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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 전망을 즐기지도 못하고 숲길에 갇힌 느낌이었는데 사흘째 시원한 전망으로 멋진 갈무리를 했다. 백두대간 10회차로 9일 경북 상주와 충북 횡간을 잇는 큰재를 출발해 이틀 동안 일종의 빌드업을 하고 11일 속리산을 뜻하지 않게 속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9일 오전 6시 43분 서울역을 출발하는 KTX로 7시 48분 대전역에 도착했다. 8시 6분 황간행 무궁화호로 갈아 탔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장성주 기사님(010-3404-1098)에게 전화를 걸어 8시 50분 황간역 앞으로 와달라고 부탁해 만났다. 큰재에 도착하니 9시 26분이었다.
사실 가기 전부터 상당히 재미없는 대간 길이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조망하는 맛을 시원하게 선사하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길은 편안하나 활엽수 가지들이 숲에 드리워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비재 5.4km 개터재 6.5km 백학산 6.8km 지기재 4.5km 신의터재(총 23.2km, 8시간)
백두대간 숲 생태원(예전 인성분교)이 들머리인데 직원 분이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 정중히 마다 하고 숲길에 들어섰다. 회룡목장 들머리에서 잠깐 임도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큰재는 해발 고도 324m 밖에 안 되는데 숲길에 들어서니 오른쪽은 꽤 깊은 벼랑 위란 점이 신기했다. 오른쪽은 상주 공성면 오광리 일대다.
큰재에서 회룡재까지는 3.9km. 그 뒤도 크게 길은 달라지지 않는다. 개터재(380m)에 예전에는 옛고개란 이정표가 있어 혼동스러웠다고 했는데, 상주시에서 정비를 했는지 '백두대간'이라고 돼 있었다. 백학산(618m) 자락의 공성면 효곡리 큰마마을은 배산임수로 살 만한 곳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대간 깊숙이까지 인간과 개발이 밀고 들어와 있다. 소사고개 일대처럼 밭 사이로 대간 종주꾼들이 걸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은 위기감이 몰려왔다.
개터재에서 백학산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는데 그 중간에 윗왕실재가 있다. 백학산 정상에서 멀리 속리산 연봉을 나뭇가지 사이로 구경하며 점심을 들었다. 오후 1시 26분쯤이니 여기까지 꼬박 4시간이 걸렸다. 개머리재까지 4.1km, 그곳에서 지기재까지 2.6km, 신의터재까지 4.1km 떨어져 있다.
회룡재부터 지기재산장 광고판이 눈길을 붙들었다. 또 모동 부산민박 광고판도 유혹했다. 하룻밤 자면 2만 5000원, 차량을 이용할 때 1만원이란다. 굉장히 저렴한데 혼자 가서 상당히 눈칫밥을 먹을 것 같았다. 지기재에 다다르니 실제로 산장이 눈에 확 띄지도 않아 포기했다. 구릉이 계속 이어져 편하긴 한데 단조로운 느낌이 컸다. 백학산 내려오는 곳에 속리산이 멀리 보이는 조망점이 나왔지만 나뭇가지가 계속 방해했다.
지기재는 옛날 산적들이 들끓어 적기재로 불렸다가 나중에 지금의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상주와 횡간을 잇는 도로가 뚫려 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서쪽은 완만한 구릉 능선이며 동쪽은 산지다. 재미없다.
오후 5시 25분 신의터재에 도착, 화령택시 이진식 기사님(010-4858-2595)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황간역에서 큰재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장성주 기사님이 내 일정을 이 기사님에게 쫙 브리핑했던 터다. 오래 만난 사이처럼 익숙했다. 화령읍은 내가 생각했던 상주 쪽이 아니라 서쪽이었고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생각보다 번화해서 놀라웠다. 편의점이 두 군데, 공용터미널 편의점은 24시간 문을 여고, 다른 곳은 오전 7시부터 영업한다 했다. 신의터재에서 화령까지 택시비는 1만 5000원, 화령장 객실에서 샤워를 하고 기사님이 알려준 목화식당에서 인삼두부전골로 저녁을 들었다. 주인 아주머니 손이 아주 컸다.
