작게 보면 다르다'는 사물의 상대적인 성질을 말한다. 크게 보면 같으나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 이것을 '소동이'라 한다. 만물은 어느 면에서는 모두 같지만 어느 면에서는 모두 다른데, 이것을 '대동이'라 합니다.
전국시대 명가(名家)의 사상가인 혜시(惠施)의 논리와 주장을 장자가 소개하고 평가한 내용이다. 혜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만물이 가진 모순과 상대성을 설명하려 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같음과 다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이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구절에서 유래한 대동소이(大同小異)는 오늘날 '큰 차이가 없고 거의 비슷하다' 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으면서 자잘한 차이만 있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南方無窮而有窮, 今日適越而昔來. 連環可解也.
남방무궁이유궁, 금일적월이석래. 연환가해야.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是也.
아지천하지중앙. 연지북, 월지남시야.
나는 천하의 중앙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중앙이다.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범애만물, 천지일체야.
두루 만물을 사랑하면 사물의 차별이 없어지고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된다.
남쪽은 끝이 없음과 동시에 끝이 있고, 오늘 남쪽의 월(越)나라로 간 것은 어제 월나라에서 온 것이다. 꿰어 있는 고리도 풀 수가 있다. 나는 천하의 중심을 알고 있다. 연(燕)나라의 북쪽이며 월나라의 남(南)쪽이 그 곳이다. 만물을 넓게 차별 없이 사랑하면 천지도 하나가 된다.
남쪽은 끝이 없음과 동시에 끝이 있고(南方無窮而有窮)는 공간의 무한성과 유한성의 상대성을 말한다. 공간은 계속 뻗어나가므로 끝이 없지만(무중), 우리가 어떤 경계를 설정하는 순간 끝이 존재하게(유중) 된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오늘 남쪽의 월(越)나라로 간 것은 어제 월나라에서 온 것이다(今日適越而昔來)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나타낸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오늘'과 '어제',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구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꿰어 있는 고리도 풀 수가 있다(連環可解也)는 굳게 묶여 풀 수 없어 보이는 연결 고리도, 고리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닳거나 부서져 분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풀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분리와 결합의 상대성을 뜻한다.
나는 천하의 중심을 알고 있다. 연(燕)나라의 북쪽이며 월나라의 남(南)쪽이 그 곳이다(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越之南是也)는 당시 기준 극북(極北)이었던 연나라의 더 북쪽, 극남(極南)이었던 월나라의 더 남쪽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역설이다. 지구(혹은 우주) 전체로 보면 중심이라는 위치는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공간 인식을 보여준다.
만물을 넓게 차별 없이 사랑하면 천지도 하나가 된다(氾愛萬物, 天地一體也)는 혜시 사상의 결론에 해당한다. 앞서 말한 공간, 시간, 위치의 상대성을 깨닫고 나면, 세상 모든 만물의 차별(크고 작음, 멀고 가까움)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모든 존재를 조건 없이 널리 사랑해야 하며, 나와 온 우주는 본래 하나(천지일체)라는 위대한 박애주의로 귀결된다.
혜시는 이러한 논리적 역설을 통해 우리가 가진 상식과 고정관념(절대적인 크기, 방향, 시간 등)을 깨고, 만물의 상대성과 일체성을 증명하려 했다.
혜시(惠施)는 자기가 천하를 달관한 자라고 자부하여, 이로써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 혜시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 만물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대성을 논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대동소이(大同小異)란 상대적 관점에서 보이는 차이는 차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거의 비슷하다든지, 그게 그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대동소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당(唐)나라의 노동(盧同)과 마이(馬異)가 사귐을 맺은 시(詩)에, "어제의 같음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은 다름이 아니다. 이것을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다르다고 말한다"고 한 대목이 있다. 또 주자(朱子)도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쓰면서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莊子 第33 天下編 第7章 惠施
장자 제33 천하편 제7장 혜시
혜시의 사상 / 궤변
惠施多方, 其書五車, 其道舛駁, 其言也不中.
혜시다방, 기서오거, 기도천박, 기언야부중.
혜시(惠施)는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추구하여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으나, 그 도리(道理)가 잡박하여 그 말이 적중하지 못했다.
歷物之意, 曰:
역물지의, 왈:
그는 사물의 의미를 차례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至大無外, 謂之大一;
지대무외, 위지대일;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일컬어 대일(大一)이라 하고,
至小無內, 謂之小一.
지소무내, 위지소일.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일컬어 소일(小一)이라 한다.
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
무후불가적야, 기대천리.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올릴 수는 없으나, 그 넓고 큼은 천리 사방에 미친다.
天與地卑, 山與澤平.
천여지비, 산여택평.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낮고 산과 못은 둘 다 평평하다.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일방중방예, 물방생방사.
해는 중천에 떠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하고, 사물은 생기는 동시에 죽어간다.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대동이여소동이, 차지위소동이;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 이것을 '소동이'라 하고,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만물필동필이, 차지위대동이.
만물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
南方無窮而有窮, 今日適越而昔來. 連環可解也.
남방무궁이유궁, 금일적월이석래. 연환가해야.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是也.
아지천하지중앙. 연지북, 월지남시야.
나는 천하의 중앙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중앙이다.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범애만물, 천지일체야.
두루 만물을 사랑하면 사물의 차별이 없어지고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된다.
惠施以此為大, 觀於天下而曉辯者. 天下之辯者相與樂之.
혜시이차위대, 관어천하이효변자. 천하지변자상여락지.
혜시(惠施)는 이상의 명제(歷物十事)를 뛰어난 것으로 자부하여, 이것을 천하에 공표하여 논리학자들을 설득하였다. 그래서 천하의 논리학자들이 모두 서로 더불어 이것을 즐거워하였다.
