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
노자의 도덕경은 ‘관묘’(觀妙)로 시작되는데, 이는 뭔가 ‘규정하려는 의욕’(욕심)을 버리면 사물의 미묘함과 신비함을 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처음부터 선문답하듯 이해하기가 어렵다. ‘도(道)라고 일컬을 수 있는 도(道)는 항상 그런 도(道)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첫 문장부터 해석이 난해하여 그 풀이가 다양하다. ‘도(道)’란 원리를 뜻한다. 그래서 하늘의 시간 운행원리를 천도(天道)라 하고, 하늘의 원리에 따라 땅에서의 생육하는 원리(生育原理)를 지도(地道)라 한다. 즉 도(道)는 인간과 우주의 운행방식 같은 거대한 시스템의 원리이므로 한마디 말로 규정할 그런 속성이 아니어서 그 해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속성이나 개념을 정의하고 이름 짓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천지창조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 이유는 자연과 그 섭리 운행은 창조주에 속한 것이지만, 그 피조물의 사용자는 사람인 까닭이다. 이름은 상징에 불과하므로 사물의 본체를 모두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 플라톤은 이데아로 설명하였다. ‘개별 사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형상 즉 이데아는 본(本)이다. 이에 비해 사물은 완전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물(模寫物)에 불과하다. 물리적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지마는 이데아 영역은 변화가 없고 영원하다. 그래서 이데아는 개별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자체’로서 표현된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려면 이데아에 가깝게 접근하여야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한 것이 거의 모든 보통 사람의 성정(性情)이다. 그러할 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렇게 언어가 침묵하는 곳, 그곳에서 예술은 시작한다. 언어는 세계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림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세계를 보여준다‘라고 구절로 그의 ’논리 철학 논고‘를 끝맺었다. 즉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없으면 차라리 침묵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접하거나 체험했을 때, 그 본체를 잘 알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피상적으로 섣부르게 그 내용을 알리거나 얘기하기를 즐긴다. 오래된 과거의 이런 예를 들어보자. 관직으로부터 물러나 고향에서 산림과 더불어 여유자적(餘裕自適)하게 보내는 선비에게는 그동안 잊었던 모든 자연경관이 새로울 것이며 신비롭고 즐거울 것이다. 그는 옛친구들을 자신의 초가로 불러와 술잔을 기울이는 신선놀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담소를 즐길 것이다. 농사를 짓는 그 고향 친구들에게 자연은 생활공간이며 그들도 자연의 한 부분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을 것이나, 헤르만 헤세의 말과 같이,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근면과 노고로 가득 차 있다. 성급함이 없고 걱정 따위는 없는 생활이다, 그런 생활 속의 밑바탕에는 경건함이 있다. 대지, 물, 공기, 사계의 신성함에 대해 믿음이 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지닌 생명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지만 그 선비에게는 자연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경건함과 신성함에 대한 믿음과 생명의 힘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선물인 양 기쁨으로 가득 찰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두고 채근담(菜根譚 후(後) 1, 조지훈 역)은, ’산림(山林)에 숨어 사는 사람은 아직 산림의 참맛을 깨닫지 못하였고, 명리(名利)를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그 마음이 명리를 잊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번역자는 이를, ’진실의 묘미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 있으니 말로 표현되는 경우는 그 진실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자연과 벗하는 즐거움을 짐짓 뇌는 것이 바로 속된 마음이니 무엇으로 산림의 참맛을 알랴! 통달한 사람은 싫어함이 없다. 집착함이 있어야 싫어함이 있으니 명리에 관심이 없으면 또 무슨 명리를 싫어하는 마음이 따로 있으랴‘라고 풀이하였다.
왜 낙향한 선비는 자연의 본질과 도(道)의 신묘함을 보지 못하고 그에게 보이는 자연현상에만 환호(歡呼)하였나? 그는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를 볼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자연현상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 낯선 아름다움이 낯익은 일상으로 변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물이 자기 생활에 녹아 일체가 되어야만 이데아를 볼 수가 있다. 논어에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공자의 말과 같이, 그 낙향한 선비는 자연을 알고 좋아할 경지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는 과연 ’자연과 벗하는 즐거움을 짐짓 뇌는 것이 바로 속된 마음이니 무엇으로 산림의 참맛을 알랴!‘라는 채근담의 말을 이해했을까?
산림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의 속마음엔 아직 세상의 일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일과 정리하지 못한 일로 그의 생각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는 그 보상을 자연에서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그가 세상일을 잊고 진실로 자연을 즐기는 자라면, 구태여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생활에서 그 아름다움이 녹아 자연스레 발로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이를 도덕경으로 풀어보면 ’(사물을 규정할)욕심을 버리고 그 본질을 보려 한다면 도(道)의 신묘함을 볼 것이나 (故常無欲以觀其妙, 고상무욕이관기묘), 사물에 이름을 붙여 그 정의(定義) 속에 가두어두려 한다면 실체에 이르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를 것이다‘(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이관기요)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선비의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이 된다. 지난해 2월 말 이곳 산동네로 거처를 옮긴 후 풍광에 취해 마치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를 흉내 내듯, 산중일기(山中日記)를 쓴다며 법석을 떨었던 것이, 채근담에서 이 글을 보자 부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풀과 나무와 꽃을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취향과 기준으로 생각하고 해석한 것이 더욱 그러했다. 창조주의 질서와 섭리에 따라 운행하는 자연에 대해 제멋대로 규정하고 재단하고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음인 것을 깨닫는데 무려 1년이 걸린 셈이다.
1년이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강‘에는 이 1년을 이렇게 설명한다. ’농부가 1년 동안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얼마나 시간을 쓰는지 생각해보라. 섬세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꽃밭이 그의 발밑에 펼쳐진다. 꽃처럼 어여쁜 수많은 새가 아침저녁으로, 어떤 녀석들은 1년 내내 그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머리 위엔 멋진 하늘이, 발밑에는 멋진 카펫이, 그 밖에도 얼마나 많은가? 농부는 이 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가? 꽃을 욕하거나 새를 쏠 마음이 들 수 있겠는가?‘ 라고 농부가 느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그래서 하마 오래전에 써본 시를 꺼내어 보았다.
붙임 :
’어느 시인의 꽃에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그는 이미 하나의 완전함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마자
그는 그 부름에 갇힌 채
한낱 부분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더이상 불러주지
않듯이
내가 내 부름의 둘레에 갇히지 않도록
누구도 내게 이름을 불러주지 마오.
그리하여 그와 내가
어느 이름도 간직하지 않는
그냥 온전한 자유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