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삶&철학21[1][1].hwp
통청아카데미
2011. 12. 14.
이경희(대구가톨릭대)
니체의 삶과 철학
들어가는 말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허위에 맞서는 것,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1)(KSA 6, S.365) 이 선언은 니체가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가”를 부제로 달고 있는 『우상의 황혼』에서 했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망치를 들고 철학하고, 왜 자신이 다이나마이트가 되어 최고의 가치들을 분쇄하고자 했을까? 모든 가치의 전도2) : 왜 이것을 철학의 정식으로 삼았을까?
니체는 삶의 철학자다. 그는 철저하게 삶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관심도 오직 삶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모든 가치는 삶의 보전(Erhaltung)과 증대(Steigerung)에 얼마나 이바지 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다. 삶을 허약하게 하거나 병들게 한다면 그 어떤 가치라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비록 그것이 신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삶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삶을 제외하고, 가치는 삶 이외에 어떤 것에서도 유래될 수 없다.” 삶이 유일무일한 현실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세계뿐이다. “이 대지에 충실하라. 천국의 희망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부지불식간 독(毒)을 뿌리는 자들이다”3)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만이 유일한 실재이기에, 니체는 초월론적인 세계해석을 불성실한 삶의 소산으로 간주하였다. 온몸으로 철학한 니체, 삶으로서 사유하고, 사유로서 살고자 했던 천재, 삶과 사상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했던 철학자, 일생동안 삶을 위해 방랑했던 노마디즘의 철학자4) 니체의 화두는 삶이다.
니체의 생애
니체(1844-1900)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경건주의가 깃든 가정에서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까지 모두 루터교 목사를 지낸 전통적인 성직자 집안으로 니체도 5살까지 목사관에서 자랐고 그 후에도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꼬마목사”라고 불릴 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 그도 훌륭한 목사가 되리라 촉망받았다.
어린 시절 존경하던 아버지를 잃고 이듬해 남동생이 사망한 후, 니체는 할머니와 두 고모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 다섯 여성의 지나친 관심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로 인해 훗날 니체는 반여성적 태도를 취하면서 강인한 남성상이나 가부장적 권위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이 동경은 그가 제시하는 초인(Übermensch)을 구성하는 시발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종교적 원리에 충실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니체는, 중고등학교(Schulpforta)때 슈트라우스(D. F. Strauss)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예수의 행적에서 신화적 요소, 모든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던 성경 비판서를 읽고 크게 공감하여 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성찬식 참여를 거부하기도 했었다. 1861년 부활절, 니체는 친구 도이센(Paul Deussen)에게 “종교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산물”이라고 선언하였다. 한 수필에서는, “종교는 처음에는 각 민족들의 창조성의 징후이지만, 후일에 주된 효력은 피안의 세계를 위하여 차안에서 모든 신성한 것들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벌써부터 니체는 종교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니체는 본Bonn대학에서 고전문헌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나, 스승 리츨 교수를 따라 Leipzig대학으로 옮겨가면서 신학을 포기하고 문헌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니체는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랑게(G. Lange)의 『유물론의 역사』를 읽고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일찍부터 작곡과 편곡을 하는 등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니체는 바그너(R. Wagner)와 일생동안 애증의 관계를 유지한다.
학생시절 니체는 고대그리스시대의 철학과 문학에 심취하여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인간의 심성이 자유롭게 표현된 것으로 간주하여 높이 평가했으며, 고대의 철학자와 영웅을 본받고자 했다. 니체는 당시 읽은 그리스 시인인 Pindar(522-438)의 싯귀, “너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후일 그의 저서에서 새롭게 등장한다. 예를 들면 『즐거운 학문』, 270절 “너의 양심은 뭐라고 말하는가? 너는 반드시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 “어떻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가”로 사용되는 등 생애를 통한 지표가 되었다.
니체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지도교수, 프리드리히 리츨의 추천으로 학위도 교수자격 논문도 없이 바젤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교수로서 니체는 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문학을 강의했으며, 특히 그리스 비극, Aiskhylos의 Khoephoroi는 거의 빠짐없이 강의했다. 그는 학생들을 그리스 세계로 안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리스 세계와 가능한 친숙하게 하려는 것을 수업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종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헌학에 회의를 품고 철학과로 전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니체는 마침 공석중인 철학과 교수직을 신청했으나, 그의 희망은 좌절되고 만다. 이 시도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철학강의를 시작했다.