莊子 第33 天下編 第7章 惠施
장자 제33 천하편 제7장 혜시
역물10사(歷物十事)
혜시(惠施)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의 배경이 되는 철학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흔히 '혜자(惠子)'라고도 불립니다.
혜시(惠施)는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 사상가이다. 송나라 사람으로, 위나라가 주 활동지이며, 위나라 혜왕(惠王) 때 재상이 되었다. 혜왕 당시 위나라는 누차에 걸진 전쟁 패배로 쇠약해져 갔다. 그는 강대국 진나라의 위협에 대항해서,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가 연합해서 진나라와 맞서는 합종(合縱; 세로 연합)을 주장했다.
연형(蓮衡; 가로 연합)을 주장하는 장의(張儀)와 불화하여, 위나라에서 쫓겨난 뒤에 초나라로 갔다가, 고향인 송나라로 갔다. 여기에서 장자(莊子)와 벗이 되어서 철학을 토론했다. 장자 사상의 핵심 골격은 혜시의 이론에 근거한다. 혜왕이 죽은 뒤에 장의가 권력을 잃었다. 이에 혜시가 다시 위나라로 복귀해서 합종책을 추진했다.
그는 여러 나라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정치가였다. 그는 위나라 왕을 위하여 외교 무대를 뛰었다. 그는 공손룡(公孫龍)과 더불어서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술은 매우 많았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장자 천하편에 이른바 '역물10사(歷物十事)'라 불리는 10개의 명제가 전해지고 있다. 이 명제들은 모두 모순된 명제들이다. 증명은 없이 결론 격인 명제만 10개 제시되었기에, 후대에 많은 증명과 추측이 난무했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 제논의 유명한 역설들처럼,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여러 명제를 제시했다.
역물십사(歷物十事)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명가(名家)의 사상가 혜시(惠施)가 주장한 10가지 역설적이고 철학적인 명제로, 장자 잡편 천하편에 전해진다. 역물(歷物)은 사물을 관찰하고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이며, 혜시는 고정관념과 상식의 허점을 찌르는 10가지 결론을 논증 없이 제시했다
이 명제들은 상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물의 상대성과 시공간의 본질을 분석하며 궁극적으로는 '만물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하나(천지일체)'라는 거대한 통찰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惠施多方, 其書五車, 其道舛駁, 其言也不中.
혜시다방, 기서오거, 기도천박, 기언야부중.
혜시(惠施)는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추구하여 장서(藏書)가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으나, 그 도리(道理)가 잡박하여 그 말이 적중하지 못했다.
歷物之意, 曰:
역물지의, 왈:
그는 사물의 의미를 차례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1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内, 謂之小一.
지대무외, 위지대일; 지소무내, 위지소일.
가장 큰 것은 바깥이 없으니, 이를 일러 '큰 하나'라 한다.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일러 '작은 하나'라 한다.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입니다. 공간과 사물의 크기가 가진 상대성을 날카롭게 간파한 문장입니다.
至大無外, 謂之大一(지대무외, 위지대일)
지극히 커서 그 밖이 없는 것을 '대일(大一, 가장 큰 하나)'이라 한다.
우주 전체처럼 무한히 큰 존재는 더 이상 그 바깥에 비교할 대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小無內, 謂之小一(지소무내, 위지소일)
지극히 작아서 그 안이 없는 것을 '소일(小一, 가장 작은 하나)'이라 한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의 최소 단위를 의미합니다.
혜시는 이 명제를 통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크다'와 '작다'는 개념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어떤 것이든 더 큰 것과 비교하면 작아지고, 더 작은 것과 비교하면 커집니다. 결국 인간이 정한 '크기'의 기준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가장 큰 것(대일)과 가장 작은 것(소일)은 개념적으로 연결됩니다.
이 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무한한 우주)과 양자역학/소립자 물리학(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개념을 2,300년 전에 철학적 표현으로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 명제는 결국 "만물은 하나로 통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
無厚不可积也, 其大千里.
무후불가적야, 기대천리.
두께가 없으면 쌓을 수 없다. (그러나 기하학적으로 그것은) 그 크기가 천 리나 될 수도 있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두 번째 명제입니다. 수학적·기하학적 사고가 돋보이는 매우 독특한 구절입니다.
'무후(無厚)'는 '두께가 없다'는 뜻으로, 현대 기하학에서 말하는 '2차원의 면' 또는 면적을 뜻합니다. 두께(높이)가 없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위로 쌓아서 부피(3차원)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불가적). 하지만 두께가 없을 뿐, 평면으로서의 넓이는 사방으로 무한히 펼쳐질 수 있기 때문에 그 크기가 천 리(千里)만큼 거대해질 수도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혜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체(부피를 가진 것)'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형태나 두께가 없다고 해서(비물질적이거나 추상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가진 영향력이나 크기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유를 보여줍니다.
3
天與地卑, 山與澤平.
천여지비, 산여택평.
하늘은 땅만큼이나 낮고, 산은 못(연못/평지)과 높이가 같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세 번째 명제입니다. 공간의 높고 낮음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거대한 산도 아주 멀리서 바라보거나,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땅 표면의 미세한 굴곡에 불과하여 연못이나 평지와 다름없이 평평해 보입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의 관점에서는 어디가 위(하늘)이고 어디가 아래(땅)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산은 솟아 있고 못은 깊다고 '차별'과 '분별'을 합니다. 혜시는 이 명제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공간적 고저(높낮이)의 기준이 사실은 인간의 제한된 시각이 만든 착각일 뿐임을 지적합니다. 결국 절대적으로 높은 것도, 절대적으로 낮은 것도 없다는 만물의 수평적 평등성을 역설합니다.