신의터재 4.1km 무지개산 4.3km 윤지미산 2.7km 화령재 4.5km 봉황산 3.6km 비재 3.7km 갈령 삼거리 1.3km 갈재(총 24.2km 11시간)
다음날(10일)은 신의터재에서 갈령까지 간다. 원래 이 구간은 신의터재에서 비재까지 가야 하는데 다음 종주를 조금 더 수월하게 하려면 갈령까지 가야 한다. 비재부터 갈령 삼거리까지는 3.7km, 그곳에서 갈령까지 1,3km를 더 걸어야 해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닌데 할 수 없었다.
기사님은 출발 시간을 정해 알려달라고 한다. 10시간 정도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침 7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전날 저녁 너무 과식했는지 새벽에 숙소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목화식당에서 아침으로 소머리국밥을 먹었는데 양이 장난 아니었다. 신의터재에 도착하니 7시 36분쯤이었는데 아랫배가 묵직히 느껴졌다. 신의터재 주차장에 화장실이 있는데 청소 상태가 엉망이었다. 볼 일을 보긴 했는데 속시원하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숲에 들어서자 또다시 신호가 왔다. 어느 묘소 옆에(죄송하다) 실례를 하고 있는데 50m쯤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물을 뜯는지 아저씨인지 할배인지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몸을 수그려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끝내 그 분과는 마주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멀어진 지 5분도 안돼 이번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맨발로 걸어온다. 아이고, 조금만 늦었으면, 이 아주머니와 마주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정말 십년감수했다.
신의터재에서 오른쪽으로 장자봉 쪽을 향해 걸어간다. 무지개산(437m)이란 예쁘장한 산을 살짝 비켜가려니 정상석을 놓았으니 꼭 보고 가라는 상주시 안내판이 발길을 붙잡는다. 200m쯤 올라가야 한다. 이제 다시 왼쪽으로 튼다. 왼쪽 판곡저수지를 끼고 438m 고지 거쳐 윤지미산(538m)을 오른다. 산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마륜의 동쪽'에서 '윤'을, 고개를 뜻하는 '지'와 산을 뜻하는 '미'를 붙여 그렇게 지었다는데 청주~상주 고속도로를 지나야 해 굉음이 장난 아니었다. 화령재 나와 도로를 400m쯤 걸어 내려온다. 철책을 따라 걸어 내려오자니 서글퍼진다. 사유지라며 철책을 세워 대간꾼들을 빙 돌아가게 한다. 사거리 신호등 건너야 비로소 숲길이 시작된다.
봉황산(741m)까지 계속 올라간다. 봉황산은 숙소가 있는 화서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주산 같은 곳이다. 건너편을 보면 첫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구병산(877m)이 눈에 들어온다. 구병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비재에서 방향을 틀어 형제봉을 거쳐 천왕봉~문장대에 이르고 그 뒤 관음봉(985m), 묘봉(874m), 상학봉(834m)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가 60km 넘게 구비친다고 했다.
봉황산 가는 길에 산불감시초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시원한 조망이 주어지지 않았다. 2시간쯤 내려가자 비재(320m)가 나온다. 여기에서 마칠까 싶기도 했다. 건너편 형제봉(829m) 위용이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후 4시쯤 비재에 내려서니 이상하게도 새로운 결의가 솟아난다.
암릉을 기신기신 오르니 못제(천지)가 나온다. 산중 깊은 곳에 우기에는 물이 고이고 갈수기에는 말라붙는다니 신기했다. 못제 주변에 빙 둘러 벤치를 설치하고 설명판을 세우는 등 상주시가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였다.
또다시 암릉 구간이 나와 기신대며 올랐더니 오후 6시 5분 갈령 삼거리가 나온다. 역시 벤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이곳에서 갈령까지 1.3km, 대간 탈출로로 안성맞춤이다. 이진석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뒤 보자고 했다.
내려오는 길에 멀리 속리산 연봉을 일람할 수 있는 벼랑 길이 나온다. 마침 태양이 저무는데 소나무에 걸쳐진 석양 빛과 속리 연봉을 담았다.
