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첨지의 <만주벌판유랑기 2>. 마지막 ‘초본아타’, 졸본성(卒本城)
<석양녁 혼강에 어린 졸본성의 웅자> 
*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단동(丹東:딴둥) 시가지 앞을 흐르는 압록강을 뒤로하고 발길을 재촉하여 고구려의 발생지인 환인(桓仁:환런)으로 달렸다. 졸본성 위의 하늘호수, 천지(天池)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근데, 졸본성은 들어본 것 같지만, ‘초본아타’는 뭐래요?
자, 아직은 우리에게 아주 낯선 단어이겠기에, 부연설명을 좀 해야겠다. ‘초본’은 유목민들의 별인 ‘금성(金星)’을 뜻하고 ‘아타’는 ‘고향(鄕)’ 또는 ‘성(城)’을 의미한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금성’은 저녁나절 서쪽하늘과 새벽 동쪽하늘 모퉁이에서 볼 수 있는 별로, 구미권에선 로마신화에서의 비너스(venus)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샛별, 서라벌, 개밥바라기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하루에 잘해야 한, 두 번 정도 잠깐 볼 수 있는 이 별은 마치 북쪽 밤하늘의 한결같은 북극성처럼 자리변동이 없어서 동, 서쪽 방향을 가리키기에 나침반이 없던 옛날에는 유목민들의 갈 길을 인도해주는 별이었다고 한다.
그럼 “초본아타가 유목민의 별, 금성이라고…?”
그럼 그건 이해했다고 치고,
“마지막 ‘초본아타’ 라는게 뭔 소리여?”
아직 본격적으로 발길을 내딛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유랑길의 숨은 의도를 싱겁게 드러내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뭐, 절차나 형식이 뭐가 중요하랴. 이글을 읽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면 될 것이지… !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초본아타’=‘금성(金星:金城)=샛별=서라벌=‘졸본성’이라는 말이 된다. 백과사전이나 국사교과서에 쓰인 말이 아니기에, 뭐 딱히 ‘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기에, 아직은 한 두 사람의 주장에 불과한 일종의 ‘가설’인 셈이지만, 내가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유는 설득력 있는 전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더, 음운학적으로 풀이하면. 주몽(朱蒙)이 처음 나라를 세운 ‘졸본성’과 ‘초본아타’는 아득히 먼 지역성과 아득한 시간성 때문에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좀 깊게 들여다보면 음운학, 인류학, 고고학, 혈통학적으로도 연결고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시인 김지하와 몇몇 석학들의 현지에서의 다방면에 걸친 확인에 의하면<김지하, 『예감』,이룸, 2007>, 내가 지금 가고 있는 환인의 졸본성 말고도 중앙아시아에도 또 다른 졸본성인 ‘초본아타’가 있다고 한다. 바로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입구에 거대한 환영 입간판이 세워져있는데 그 뒤 나직한 언덕에는 알파벳으로 흰 돌을 쌓아 만든 큰 글씨들이 보인다. ‘쵸폰아타(CHOPONOTA)’ 라고…
그리고 또 한 곳,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탄들이 신성시하는 곳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악호수인, 천산산맥의 이시쿨 호수가의 마을이름이 ‘촐본아타’라는 것이다. 나아가 김지하시인은 또 1천6백m의 그 이시쿨호수에서 마치 우리의 백두산 천지(天池)와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우리나라 최초의 샤먼인 단군할배(檀君)가 하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신성한 저자거리인 ‘神市’의 이미지를 아주 강하게 느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학자 정형진도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일빛, 2006>에서, 다음과 같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초본아타는 기마민족 고구려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궤적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일련의 연결고리는 ‘고깔모자 루트’ 상에서 여러 곳 발견되는 데, 이 모두가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인 ‘졸본성(五女山城)’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렇게 도처에 ‘졸본성’을 건설하면서 이동하며 살았던, 이들이 흉노의 한 부류인 훈족인지 또는 부여족의 또 다른 선조인지는 비록 아직은 확인할 수 없지만, 먼 중앙아시아 깊숙이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의 체취가 묻어있다는 것은 이채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더 올라가 우리들의 까마득한 조상이라는, 환인할배와 마고할매의 고향!
아! 파미르고원!
<신새벽의 졸본산성, 역시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 그렇다면. 초저녁 하늘에 빛나는 금성이라는 뜻의 졸본성, 즉 ‘초본아타’는 아득한 옛날 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우리 배달민족의 조상들이 수 천년 동안 초원루트를 따라 이동하던 곳곳마다 건설하였던 성곽의 이름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신라의 서라벌도 역시 또 다른 ‘초본아타 군(群)’의 한 곳이겠지만,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예맥민족이 유목생활에서 농경민족으로 변화되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마지막 “유목민들의 마음의 별인, 금성”은 고구려의 졸본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의 조사에 위하면 더 많은 ‘초본아타 군’이 나타나겠지만 오늘을 대충 ‘초본아타’ 란 화두로 품고 우선 저 멀리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저녁노을 속에 붉게 물들어가는, 혼강(渾江)속에 거꾸로 비쳐있는 웅장한 졸본산성으로 달려가기로 하자.
* 지금은 청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자치현으로 변한 환인시내에서 선 잠을 자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신 새벽에 차를 대절해 동북쪽으로 8km 떨어진 오녀산성 아래 도착했다. 참 중국에서는 졸본성을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부른다,
하여간 개장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던 문지기를 강제로 깨워, 2004년, UNSCO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것만으로 대폭 인상된, 만만치 않은 입장료와 팁까지 쥐어주고 마치 안개 속으로 뻗어있는 하늘나라로 향한 가파른 계단을 기어올라 마침내 서문의 성곽유지를 지나 823m에 위치한 산성의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온통 구름의 바다였다. 가끔 구름 속으로 문뜩문뜩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柳花)의 로맨스가 서려있는 비류수(沸流水), 즉 지금의 혼강이 거대한 백사(白蛇)처럼 굽이치고 있었다.
때는 BC37년. 고구려의 첫 새벽이 밝았던 곳이다. 하늘 신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생긴 자손들이 만든 나라이니, 곧 “하늘과 물의 만남” 이 바로 고구려의 새벽이니, 다소 샤먼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곳은 집안(集安:지안)의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40여년 동안 고구려의 심장이었던 곳이고 천도 이후로도 태초의 개국지로써 주몽의 숨결이 스며있는 신성한 장소로 중요시 되었던 곳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하늘계단>