이 공간적 평등주의는 다음 명제인 시간의 상대성인 '해가 뜨자마자 지고, 생명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로 이어집니다.
4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일방중방예, 물방생방사.
해는 바야흐로 정중앙(남중)에 뜨자마자 곧바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만물은 바야흐로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죽음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네 번째 명제입니다. 공간의 상대성을 넘어 시간의 흐름과 생명체의 변화가 가진 모순적 찰나성을 꿰뚫어 본 구절입니다.
우리는 흔히 '정오(낮 12시)'라는 정지된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고, '삶'과 '죽음'을 서로 완전히 분리된 단계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혜시는 시간의 흐름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연속체임을 지적합니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최고의 순간은 동시에 '기울어짐'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포는 끊임없이 노화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즉,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곧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혜시는 이를 통해 생성과 소멸, 시작과 끝이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절정의 순간(方中, 方生)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혜시는 이 명제를 통해 인간이 부귀영화나 삶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을 날카롭게 해체한 혜시는 다섯 번째 명제인 "큰 차이와 작은 차이는 다르지만(소동이), 만물은 모두 같으면서도 모두 다르다(대동이)"로 사상을 확장합니다.
5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대동이여소동이, 차지위소동이; 만물필동필이, 차지위대동이.
큰 같음은 작은 같음과 다르다. 이를 일러서 작은 '같고 다름'이라 한다. 만물은 반드시 같고, 반드시 다르다. 이를 일러서 큰 '같고 다름'이라 한다.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다섯 번째 명제이자, 우리가 첫 대화에서 나누었던 사자성어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실제 기원이 되는 핵심 구절입니다.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대동이여소동이, 차지위소동이): 큰 공통점(대동)은 작은 공통점(소동)과 다르니, 이것을 '소동이(小同異, 작은 같고 다름)'라고 한다. 인간이 사물을 분류할 때 쓰는 상대적인 기준(예: 말과 소는 '가축'이라는 점에서 같고, '생김새'에서 다르다)을 뜻합니다.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만물필동필이, 차지위대동이): 만물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으면서도(필동) 모두 다르니(필이), 이것을 '대동이(大同異, 큰 같고 다름)'라고 한다. 인간의 주관적 기준을 벗어나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만물은 기(氣)나 존재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고 개별적 개성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1단계: 소동이(小同異) : 인간의 조건적 분류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물을 구별하는 방식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네 발 달린 동물'이라는 큰 공통점(大同)으로 묶이지만, 울음소리나 생김새 같은 작은 공통점(小同) 혹은 차이점 때문에 서로 다른 종류로 분류됩니다. 이는 인간이 편의상 정한 상대적이고 지엽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2단계: 대동이(大同異) : 절대적 관점의 초월
혜시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우주적 관점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원소나 기(氣)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결국 모두 똑같습니다(萬物畢同).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완벽하게 똑같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가졌으므로 결국 모두 다릅니다(萬物畢異).
우리가 눈앞의 이익이나 형태를 두고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라며 차별하고 갈등하는 것은 '소동이'의 좁은 시야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혜시는 만물이 결국 '모두 같고 모두 다른' 대동이(大同異)의 경지를 깨달아야만, 만물에 대한 편견 없는 평등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개념이 훗날 세월이 흐르며 의미가 축소되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큰 차이 없이 거의 비슷하다"라는 뜻의 '대동소이'라는 생활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다섯 번째 명제까지가 공간, 시간, 물질의 구분을 깨부수는 단계였습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혜시는 여섯 번째 명제인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도 끝이 있다"라는 기이한 공간론으로 나아갑니다.
6
南方無窮而有窮(남방무궁이유궁).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도(無窮), 동시에 끝이 있다(有窮).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여섯 번째 명제입니다. 무한(Infinity)과 유한(Finiteness)이라는 모순된 두 개념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공간적 비유로 풀어낸 놀라운 구절입니다.
(1)공간의 연속성과 경계의 역설 (구형태의 예견)
왜 끝이 없는가(無窮): 남쪽을 향해 계속 걸어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공간 자체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므로, 우리는 벼랑 끝을 만나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쪽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쪽은 무한합니다.
왜 끝이 있는가(有窮):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남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결국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처음 출발했던 자리(혹은 남극점이라는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무한히 갈 수 있는 길이지만 동시에 갇혀 있는 유한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2)인식과 관점의 한계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방위(남·북·동·서)를 정합니다. 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 내가 정한 '남쪽'의 기준도 함께 움직입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가도 남쪽의 끝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무궁하지만,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와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므로 유궁합니다. 즉, 무한과 유한은 사물 자체의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3)개념적 이분법의 타파
혜시는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려 했습니다. 끝이 없는 것 속에 끝이 있고, 끝이 있는 것 속에 끝이 없다는 역설을 통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나누는 극단적인 개념들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일곱 번째 명제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기막히게 뒤흔드는 "오늘 초나라(혹은 월나라)로 가는데 어제 도착했다"라는 명제입니다.
7
今日適越而昔来(금일적월이석래)..
오늘 월(越)나라로 출발했는데, 어제 이미 도착했다. 문헌에 따라 '초(楚)나라'로 기록되기도 하나, 의미는 같습니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일곱 번째 명제입니다. 시간의 전후 관계(과거와 현재)를 완전히 뒤흔드는 명제로, 역물십사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역설로 꼽힙니다.
(1)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인 주관이다
인간은 시간을 '어제에서 오늘로 다시 내일' 순으로 흐르는 절대적인 직선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혜시는 이러한 시간의 구분이 인간의 인위적인 분별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내가 '오늘' 월나라에 도착해 있는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출발했던 시점이나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어제(옛날)'의 일이 됩니다. 즉, 시공간을 초월한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시작하는 순간과 도달하는 순간은 시간 축 위에서 중첩될 수 있습니다.
