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금이요, 덕트 테이프(Duct Tape)는 은이다.’
미국의 한 펑크밴드가 영국 속담인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를 패러디한 노래의 제목이다. 덕트 테이프의 우수한 접착력이 침묵을 위한 입막음에 최고라는 뜻을 담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덕트 테이프는 포장이나 수리에 쓰이는 테이프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청 테이프의 원조격이다. 한국에서도 청 테이프는 가격이 저렴하고 활용도가 높아, 각종 산업 현장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가구, 생활용품 수리 등에 사용된다. 대학생들은 대자보나 동아리활동 포스터를 붙일 때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피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제모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회색 덕트 테이프. <출처: 달라스 무역관>
우리나라에 청 테이프가 있다면, 미국에는 덕트 테이프가 있다. 덕트 테이프는 1942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탄약상자의 습기를 막기 위해 존슨앤 존슨(Johnson & Johnson)사가 개발했다. 이후 민간에 보급되어 환기구 공사에 주로 사용되면서 배관을 뜻하는 ‘덕트(Duct)’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덕트 테이프라고 불리게 됐다. 아울러 오리를 뜻하는 ‘덕(Duck)’이라는 단어를 붙여 ‘덕 테이프(DuckTap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오리 깃털처럼 방수가 잘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미국에서는 전자가 조금 더 일반적이기는 하나 두 단어 모두 사용되고 있다.
덕트 테이프는 면 소재의 테이프에 한쪽 면에는 폴리에틸렌 수지를 코팅하고 다른 면에는 고무를 기반으로 한 접착제를 발라서 만든다. 접착력이 우수하고, 직각으로 찢으면 손으로도 쉽게 뜯어지므로 원하는 길이만큼 잘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미국에서는 3M, 헨켈(Henkel), IPG 등이 덕트 테이프를 제조하고 있다. 우수한 접착력과 내구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 덕트 테이프는 특히 각종 건설공사 현장, 배기구 및 파이프 설비, 가정용품 수리 등에 주로 사용된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Forbes)>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 도구 20가지 중 하나로 덕트 테이프를 선정하기도 했다.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WD-40(항공우주 분야에서 부식 방지 등을 위해 최초로 개발됐으나, 이후 민간에서 윤활제로 상용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스프레이형 제품)’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움직이면 덕트 테이프를 사용하라”는 말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 할 정도다.
역사 현장에서 빛을 발하다
아폴로 13호 착륙선의 이산화탄소 제거기 수리에 쓰인 덕트 테이프. <출처: 유니버스투데이(universetoday) 홈페이지>
대표적으로 우주탐사에서 덕트 테이프의 활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70년 4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의해 발사된 아폴로 13호는 달 착륙을 앞두고 고장이 나 지구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우주 상공에서 산소탱크 중 하나가 폭발했고, 비행사들은 사령선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착륙선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폭발로인해 고장 난 이산화탄소 제거기를 사령선에 연결하는 수리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때 공기가 새지 않도록 각종 호스를 연결하고 부품을 고정하는 데에 덕트 테이프가 사용된 것이다. 덕분에 아폴로 13호는 무사히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의 한 우주 관련 잡지가 아폴로 13호를 구한 13가지 중 하나로 덕트 테이프를 꼽기도 했다.
아폴로 17호의 바퀴 흙받이 고정에 쓰인 덕트 테이프.
<출처: 미국 항공우주과학 학습 홈페이지>
1972년 아폴로 17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을 때도 달 탐사 차량에 덕트 테이프가 사용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월진(月塵)이 큰 장해물이었는데,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흔히 ‘펜더(Fender)’라고 불리는 바퀴 흙받이가 필요했다. 결국 우주비행사들은 이를 고정하는 데 덕트 테이프를 사용했고, 그들은 덕트 테이프야말로 최고의 엔지니어링 도구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헬기 정비공들에게 덕트 테이프가 ‘시속 100마일 테이프’라고 불리기도 했다. 덕트 테이프로 수리하면 시속 100마일(160km)의 강풍에도 견딘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이들은 헬기의 회전 날개가 고장 났을 때나 회전날개의 균형이 맞지 않아 균형을 맞출 때에도 덕트 테이프를 사용해서 고쳤으며, 총알에 맞아서 뚫린 구멍을 막는 데도 덕트 테이프를 사용했다. 그 외 각종 항공기와 전투 무기 수리에도 덕트 테이프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덕트 테이프로 치료하다