< 비교적 성곽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산성의 서문 입구 >

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으로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켜 영락(永樂)이라는 호를 가진 광개토대왕, 일명 호태왕(好太王)의 비문碑)를 보면,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셨다....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설화에 따르면 "7월에 하늘이 보내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불과 7일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뒤덮인 속에서 나무를 찍고 다듬어서 왕궁을 짓고 성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한구절인 "하늘이 보내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불과 7일 동안에…“라는 구절은 하늘에서 내려온 샤먼의 군사인 신장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한 나라의 시조를 하늘의 부름을 받고 내려온 신성한 인물로 신격화하려는 대목이리라.
* 가쁜 숨을 고른 다음 먼저 천지(天池)라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번 유랑의 또 다른 ‘토끼’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고조선부터의 임금들이 순행 중에 백두산 천지를 대신해 하늘의 조상들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천재(天祭)를 지내고 돌아갔다고 전하는 곳이다.
<산성 위의 천지>

<천지에는 샤먼적인 기원의 깃발이 걸려있다>
<천지에서 물을 깃는 고구려어인들>
<남쪽 잔망대의 운해>

<출토된 토기>

<고구려 시조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산성을 내려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쪽 끝에 있는 전망대로 가서 발아래의 구름바다를 내려다보며 고구려란 왕조의 흥망성쇠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2쳔 년이란 세월도…
아! 고구려!
주몽이여~ 유화부인이여~소서노여~
<계속>
첫댓글 아~ 몇년전 저도 다녀온곳 이군요^^ 정말 난공불락,천혜의 요새 '오녀산성' 이라 명칭을 바꿔서 부르던...
역사 소설 읽는 듯한 느낌 입니다
멋집니다...새벽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