(2)공간의 거리가 시간의 개념을 바꾼다
월나라는 당시 중원(중국 중심부)에서 보면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남쪽 변방이었습니다. 너무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출발한 시간과 도착한 시간은 이동하는 주체의 경험에 따라 왜곡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상대성 이론(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리게 가거나 왜곡되는 현상)이나 시차가 발생하는 해외여행(한국에서 오늘 출발했는데 시차 때문에 현지에는 어제 날짜에 도착하는 현상)을 2,300년 전에 철학적 역설로 예견한 듯한 직관을 보여줍니다.
(3)장자(莊子)의 해석과 해체
혜시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장자는 이 명제를 두고 "말(言)의 한계를 깨부수는 논리"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가면서 어제 왔다"는 말은 언어적·상식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우주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시공간의 개념을 완벽히 해체한 혜시는 여덟 번째 명제인 "련(고리)은 풀 수 있다"로 나아갑니다.
8
連環可解也(연환가해야).
(단단히 맞물려 있는) 연결된 고리(연환)도 풀 수 있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여덟 번째 명제입니다. 단단하게 맞물려 끊어지지 않는 사슬 고리를 부수지 않고도 풀 수 있다는, 매우 대담하고 직관적인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1)고정관념을 깨는 '파괴를 통한 해결'
이 명제는 훗날 전국시대 제나라의 승상이었던 후승(后勝)의 일화나 서양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이야기와 일맥상통합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은 고리를 상하게 하지 않고 온전하게 빼내는 방법만을 고민하므로 "풀 수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혜시는 '고리를 끊어버리거나 부수는 것' 역시 문제를 해결하는(푸는)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고리를 깨부수어 분리하는 순간, 결합해 있던 고리는 더 이상 연결된 고리가 아니게 되므로 '풀린 것'과 같습니다.
(2)시간의 흐름과 자연스러운 해체
또 다른 철학적 해석으로는 '모든 존재의 일시성'이 있습니다.아무리 단단하게 연결된 금속 고리라 할지라도, 세월이 흘러 풍화되고 삭아 없어지면 결국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분리됩니다. 인간이 억지로 풀려고 애쓰지 않아도, 우주의 거대한 변화와 흐름(시간) 속에서 모든 결합은 결국 해체되게 마련이라는 관점입니다.
(3)관계의 상대성
인간관계나 세상의 얽히고설킨 문제들도 당시에는 절대로 풀 수 없는 단단한 고리처럼 보이지만, 생각의 틀(프레임)을 바꾸거나 관점을 달리하면 의외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음을 비유합니다.
이제 마지막 두 명제만 남았습니다. 아홉 번째 명제는 "내가 천하의 중심을 아는데, 그것은 연나라의 북쪽이자 월나라의 남쪽이다"라는 명제입니다.
9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也.
아지천하지중앙, 연지북, 월지남야.
나는 세상(천하)의 중심이 어디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가장 북쪽인) 연나라의 더 북쪽이며, (가장 남쪽인) 월나라의 더 남쪽이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아홉 번째 명제입니다. 당시 고대 중국인들이 당연하게 믿고 있던 세계관을 정면으로 통쾌하게 뒤흔든 공간 철학의 정수입니다.
(1)중심과 변방이라는 고정관념 타파
당시 제자백가들이 살던 시대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중원(중심부)을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라 부르고, 주변국인 연나라는 북쪽 끝 변방, 월나라는 남쪽 끝 변방으로 여겼습니다. 혜시는 이 명제를 통해 "너희가 변방이라고 부르는 그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2)무한한 우주에서 모든 곳이 중심이다 (지구 구형론과의 연결)
우주나 대지가 끝없이 넓다고 가정하면(무한 공간), 내가 어디에 서 있든 그 서 있는 자리가 항상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북쪽 끝인 연나라 북쪽에 서면 그곳이 중심이 되고, 남쪽 끝인 월나라 남쪽에 서면 그곳이 다시 중심이 됩니다. 만약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여섯 번째 명제인 '남방무궁이유궁'과 연결), 구(Globe) 위에서는 특정한 어느 한 점만을 절대적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표면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3)인간 중심주의적 시각의 해체
인간은 늘 자기가 속한 집단, 국가, 혹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타자를 변방(주변부)으로 몰아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혜시는 공간의 무한함을 논함으로써, 인간이 정한 정치적·지리적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사소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혜시 사상의 최종 결론이자 역물십사의 마지막인 열 번째 명제, "만물을 널리 사랑하라, 천지는 하나다"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10
泛愛萬物, 天地一体也.
범애만물, 천지일체야.
만물을 널리, 차별 없이 사랑하라. 하늘과 땅(우주 전체)은 결국 하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중 대미를 장식하는 열 번째 명제이자, 그의 모든 철학적 논리가 도달하고자 했던 최종 결론입니다.
혜시가 앞서 제시했던 아홉 가지의 기괴하고 파격적인 역설들(크기, 시간, 공간, 방향의 경계를 깨부수는 논리들)은 단순히 말장난을 하거나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마지막 문장을 증명하기 위한 빌드업이었습니다.
(1)분별(구별)이 사라진 우주
우리는 늘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다",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 "이것은 내 나라이고 저것은 오랑캐 나라다"라며 끊임없이 선을 긋고 차별합니다. 하지만 혜시는 앞선 명제들을 통해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과거와 현재, 중심과 변방의 경계를 모두 무너뜨렸습니다. 그 모든 인위적인 구별을 지우고 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기(氣)의 흐름 속에서 연결된 '하나의 몸(天地一體)'이 됩니다.