정신없이 사진을 촬영하는데 뜻밖에, 사람이 나타난다. "올라오면서 보니 차가 없던데 어떻게 숙소 가시려고?" 먼저 물어온다. 반대편에서 와 택시 불렀다고 하자, "안타깝다"며 말을 채 잇지 못한다. 난 적잖이 놀라며 "아니 태워주시려 했다는 말씀인가요. 감사합니다" 답했더니 씩 웃는다. 고마웠다.
이 하산 루트는 약간 힘든 구간은 있었지만 대단히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30분은 잡아 먹겠지 했는데 20분남짓 걸렸던 것 같다. 갈재에 내려서니 기사님이 막 도착했는 모양이다. . 전날과 마찬가지로 친구분이 농장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며 과즙 음료인 '사과 하나'를 둘 건넨다.
기사님에게 다음날은 새벽 4시에 만나자고 말씀드렸다. 혹시 전화를 걸어 깨울 일은 없겠지요, 얘기까지 했다. 숙소에서 샤워하고 목화식당에서 열무국수로 저녁을 들었다. 약간 달긴 했는데 먹을 만했다.
늘재 3.1km 밤티(치)재 3.8km 문장대 3.1km 세심정 2.3km 신선대 삼거리 2.3km 천왕봉 5.2km 피앗재 2.1km 갈령 삼거리 1.3km 갈령(총 23.2km 13시간 30분)
11일 새벽 2시쯤에 일어나 김태연 선생의 책 '백두대간을 그리다'의 속리산 구간 글을 다시 읽었다. 3시쯤 주섬주섬 배낭 꾸려 30분이 안돼 공용터미널 편의점에서 '혜자로운 콩나물비빔밥'과 '나물비빔밥' 도시락과 물병 셋(투 플러스 원이었다), 캔커피를 샀다. 개미 한 마리 없는 시골 길을 이리저리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기사님은 정확히 3시 57분 화령장 앞에 도착했다. 화령장은 첫날 카드로 4만 5000원, 둘쨋날 현금으로 4만원을 결제했다.
이날은 대간 종주 가운데 처음으로 남진을 하기로 했다. 속리산 가운데 가장 많이 찾는 문장대~밤티재가 비법정탐방로로 지정돼 늘재에셔 새벽 4시에 출발해야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의 감시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갈재에서 북진하게 되면 공단 직원이 10시쯤 문장대에 출근해 떡 버티고 서 있으면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하는 붕상사가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사실 출발 전부터 백두대간 종주 중 처음으로 비법정탐방구간을 침범하는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는 점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문장대에서 화북탐방센터 쪽으로 하산한 다음, 다시 택시 불러 늘재로 이동해 밤티재까지만 오를까 하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경비도 경비이지만, 기사님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을 빼앗아야 한다. 해서 스스로의 약속을 어기기로 했다.
새벽 4시 30분 늘재에 내려서니 기사님이 휴대용 랜턴을 켜 내가 헤드랜턴을 끼고, 배낭을 꾸린 뒤 출발할 때까지 뒤에서 지켜본다. 나와 같은 토끼띠인 기사님도 어지간한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화령부터 늘재까지는 원래 3만 3000원을 받는데 심야라 4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괜찮다, 그만 돌아가시라,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한동안 내가 숲길을 안정적으로 진행하는지 확인한 뒤 차를 출발시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길은 찾기 쉬웠다. 물론 처음에 약간 혼동스러운 곳이 나오긴 했지만 나의 대간 경험이 쌓였는지 짐작만으로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헤드랜턴을 끈 것은 30분남짓 지났을 때였다. 지난 번 종주 때 무룡산 일출을 경험했듯 새벽은 도둑처럼 밝아온다. 고갯마루를 몇 개 넘자 숲이 붉게 물들어온다. 사실 초반에 놀란 것은 뒤돌아보면 드러나는 건너편 청화산의 위용이었다. 눌재 조금 못 미쳐 그 유명한 용유리 마을이 있다.십승지 중 하나로 꼽히는 우복동이 바로 이곳이다. 환란을 피하고 자손들이 잘 되는 곳이다. 청화산과 시루봉, 도장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들이 훤칠하다.