미국의 디스커버리(Discovery) 채널의 <미스버스터즈(MythBusters)>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주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인간이 덕트 테이프만 가지고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출연자들은 덕트 테이프로 물통을 만들고, 가방, 모자, 신발, 해먹을 만들었다. 그들은 덕트 테이프로 나뭇가지를 엮어서 창을 만들어 물고기를 사냥하기도 하고 불을 지피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덫을 놓고 사냥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대나무와 엮어서 배를 만들어 바다에 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배도 단순한 뗏목 수준이 아니라, 그 모양새가 아주 놀라울 정도였다.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 덕트 테이프 ⓒJoe Loong/flickr | |
한 서바이벌 온라인 블로그에는 덕트 테이프를 활용한 12가지 생존 팁이 소개됐는데, 그 용도가 정말 다양하고 창의적이었다. 살이 베이거나 찢어졌을 때 덕트 테이프를 작게 뜯어서 상처 부위에 붙여 응급처치하고, 골절이 되었을 경우 부목을 고정하는데에도 이를 사용할 수 있다. 신발이 찢어지거나 낡았을 때 임시 방편으로 묶을 수 있으며 나뭇가지와 칼을 붙여서 창을 만들 수도 있다. 태풍이 닥쳤을 때는 창문에 테이프를 붙여서 창문의 강도를 높이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무인도 프로그램에서처럼 배를 만들거나 덫을 만드는 데도 활용 가능하다. 음식물이 공기와 접촉하지 못하게 용기를 봉합하는 데도 사용하며, 그 외 수갑, 새총, 헬멧을 만들 수도 있다. 덕트 테이프만 있으면 무인도뿐만 아니라 지구 어디서에서든 생존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덕트 테이프는 피부 사마귀 치료에도 활용된다. 미국의 피부과학회(The American Academy of Dermatology)는 피부의 사마귀를 없애는 방법으로 덕트 테이프를 활용하는 법을 소개했다. 사마귀 부위에 덕트 테이프를 찢어서 붙여두고 며칠 동안 매일 교체하면서 다시 붙이기를 반복하면 사마귀의 층이 벗겨지며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이러한 치료법은 미국 각종 잡지나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미국의 매디건육군의료센터(Madigan Army Medical Center)에서 사마귀 환자들을 덕트 테이프로 치료한 결과, 85%가 성공적으로 완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개인에 따라 피부와 체질이 다르므로 사전에 의사와 상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테이프로 예술을 하다
요즘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월마트(Walmart)와 타깃(Target), 크로거(Kroger) 등에서는 기존 회색의 덕트 테이프뿐 아니라 형형색색의 덕트 테이프가 판매되고 있다. 덕트 테이프는 이제 뛰어난 접착력으로 실용적인 부분에만 활용되는 테이프가 아니다. 학생이나 성인들은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덕트 테이프를 활용해 지갑, 머리핀, 가방, 장신구, 옷 등 각종 패션 아이템들을 제작하고, 이를 소셜미디어와 각종 포털사이트에 게재하여 솜씨와 개성을 뽐내고 있다. 덕트 테이프 공예품이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고있는 것이다.
| | |
덕트 테이프를 활용해 만든 각종 공예품. <출처: 덕트 테이프 패션 홈페이지> |
현재 미국에서는 덕트 테이프를 활용한 만들기에 대한 책이 50여 종 이상 출간되어 있으며, 덕트 테이프 만들기 키트 제품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조작이 용이하다는 점이 이러한 인기몰이에 한몫하고 있다. 다른 만들기 재료에 비해 단순하고 다루기가 쉬워 덕트 테이프 하나만으로도 많은 작품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유튜브(YouTube)를 비롯한 각종 소셜미디어에는 덕트 테이프를 활용한 공예품 제작 동영상이 다수 올라와 있다.
특히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는 매년 덕트 테이프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약 6만여 명이 참가하고 있는 이 축제에서는 덕트 테이프 작품 경연대회가 열리며, 각종 퍼레이드 행사 등도 펼쳐진다.
이와 같은 여러 활용도에 따라, 덕트 테이프에 대한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더욱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테이프가 출시되고 있어 소비자들은 각자의 개성에 맞는 제품을 가까운 상점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매년 더욱 다양한 덕트 테이프 제품들이 시장에 나올 것이라고 한다.
| |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덕트 테이프 축제 모습. <출처: 덕트 테이프 축제 홈페이지> |
한국에선 아직? 그렇기에 가능성이 있다
덕트 테이프는 실용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성향에 딱 들어맞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앞으로도 덕트 테이프의 인기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욱 창의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덕트 테이프가 유통되고 있고 책과 신문기사에서 응용 사례가 소개된 바 있으나, 아직까지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다. 덕트 테이프의 일종인 청 테이프는 국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덕트 테이프는 다소 생소한 제품이다. 특히 패션 아이템이나 공예품 소재로서의 수요는 거의 없다.
미국 상점에서 판매 중인 형형색색의 덕트 테이프들. <출처: 달라스 무역관>
그러나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각종 온라인 매체를 통해 트렌드가 전 세계적으로 시시각각 공유되는 시대에,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덕트 테이프에 대한 인기는 점점 퍼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트렌드가 변화하고, 새로운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우리나라에도 머잖아 덕트 테이프가 ‘핫한 아이템’으로 부상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