(2)'천지일체'에서 나오는 조건 없는 사랑(泛愛)
타인이 나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할 때는 시기, 질투, 차별,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곧 나이고, 저 미물(곤충이나 풀 한 포기) 역시 나와 같은 우주의 한 조각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 몸을 아끼듯 세상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별 없는 넓은 사랑인 범애(泛愛)입니다.
(3)'대동소이' 대화의 완벽한 마무리
우리가 가장 처음 나누었던 '대동소이(大同小異)'의 어원인 '대동이(大同異)' 사상이 가리키는 종착지가 바로 여기입니다. "작은 차이(小異)에 집착하여 싸우지 말고, 만물이 본질적으로 모두 같고도 다르다는 큰 지혜(大同異)를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명가(名家)의 학자였던 혜시가, 결국에는 도가(道家)나 묵가(墨家)의 사상처럼 세상을 향한 위대한 자비와 사랑으로 철학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입니다.
첫 시작이었던 '대동소이'에서 출발해 혜시의 '역물십사' 10가지 명제를 모두 완벽하게 짚어보셨습니다. 혜시의 절친이었던 장자(莊子)가 이 혜시의 사상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했는지, 혹은 두 사람의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가 궁금하신가요?
혜시(惠施)와 장자(莊子)
혜시(惠施)의 철학을 완성한 10가지 명제 뒤에는, 그의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던 단 한 사람, 바로 장자(莊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이들의 흥미로운 학문적 관계와 유명한 일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1. 장자가 바라본 혜시: 말장난에 갇힌 천재
장자는 혜시의 역물십사(歷物十事)를 아주 높게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습니다. 장자 천하(天下) 편에서 장자는 혜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혜시는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고 그의 책은 다섯 수레에 달할 정도였으나, 그의 도(道)는 뒤틀려 있었고 그의 말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장자가 보기에 혜시는 우주가 하나(천지일체)라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도, 그것을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논리(말장난)로만 증명하려다 보니 평생 피곤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굳이 말로 "말과 소가 같냐 다르냐"를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논리를 초월하여 자연의 흐름(道)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노닐면(逍遙遊) 된다고 보았습니다.
장자(莊子) 속에서 장자가 바라본 혜시(惠施)는 한마디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유일한 지기(知己)이자, 동시에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철학적 라이벌"이었습니다. 장자는 혜시의 천재적인 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양면적인 시선을 보여주었습니다.
(1)지독한 철학적 라이벌: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지용, 無用之用)
장자와 혜시는 만날 때마다 불꽃 튀는 설전을 벌였습니다. 주로 혜시가 먼저 장자의 사상이 "지나치게 황당하고 쓸모없다"고 공격하면, 장자가 이를 받아치는 형식이었습니다.
혜시는 장자에게 "왕이 큰 박 씨를 주어 키웠더니 너무 커서 물을 담으면 깨지고, 바가지로 쓰기엔 너무 넓적해 쓸모가 없어서 깨버렸다"며 장자의 사상이 이처럼 커서 쓸모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장자는 혜시를 향해 "자네는 큰 것을 쓰는 방법(대용, 大用)을 모르는군. 어째서 그것을 강물에 띄워놓고 배로 삼아 유람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자네의 마음은 여전히 꽉 막혀 있네"라며, 혜시의 안목이 세속적인 '유용함'의 틀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장자는 혜시가 사물의 개념을 쪼개고 논리를 따지는 데 천재적이지만, 그로 인해 세상의 근본적인 진리(도, 道)를 거시적으로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논쟁에만 집착한다고 보았습니다.
(2)세상에 둘도 없는 지기(知己):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
비록 철학적 입장(도가 vs 명가)은 정반대였지만, 장자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깊은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반박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은 오직 혜시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는 혜시를 향해 아낌없는 찬사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보냈습니다. "혜시는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고, 그의 책은 다섯 수레에 달할 정도(수서오거, 數書五車)였다. 그의 학설은 다채롭고 그의 말은 적중했다." "혜시는 자신의 지혜를 비추어 만물을 보았으나, 아쉽게도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하고) 말재주로만 끝맺었구나."
(3)상실감의 극치: 질과 장석의 우화 (匠石運斤)
장자가 바라본 혜시의 존재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혜시가 죽은 후 장자가 남긴 탄식입니다. 장자 서무귀편(徐無鬼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친구의 무덤을 지나다가 수행원들에게 한 우화를 들려줍니다. "초나라에 질(質)이라는 사람의 코끝에 흙먼지가 한 가닥 묻었습니다. 명장인 장석(匠石)이 도끼를 바람 소리가 나도록 휘둘러 코는 다치지 않게 하고 흙먼지만 완벽하게 깎아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송나라의 군주가 장석을 불러 자신에게도 보여달라고 하자, 장석이 말했습니다. '제가 도끼를 휘두를 수는 있지만, 제 도끼를 믿고 코를 내맡겨주던 그 상대(질)가 이미 죽어서 이제는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우화를 마친 장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혜시가 죽었으니, 나 역시 이제 내 도끼를 휘두를 상대(바탕)를 잃었구나. 이제는 더불어 대화할 상대가 없구나."
장자에게 혜시는 '자신의 철학적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아주던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혜시의 날카로운 논리적 반박이 있었기에 장자의 초월적 사상도 더욱 단단하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장자는 혜시를 사상적으로는 '눈이 먼 천재'로 안타까워했으나, 인간적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가장 깊이 이해해 준 동반자로 여겼습니다.