하여튼 629m와 696m 고지를 숨가쁘게 올랐다가 밤티재를 보며 내려간다. 이따금 차량들이 지나가는 한적한 곳이다. 밤티재 내려서니 철책이 가로막는다. 키 180cm 가까운 내가 넘기가 쉽지 않았다. 배낭을 먼저 건너 내려놓고 홀몸을 던져 철책에 들러붙어도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가뿐히 넘었다. 도로 건너도 철책으로 둘러쳐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아마도 통신기기 수리를 위해 수시로 드나들어야 해서 그런 것인가 싶었다.
꾸준히 고도를 올렸다. 594m 고지를 올라 916m까지 올라가자 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594m 고지에서 죽 자락을 타고 내려가면 견훤산성이 나온다는데 궁금하긴 한데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문장대 목책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암릉 구간은 걱정했던 것보다 어렵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김태연 선생 같은 이도 한곳을 뱅뱅 도는 등 곤혹스러운 일이 있었다 했는데 그렇게 혼동스럽지 않았다. 웬만한 해산굴 같은 곳도 지났고, 꼭 방파제 트라이포트처럼 큰 바위들이 날카롭게 서 있는 바위들을 건너 뛰며 즐겼다. 도봉산 Y계곡과 똑닮은 곳도 나왔다.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긴 했지만 문장대 목책을 넘으니 정확히 오전 9시였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몸에 활력이 돌았다. 국립공원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막으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이곳을 비법정 탐방로로 묶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회로를 만들거나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게 하고, 자격을 갖춘 이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좋지 않을까?
문장대의 파노라마 경관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날은 제트기류보다 조금 못한 강풍이 몰아쳤다. 10여분 머무르다 내려오는 내가 제일 오래 남아 있는 편이었다. 문장대를 내려와 널찍한 곳에 벤치들이 있길래 도시락 하나를 해치웠다.
기사님에게 신선대 일대를 통제한다는 얘기를 미리 들었다. 난 신선대 일대만 통제한다고 이해했는데 문장대 초소에서 신선대까지 1.1km를 모두 통제했다. 흰색 플래카드로 목책을 둘러 많은 산객들이 오가는 가운데 위법을 저지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초소 옆 바위에서 사진 찍는 척하다 사람들 눈길이 뜸한 틈을 타 슬쩍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새벽과 아침 내내 가슴 졸였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안내판을 보니 중사자암 옆을 지나 용바위골을 따라 복천암 거쳐 세심정까지 내려갔다가 비로산장 옆으로 해서 경업대에 이르러 신선대 삼거리로 오르는 방법이 있었다. 많이 고민됐다. 문장대에서 문수봉 거쳐 비선대 삼거리까지는 1.1km 밖에 안되는데 세심정까지 3.1km를 내려갔다가 경업대 통해 2.3km를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세심정까지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복천암부터는 차량도 오갈 수 있었다. 낮 12시쯤 세심정에서 올라오며 계곡을 만났다. 대간 종주꾼들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는데 신선대를 60대 부친과 함께 찾은 40대 아들이 낙석에 맞아 목숨을 잃은 비극 때문에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대간 꾼들은 이렇게 계곡 맛을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물 양이 많지 않은데도 시원한 폭포와 소가 속내를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소슬한 바람도 간간이 불어온다.
설악산 봉정암 오르는 막판 돌계단과 아주 비슷한 힘듦이 동반됐지만 남들이 쉽게 오르지 못하는 곳을 간다며 뿌듯해졌다. 초파일 연등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니 장군수 안내판이 나온다. 그걸 따라가니 높이가 10m는 됨직한 바위가 쩍 갈라져 있다.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틈이 10m쯤 이어진다. 어둠 속에서 햇볕 속으로 나가니 연두색 나뭇잎들이 손을 흔든다. 장군수는 임경업 장군이 마셔서 힘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데 북두칠성처럼 커다란 국자로 물을 퍼 호기롭게 마셨다.
연등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관음암이 나온다. 법주사 경업대 관음암이 정식 명칭이다. 아직은 서너 분의 스님이 공부에 정진할 만한 작은 도량이다.
