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훼손한 임금의 길… “광화문 월대 100년만에 전모 확인”
문화재청, 10월까지 복원 계획
어도 포함 48.7m×29.7m 규모
장대석 2단으로 쌓아올려 만들어
동쪽 부분은 비교적 원형 보존돼
일제강점기 훼손돼 땅에 묻혔던 서울 종로구 광화문 월대(月臺)가 발굴조사를 통해 1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복궁을 뒤로하고 육조거리 방향으로 뻗어 있던 광화문 월대가 최근 발굴된 모습. 월대를 덮은 ‘Y’자 모양은 1923년 전차 선로가 설치됐던 흔적이다. 문화재청·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선로가 설치되며 땅속에 묻혔던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의 전모가 100년 만에 확인됐다. 경복궁의 얼굴 격인 광화문이 월대 복원으로 제 모습을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월대는 광화문 정문에서 이어지는 너비 7m의 어도(御道)를 포함해 전체 너비 29.7m, 길이 48.7m 규모로 파악됐다. 문화재청·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문화재청은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9월부터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 1620㎡를 발굴한 결과 임금이 다니던 너비 7m의 어도(御道)를 포함해 남북 방향 48.7m, 동서 방향 29.7m에 이르는 월대의 정확한 규모가 밝혀졌다고 25일 밝혔다. 1865∼1868년 경복궁 중건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營建日記)’ 등을 통해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월대의 실제 모습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비교적 원형이 보존된 월대 동쪽의 모습을 확인해 월대 복원을 위한 실물자료를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 임금 다니던 어도 좌우로 신료의 길 분리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문인 광화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월대를 쌓았다. 1866년 3월 3일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고 나온다. 덕수궁과 창덕궁 정문에도 월대가 조성됐지만 좌우를 난간으로 두른 건 광화문 월대뿐이다. 학계에서는 경복궁 안팎을 잇는 광화문 월대에서 외국 사신 맞이 등 각종 왕실 행사가 열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월대 좌우 가장자리에 길이 120∼270cm, 너비 30∼50cm, 두께 20∼40cm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올려 만든 기단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월대의 높이는 약 70cm였다. 월대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
월대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3단의 계단석도 파악됐다. 어도가 시작되는 중앙 부분 계단에서는 동쪽에 소맷돌(계단 좌우 양단을 장식하거나 마감하는 부재)이 발견돼 임금이 다니는 가운데 길목과 신료들이 드나들던 동·서쪽 길목이 분리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차선로로 덮인 월대 서쪽과 어도 주변은 일부 훼손된 채 발굴됐다.
● 일제강점기 선로 설치, 월대 깔아뭉개
훼손되기 직전인 1920년대 초 광화문 월대의 모습. 문화재청·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월대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 4단계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 광화문 월대를 촬영한 사진 자료를 보면 1890년대까지는 월대 남쪽 계단부는 중앙 어도와 좌우 신료의 길이 모두 계단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어도 계단이 흙으로 덮여 경사로로 바뀌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동·서쪽 계단도 경사로로 변경됐고, 전차선로가 설치된 1923년 월대 좌우 난간석이 제거되고 월대가 모두 흙으로 덮였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월대 위를 ‘Y’자 모양으로 지났던 전차선로의 원형도 파악됐다. 선로는 1966년까지 사용되다가 세종로 지하도를 조성할 때 콘크리트로 덮였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이번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올 10월까지 광화문 월대의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다. 원형이 훼손된 뒤 경기 구리시 동구릉 등에 일부 이전됐던 월대 난간석과 하엽석(荷葉石·난간석 아래 조각된 받침석)을 재사용할 방침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광화문 월대 복원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던 경복궁의 역사를 완전히 바로잡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월대를 덮었던 전차선로 유적은 일부가 경기 의왕시 철도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된다.
이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