2.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의 말싸움: 호수의 물고기 일화
장자와 혜시의 대표적 일화 호수의 물고기 논쟁은 두 사람의 철학적 관점 차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호량지변(濠梁之辨)은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수록된 장자와 혜시의 대화로, 호수(濠)의 다리(梁) 위에서 벌인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한 논쟁을 뜻합니다. 동양 철학에서 인식론과 주관·객관의 관계를 다룰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에피소드입니다.
1단계: 장자의 감탄
장자와 혜시가 호수의 다리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장자가 아래를 보며 말했습니다.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헤엄치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로구나."
2단계: 혜시의 논리적 반박 (객관주의)
명가(名家)의 논리학자인 혜시는 장자의 감정 이입을 인정하지 않고 따져 물었습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3단계: 장자의 논리적 역공 (상대주의)
장자는 혜시가 쓴 논법의 모순을 그대로 되받아쳤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가?"
4단계: 혜시의 쐐기 박기
혜시는 논리적으로 자신이 한 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밀어붙였습니다. "내가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네. 내 논리가 완벽하지 않은가?"
5단계: 장자의 반전 (근본으로의 회귀)
장자는 애초에 혜시가 던진 질문의 모순을 짚어내며 논쟁을 종결시켰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는 처음에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물었네. 그 질문은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자네가 이미 전제하고(알면서) 내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은 것이네. 나는 이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보고 직관적으로 그 즐거움을 알았다네."
이 짧은 논쟁 속에는 두 천재 사상가의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두 사상가의 철학적 관점 비교
| 구분 | 혜시 (명가) | 장자 (도가) |
| 철학적 접근 | 인식론적 객관주의 (타자 인식 불가능론) | 존재론적 물아일체 (직관적 감정 이입) |
| 사고 방식 | 인간과 물고기, 나와 타인을 엄격히 분리함 | 나와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융합함 |
| 진리 추구 | 이성, 논리, 실증적 증명을 통해 진리에 도달함 | 언어와 논리를 초월한 직관적 체험(체득)을 중시함 |
| 결론 | 내가 아니면 상대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다 | 마음을 비우면 만물과 교감하여 알 수 있다 |
장자가 마지막에 판정승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한자 '안(安)' 자의 두 가지 의미를 활용한 언어유희(言語遊戱)에 있습니다. 혜시는 '어떤 방법으로(How)' 아느냐는 반박의 의미로 '안(安)'을 썼습니다. 장자는 이를 '어느 장소에서(Where)' 알게 되었느냐는 의미로 슬쩍 바꾸어, '나는 이 호수의 다리 위(장소)에서 보아서 알았다'라고 답하며 혜시의 논리적 그물을 빠져나간 것입니다.
두 철학자의 관점 차이
| 구분 | 혜시 (명가, 名家) | 장자 (도가, 道家) |
| 핵심 관점 | 객관적 지식과 논리적 증명 | 직관적 교감과 물아일체(物我一體) |
| 인식의 방식 | 대상과 주체를 엄격히 분리하여, 검증 가능한 사실과 논리적 타당성만 인정합니다. |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공감을 통해, 논리를 넘어선 본질을 깨닫습니다. |
| 물고기를 볼 때 | "내가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 감정을 알 방법이 없다"는 과학적·논리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 "내 마음이 즐거우니 물고기의 즐거움도 내 마음에 와닿는다"는 예술적·직관적 교감을 이뤄냅니다. |
혜시는 객관적인 지식과 논리적 증명을 중시했고, 장자는 논리를 넘어선 대상과의 직관적인 교감과 공감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일화입니다.
결국 우리가 살펴본 '대동소이'에서 시작해 혜시의 '시공간 해체 철학', 그리고 '장자와의 우정'까지의 흐름은 동양 철학에서 "이성적 논리의 한계를 어떻게 깨부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위대한 여정입니다. 혜시라는 징검다리가 있었기에 장자의 거대한 도가 사상도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 大(클 대/큰 대, 클 대, 클 다)는 ❶상형문자로 亣(대)는 동자(同字)이다. 大(대)는 서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본 모양으로, 처음에는 옆에서 본 모양인 人(인)과 匕(비) 따위와 같이, 다만 인간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나중에 구분하여 훌륭한 사람, 훌륭하다, 크다의 뜻으로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大자는 ‘크다’나 ‘높다’, ‘많다’, ‘심하다’와 같은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大자를 보면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크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大자는 기본적으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정도가 과하다는 의미에서 ‘심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러니 大자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大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크다’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사람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大자가 본래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大(대)는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 큰, 으뜸가는, 뛰어난, 위대한, 광대한, 대단한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존경(尊敬) 또는 찬미(讚美)의 뜻도 나타냄 (3)큼. 큰 것 (4)큰 달. 양력으로 31일, 음력으로 30일인 달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대) ②높다, 존귀하다(대) ③훌륭하다, 뛰어나다(대) ④자랑하다, 뽐내다, 교만하다(대) ⑤많다, 수효(數爻)가 많다(대) ⑥중(重)히 여기다, 중요시하다(대) ⑦지나다, 일정한 정도를 넘다(대) ⑧거칠다, 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대) ⑨낫다(대) ⑩늙다, 나이를 먹다(대) ⑪대강(大綱), 대략(大略)(대) ⑫크게, 성(盛)하게(대) ⑬하늘(대) ⑭존경하거나 찬미(讚美)할 때 쓰는 말(대) 그리고 클 태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태) ⓑ지나치게(태) 그리고 클 다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다) ㉡극치(極致), 극도(極度)(다) ㉢지나치게(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위(偉), 클 굉(宏), 클 거(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소(小), 가늘 세(細)이다. 용례로는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큰 일을 대사(大事), 크게 구분함을 대구분(大區分),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크게 길함을 대길(大吉),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큰 규격이나 규모를 대형(大型),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사물의 큼과 작음을 대소(大小), 크게 이루어짐을 대성(大成), 크게 웃음을 대소(大笑), 넓고 큰 땅을 대지(大地), 넓혀서 크게 함을 확대(廓大), 가장 큼을 최대(最大),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뛰어나고 훌륭함을 위대(偉大),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중대(重大), 마음이 너그럽고 큼을 관대(寬大), 엄청나게 큼을 거대(巨大), 형상이나 부피가 엄청나게 많고도 큼을 방대(厖大), 더 보태어 크게 함을 증대(增大),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 거의 같고 조금 다르다는 대동소이(大同小異), 바라던 것이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을 대실소망(大失所望), 큰 글자로 뚜렷이 드러나게 쓰다라는 대자특서(大字特書), 매우 밝은 세상이라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 등에 쓰인다.