철졔 계단을 따라 오르니 경업대다. 널찍한 바위 위에서 법주사를 비롯해 안온한 산그리메들이 그윽히 다가오는 인상적인 곳이었다. 속리산 주능선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많은데 이곳은 편안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신선대 비극이 없었다면, 대간 종주꾼이 이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신선대(1026m)를 오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입석대, 비로봉(1032m) 거쳐 오후 2시 조금 못돼 천왕봉(1058m)에 이르렀다. 천왕봉 정상은 워낙 협소하고 날카로운 바위 위에 있어 산객들은 조금 아래 헬기장에서 점심을 들었다. 또 동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조그마한 바위 위에 산객들이 왁자지껄했다. 정상에서 도하리 방면으로 하산하기 위해 발을 내려놓자마자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점심 대신 약과에 남은 커피를 마시며 산그리메를 조망했다. 내려오는 사람이나 올라가는 사람이나 발길을 멈출 만큼 훌륭한 곳이다.
하여튼 벼랑 길을 300m쯤 내려오자 도화리 내려가는 길과 형제봉 이르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703m, 667m로 고도를 조금씩 낮춘다. 천왕봉부터 갈령 삼거리까지 7.3km라 사실 욕심을 조금 냈으면 5시정도 갈령 삼거리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화령공용정류장에서 대전행 버스가 6시에 출발하니 빠른 귀경 길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문장대~신선대 구간을 탔더라면 충분했을텐데 힘을 많이 소모한 탓도 있었다. 639m까지 고도를 끌어내리니 피앗재가 나온다. 이제 형제봉(829m)을 향해 바득바득 올라가야 한다. 803m 고지까지는 그런대로 힘을 냈는데 그곳이 정상이라고 믿었다가 배신당한(?) 기분에 좌절하고 낙담했다. 기운을 차리려고 먹다남긴 편육 등으로 배를 채우고 등산화 끈도 다시 맸다.
형제봉을 밟은 뒤 갈령삼거리까지 상당히 많이 남아 있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전날 본 벤치들이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기사님에게 전화 드리니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기사님은 그냥 신선대를 슬쩍 통과하지 그랬느냐고 했다. 10시간 걸리는 거리인데 우회하느라 13시간 30분이 걸렸다.
현금이 떨어져 갈재~화령 택시비를 신용카드로 2만 2000원에 결제하고 기사님과 작별했다. 목화식당에서 열무칡냉면을 들이켜니 피로가 날아가는 듯했다. 비를 한 방울도 안 맞고 돌아왔다. 공용터미널에서 짐 정리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사흘 동안 70km 넘게 걸은 기억을 되살리다 7시 55분 남부터미널행 막차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11시 20분쯤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조금 지났다. 돌아보니 이틀의 갑갑함 끝에 사흘째 속리산에서 달콤한 한 방을 맛봤다.
첫댓글 "새벽은 도둑처럼 밝아온다.". 제가 꼽은 오늘의 절창입니다.
업무 사이 살짝 들어왔는데(비보를 접한 안타까움과 우려까지 더해서) '황간'이란 지명이 가슴에 박히네요. 너댓 살 즈음,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온가족이라봐야 엄마와 어린 나가 전부였지만)이 유랑생활하듯, 한 곳에서 여섯달, 길어야 일 년 정도 살고 이사를 하던 그때, 잠깐 그곳에 살았더랬습니다. 너무 어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몇 안되는데, 그중 특히 생생한 기억은 영화를 좋아하던 엄마가 읍내 영화관에 새 프로가 들어올 때마다 영화를 보러 가셨는데, 영화가 끝난 늦은 밤 굽이굽이 산길을 아버지 등에 업혀 돌아오던 일과, 그렇게 본 영화 중 한 장면(아마 중국 무협영화였지 싶습니다), 커다란 구렁이가 땅속으로 꿈특꿈틀 기어달리더니(?) 어떤 여자의 치마속으로 쑥 들어가던 기괴했던 장면입니다. 그 영화를 봤던 날은 어두운 밤길이, 아버지 등에서도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ㅎㅎㅎ 무료한 병실생활에 잠깐이라도 소일하시라고...적어봤습니다.
나홀로 산행...늘 걱정스러웠는데...암튼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