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플러스의 게시물은 중앙일보 편집 방향 및 논조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인구 3억의 유럽 인구가 국경을 넘나들며 사용하고 있는 화폐 ‘유로’.
유로가 한국의 원이나 달러, 엔, 위안 등 다른 나라 지폐와 다른 점은 무얼까.
바로 화폐에 인물 초상화가 없다는거다.
각국 지폐에는 그 나라의 역사적 위인의 초상화나 상징물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가면 침략자가 된다. 유로에서 인물이 화폐 모델로 적절치 않은 이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유로 지폐에는 실존하지 않는 문이나 다리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그런 유로 지폐에 예외적으로 도입된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에우로페(유로파)다. 지난 2월 공개된 20유로 신권은 위조 방지를 위해 지폐에 ‘초상화 창’이 만들어졌다. 이 창을 빛에 대면 투명해지면서 에우로페의 얼굴이 양면에 드러난다.
유럽중앙은행이 11월부터 발행하는 20유로짜리 새 화폐. 오른쪽 상단에 그리스신화의 에우로페 여신의 초상화가 홀로그램으로 그려져 있다.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는 황소로 변한 바람둥이 제우스의 등에 올라탔다가 크레타 섬까지 납치된다. 바다를 건너오느라 지친 제우스가 에우로페를 내려놓고 사랑을 나눴던 곳에 크노소스 궁전이 세워지고 그들의 장남인 미노스가 고대 그리스문명을 일구기 시작했다. 유럽 최초의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기원전 1170)이 탄생한 것이다. 에우로페가 대륙의 명칭인 유럽(Europe)의 어원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를 새 지폐 모델로 채택하는데 그 어느나라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을 터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에우로페 초상 도입은 오히려 유럽 내 각국이 하나의 명칭으로 묶이게 된 근원을 떠올리게 하고, 통합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원형과 철학이 탄생한 지역으로 인식해왔다. 이런 이미지가 정착한 것은 서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숭배가 확산된 18세기 무렵이다. 그리스도 이후 국민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런 이미지를 십분 활용했다.
하지만 그리스는 서유럽과 전혀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서유럽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함께 거치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동방정교의 세계관을 갖게 됐다. 오히려 사회 문화면에서 러시아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400년간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유럽 국가들은 사회,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유럽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를 제외하곤 EU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1981년 당시 그리스를 유럽공동체(EU)의 10번째 회원국으로 맞이한 영국의 피터 캐링턴 외무장관은 “오늘날 유럽의 정치와 문화는 3000년 그리스의 유산이 있었기에 존재한다. 회원국 승인은 그리스에 대한 (유럽의) 보은”이라고까지 했다.
채무국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왼쪽)와 채권국을 대표하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
2001년 유로 가입때도 EU는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그리스를 대우했다. 앞서 EU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1999년 이탈리아의 유로 가입때와는 대조적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때도 재정적으로 열악한 그리스를 EU가 대폭 지원했다. ‘재정 불량국가’ 그리스의 유럽퇴출까지 거론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 사태는 일정부분 EU 전체가 떠안아야 하는 업보인 셈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의 유로존 정상들은 13일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그리스가 혹독한 추가 개혁안을 이행해야 하는 단서가 달렸다. 부가가치세를 높이고 연금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런 개혁안을 즉각 시행하는 조건으로 3년간 860~870억 유로(108조~109조원)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국가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겐 더욱 혹독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에우로페 초상화가 들어간 지폐는 현재 5유로와 10유로만 유통되고 있다. 20유로 신권은 오는 11월25일 시중에 풀릴 예정이다. 그리스의 ATM 기계에서 나오는 20유로 지폐 속 에우로페의 얼굴을 그리스인들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