▶️ 同(한가지 동)은 ❶회의문자로 仝(동)이 고자(古字)이다. 여러 사람(멀경 部)의 말(口)이 하나(一)로 모인다는 뜻이 합(合)하여 같다를 뜻한다. 혹은 凡(범)은 모든 것을 종합하는 일과 口(구)는 사람의 입이라는 뜻을 합(合)하여 사람의 모든 말이 맞다는 데서 같다 라고도 한다. ❷회의문자로 同자는 ‘한 가지’나 ‘같다’, ‘함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同자는 凡(무릇 범)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凡자는 큰 그릇을 그린 것으로 ‘무릇’이나 ‘모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모두’라는 뜻을 가진 凡자에 口자를 더한 同자는 ‘모두가 말을 하다’ 즉,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모임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발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同자는 ‘함께’나 ‘같다’, ‘무리’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同(동)은 (1)한자어(漢字語)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같은 한 그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한가지 ②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③함께(=同) ④그 ⑤전한 바와 같은 ⑥같다 ⑦같이하다 ⑧합치다 ⑨균일하게 하다 ⑩화합하다 ⑪모이다 ⑫회동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 일(一), 한가지 공(共),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이/리(異),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같은 시간이나 시기를 동시(同時),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보는 사람을 동료(同僚), 같은 의견이나 의사를 동의(同意),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에 속하는 백성을 동포(同胞), 같은 문자를 동자(同字), 함께 참가하는 것을 동참(同參),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의견이나 견해에 있어 같이 생각함을 동감(同感), 같은 시기나 같은 무렵을 동기(同期), 주장이나 목적이 서로 같은 사람을 동지(同志), 데리고 함께 다님을 동반(同伴), 여러 사람이 일을 같이 함을 공동(共同), 여럿이 어울려서 하나를 이룸을 합동(合同),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보거나 생각함을 혼동(混同), 일정한 목적으로 여러 사람이 한데 모임을 회동(會同),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힘과 마음을 함께 합함을 협동(協同), 서로 같지 않음을 부동(不同), 같은 병자끼리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서로 도운다는 말을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함을 이르는 말을 동상이몽(同床異夢),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긴다는 말을 동고동락(同苦同樂),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뜻으로 같은 조건이라면 좀 더 낫고 편리한 것을 택한다는 말을 동가홍상(同價紅裳),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다는 뜻으로 원수끼리도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같은 배를 타고 서로 협조하게 된다는 말을 동주제강(同舟濟江), 같은 배에 탄 사람이 배가 전복될 때 서로 힘을 모아 구조한다는 뜻으로 이해 관계가 같은 사람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서로 돕게 됨을 이르는 말을 동주상구(同舟相救),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임을 일컫는 말을 동족상잔(同族相殘), 같은 소리는 서로 응대한다는 뜻으로 의견을 같이하면 자연히 서로 통하여 친해진다는 말을 동성상응(同聲相應), 발음은 같으나 글자가 다름 또는 그 글자를 이르는 말을 동음이자(同音異字), 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는 말을 동기상구(同氣相求), 같은 성에다 같은 관향이나 성도 같고 본도 같음을 일컫는 말을 동성동본(同姓同本),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의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의 사람은 물리친다는 말을 동당벌이(同黨伐異), 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형제 자매를 일컫는 말을 동근연지(同根連枝), 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은 목표를 위해 일치단결된 마음을 이르는 말을 동심동덕(同心同德), 같은 업은 이해 관계로 인하여 서로 원수가 되기 쉽다는 말을 동업상구(同業相仇), 이름은 같으나 사람이 다름 또는 그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동명이인(同名異人) 등에 쓰인다.