Basel대학을 퇴임(1879년)한 후, 니체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자로 살면서 저술활동에만 몰입한다. 1886년과 1887년에 걸쳐서 니체는 무엇인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때까지 출간된 중요한 저서들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서문을 첨부하여 다시 출판하였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판한 이후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려는 의도에서 『권력의지』라는 표제로 자신의 주저를 구상한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 번 목차를 수정하고 수많은 단장(短章)을 썼으나, 마침내 포기하고, 대신에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주저를 구상하지만 1888연말부터 니체는 편지에 “불사조”, “니체 Caesar”, “십자가에 메달린 자”로 서명하는 등 광기를 보였다. 곧 1889년 1월초 정신이 참담하게 붕괴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다가 1900년 바이마르(Weimar)에서 삶을 마쳤다. 니체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 사람의 목사도 참석하지 않았다.
연 대 표
1844 : 10월 15일 프러시아의 뢰겐(Rochen)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탄생.
1849 :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쓰러져 사망. 이듬 해 남동생 사말
1854 : 김나지움에 입학. 작곡을 시도.
1858: 슐포르타에 재학. 인도철학 연구하는 파울 도이센과 교우관계.
1860: 문학적, 음악적 소그룹 “게르마니아”를 조직. 바그너의 악보를 접함.
1864(20세) : 본대학 입학하여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21세) : 리철 교수를 따라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신학은 포기,
고전문헌학 전공. 쇼팬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감명.
1868(24세) : 군복무 도중 말에서 떨어져 가슴을 크게 다쳐 오랫동안 병상생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고 바그너에게 안전히 매료됨.
1869(25세) : 2월-리철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員外교수
(고전문헌학 담당)로 초빙. 3월-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무시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4월-프러사아 국적을 버리고 스위스인이 됨.
5월-<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제목으로 바젤대학 교수취임 강연함.
1870(26세) : 4월-정교수로 승진됨. 7월-『디오니소스적 세계관』 집필.
8월-보불전쟁의 위생병으로 지원, 전쟁을 통해 권력의지설이 발아.
1872(28세) : 『음악의 정신으로 부터의 비극의 탄생』출판. “우리나라 교육시설 의 장래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연속 공개강연을 5회에 걸쳐 행함.
1873-76 : 『반시대적 고찰』저술.
1876(32세) : “니벨룽겐의 반지” 시연에 참석하였으나, 실망한 나머지 도중에 퇴장
하여, 바이에른의 숲속으로 도피하여 머물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최초의 생각들을 기록함.
1878(34세)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출판(80년에 완성).
1월-바그너가 “파르지팔”를 니체에게, 니체는 『인간적 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우정은 끝남.
1879(35세) : 병세의 악화로 바젤대학을 퇴직.
1881(36세) : 『서광』출판. 실즈마리아에서 영원회귀 사상 잉태.
1882(38세) : 『즐거운 학문』 출판. 러시아 처녀 루 살로메와 사랑에 빠짐.
82-88년에 걸쳐 『권력에로의 의지』라고 칭하는 유고를 씀.
1883(39세) : 2월 10일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집필.
1885(41세) : 『짜라투스트라』를 自費로 40부를 인쇄하여 7명의 친지에게 기증.
1886(42세) : 『선악의 피안』출판.
1887(43세) : 『도덕의 계보』출판.
1888(44세) : 『바그너의 경우』출판. 『디오니소스 찬가』완성.
8-9월『우상의 황혼』집필(89년 출판). 9월-『안티 크리스트』완성.
10-11월『이 사람을 보라』를 집필(1908년 출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광기의 명백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
덴마크의 문학사가인 게오르크 브란데스가 코펜하겐 대학에서 니체 철학을 강연하기 시작했다.
1889(45세) : 1월 3일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 이후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1894(50세) : 니체는 병세의 악화로 거의 외출할 수 없게 됨.
동생 엘리자베스가 나움부르크의 어머니 집에 니체문고를 설립.
1900(56세) : 8월 25일 정오 쯤 바이마르에서 생애를 마침.
뢰겐에 있는 집안 묘지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