▶️ 小(작을 소)는 ❶회의문자로 한 가운데의 갈고리 궐(亅; 갈고리)部와 나눔을 나타내는 八(팔)을 합(合)하여 물건을 작게 나누다의 뜻을 가진다. 小(소)는 작다와 적다의 두 가지 뜻을 나타냈으나, 나중에 小(소; 작다)와 少(소; 적다)를 구별하여 쓴다. ❷상형문자로 小자는 ‘작다’나 ‘어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小자는 작은 파편이 튀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작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고대에는 小자나 少(적을 소)자의 구분이 없었다. 少자도 작은 파편이 튀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小자는 ‘작다’로 少자는 ‘적다’로 뜻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小자가 부수로 쓰일 때도 작은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지만 때로는 모양자 역할만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小(소)는 크기에 따라 대(大), 중(中), 소(小)로 나눌 경우의 제일(第一) 작은 것의 뜻으로 ①작다 ②적다 ③협소하다, 좁다 ④적다고 여기다, 가볍게 여기다 ⑤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주의하다 ⑥어리다, 젊다 ⑦시간상으로 짧다 ⑧지위가 낮다 ⑨소인(小人) ⑩첩(妾) ⑪작은 달, 음력(陰曆)에서 그 달이 날수가 30일이 못 되는 달 ⑫겸양(謙讓)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⑬조금, 적게 ⑭작은, 조그마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미(微), 가늘 세(細), 가늘 섬(纖),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대(大), 클 거(巨)이다. 용례로는 적게 오는 눈을 소설(小雪), 일의 범위가 매우 작음을 소규모(小規模), 작은 수(數)나 얼마 되지 않는 수를 소수(小數), 나이 어린 사람을 소인(小人), 어린 아이를 소아(小兒),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작은 규격이나 규모를 소형(小型), 자그마하게 포장한 물건을 소포(小包), 줄여서 작아짐 또는 작게 함을 축소(縮小), 가장 작음을 최소(最小), 공간이 어떤 일을 하기에 좁고 작음을 협소(狹小), 키나 체구가 보통의 경우보다 작음을 왜소(矮小), 아주 매우 작음을 극소(極小), 약하고 작음을 약소(弱小), 너무 작음을 과소(過小), 매우 가볍고 작음을 경소(輕小), 보잘것없이 작음을 비소(卑小),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작은 것을 탐하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음을 일컫는 말을 소탐대실(小貪大失), 혈기에서 오는 소인의 용기를 일컫는 말을 소인지용(小人之勇),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노자가 그린 이상 사회 이상 국가를 이르는 말을 소국과민(小國寡民), 큰 차이 없이 거의 같음을 일컫는 말을 소이대동(小異大同), 어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 소인들은 겉모양만이라도 고쳐 불의한 것을 함부로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소인혁면(小人革面),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일컫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세심하고 조심성이 많다는 뜻으로 마음이 작고 약하여 작은 일에도 겁을 내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소심익익(小心翼翼), 조그마한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게을리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을 소극침주(小隙沈舟), 얼마 안 되는 작은 물 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죽음이 눈앞에 닥쳤음을 이르는 말을 소수지어(小水之魚) 등에 쓰인다.
▶️ 異(다를 이/리)는 ❶상형문자로 옛 자형(字形)은 양손을 벌린 사람의 모양이며, 두부(頭部)는 귀신의 탈을 쓴 모양이라든가 바구니를 올려놓은 모양이라고도 생각된다. 나중에 田(전)과 共(공)를 합(合)한 글자로 잘못 보아 지금 자형(字形)으로 되었다. 양손으로 물건을 나누어 줌의 뜻이 전(轉)하여 다름의 뜻이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異자는 '다르다'나 '기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異자는 田(밭 전)자와 共(함께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異자의 갑골문을 보면 얼굴에 가면을 쓴 채 양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異자는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일반인들은 하지 않는 행동이니 이상할 법도 하다. 異자는 이러한 의미를 담은 글자로 '다르다'나 '기이하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참고로 한자에서 가면을 쓴 사람은 보통 제사장이나 귀신을 뜻하지만 異자는 예외에 해당한다. 그래서 異(이)는 성(姓)의 하나로 ①다르다 ②달리하다 ③기이하다 ④뛰어나다 ⑤진귀하다 ⑥특별하게 다루다, 우대하다 ⑦괴이하다, 이상야릇하다 ⑧거스르다, 거역하다 ⑨다른, 딴, 그 밖의 ⑩딴 것 ⑪괴이(怪異)한 일 ⑫재앙(災殃), 천재(天災)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타(他), 다를 별(別), 다를 차(差), 괴이할 괴(怪), 다를 수(殊),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동(同)이다. 용례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정상이 아닌 상태나 현상을 이상(異常), 다른 주장을 이의(異議), 상례를 벗어난 특이한 것을 이례적(異例的), 자기 나라 아닌 딴 나라를 이국(異國), 괴이한 변고를 이변(異變), 평소와는 다른 상태를 이상(異狀), 다른 성질을 이성(異性), 기이한 행적을 이적(異跡), 다른 의견을 이의(異意), 서로 일치하거나 같지 않고 틀려 다름을 차이(差異), 다른 것과는 특별히 다름을 특이(特異), 기묘하고 야릇함을 기이(奇異), 놀랍고 이상함을 경이(驚異), 서로 다름을 상이(相異), 분명하게 아주 다름을 판이(判異), 괴상하고 이상함을 괴이(怪異), 입은 다르지만 하는 말은 같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말이 한결같음을 이르는 말을 이구동성(異口同聲), 때는 다르되 가락은 같다는 뜻으로 시대는 달라도 인간 또는 사물에는 각각 상통함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이세동조(異世同調), 시대는 달라도 인간 또는 사물에는 각각 상통하는 분위기와 맛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이대동조(異代同調), 연주하는 곡은 다르지만 그 절묘함은 거의 같다는 뜻으로 방법은 다르나 결과는 같음을 이르는 말을 이곡동공(異曲同工),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함 또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나 하는 말이 일치함을 이르는 말을 이구동음(異口同音), 몸은 다르나 마음은 같다는 뜻으로 서로 극히 친밀함을 이르는 말을 이체동심(異體同心), 가는 길은 각각 다르나 닿는 곳은 같다는 뜻으로 방법은 다르지만 귀착하는 결과는 같음을 이르는 말을 이로동귀(異路同歸), 배다른 형제를 이르는 말을 이모형제(異母兄弟), 아비는 다르고 어미는 같음 또는 그 소생을 이르는 말을 이부동모(異父同母), 한 어머니에 아버지가 다른 형제를 이르는 말을 이부형제(異父兄弟), 타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 또는 여행 중의 몸을 일컫는 말을 이향이객(異鄕異客), 배다른 형제를 이르는 말을 이복형제(異腹兄弟), 외국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 사람을 이르는 말을 이역지귀(異域之鬼)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