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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신화학자와 저널리스트의 지적인 대담!
신화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은 신화를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닌, 인간 내면의 경험과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는 원형적인 언어로 재해석합니다. 캠벨은 신화를 통해 우리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영웅의 여정(분리-입문-귀환)처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여 천복(天福)을 누리도록 안내하는 나침반으로 제시합니다.
주요 요약 내용
신화의 본질: 신화는 인간 집단 의식의 응축이자 우리 내면의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상징적 꿈입니다.
현대인의 안내자: 신화는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자상한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영웅의 여정: 개인은 자신의 세계와 분리되고, 내면의 입문 과정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영웅의 여정을 겪습니다.
천복(Bliss)의 추구: "당신의 천복을 따르라"는 말처럼, 자신의 존재가 가장 선명하게 깨어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는 힘을 강조합니다.
신화는 과학과 종교, 예술을 넘나들며, 우리 안의 정신 구조를 이해하고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감을 채워주는 강력한 지혜의 정수입니다.
신화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명쾌하게 정리하는 조셉 캠벨의 학문 세계가 유려하게 펼쳐진다!
《신화의 힘》은 비교신화학의 세계적인 거성 조셉 캠벨과, 당대 석학들의 학문적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로 저명한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가 8년간 교유한 결과물인 TV 대담을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북미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와 인도 신화, 불교 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은 물론 영화 〈스타워즈〉, 비틀즈 등의 대중문화까지 풍부하게 활용하여 신화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는 지혜를 발견함으로써,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대담은 미국 PBS를 통해 처음 방송됐다. 빌 모이어스의 흥미로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이어간 조셉 캠벨은,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신화들을 넘나들며 사회·정치·경제·종교·인간·결혼·사랑 등 현대 인간사 거의 모든 문제를 신화의 테두리 안에 빗대어 설명한다. 둘의 대화를 따라 가다 보면 조셉 캠벨의 내공과 원숙한 학문 세계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신화 저술가이자 번역가 고故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책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았다. 신화의 세계에 처음 발을 딛는 독자들과 조셉 캠벨의 학문 세계를 정리하고픈 독자들 모두에게 유용한 책이다.
신화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신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언제든지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 안에 숨겨진 힘, 즉 잠재력을 촉발하려면 신화를 공부해야 하며, 신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화는 우리의 문화와 삶을 조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통찰을 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한평생 신화를 연구한 조셉 캠벨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신화가 그리고 캠벨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 다양한 종류의 신화를 연구한 노학자가 정의하는 신화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인도자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캠벨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신화의 힘, 나아가 나의 내면의 모습을 발견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캠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 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어째서 온 세상이 성소(신화적인 상상 의 영역)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_대담자 빌 모이어스 _18~19쪽 ‘빌 모이어스의 서문’ 중에서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어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는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_21쪽 ‘빌 모이어스의 서문’ 중에서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_59쪽 ‘1. 신화와 현대 세계’ 중에서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神性)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_189쪽 ‘4. 희생과 천복’ 중에서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 우리의 정신 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_393쪽 ‘8. 영원의 가면’ 중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들… 혹은 공유하지 않는 이야기들.
조셉 캠벨은 평생 동안 신화의 긍정적이고 치유적이며 회복력 있는 측면을 널리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문화와 문화 간 이해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글이 제게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캠벨은 신화를 악용하는 자들을 비판했지만(일부 전체주의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정작 자신의 나라인 미국에서 신화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훨씬 더 낙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명한 미국 언론인과의 인터뷰를 엮은 이 책은 캠벨이 미국과 그 건국 신화에 적용했던 암묵적인 '예외주의'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그가 몇 가지 중요하고도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은 결론을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캠벨에 따르면 신화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평생 신화적 지식을 전파하는 데 헌신한 사람에게서 이런 주장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신화가 우리 삶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화는 삶의 의미, 목적, 또는 정신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화는 우리 선조들의 영적 경험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따라서 모든 시와 마찬가지로 신화는 그러한 경험을 기념하고 때로는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신화는 삶의 일반적인 지침서가 아닙니다. 좋은 삶, 도덕적인 삶, 성공적인 삶을 묘사하는 지침서도 아닙니다. 신화는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고 행동에 대한 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칼 융은 이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렀는데, 기능은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입니다). 다시 말해, 신화는 오래전에 죽은 이들이 장차 그들과 합류할 후손들에게 전하는 시의적절한 조언입니다. 의례는 본질적으로
연극과 같은, 신화를 연기하는 것입니다. 신화가 공유되는 이야기라면, 의례는 탄생, 발전, 쇠퇴, 죽음의 이야기가 담긴 공유되는 활동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함께 문화의 토대를 이루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회라고 부르는 것들과 결혼, 정부, 군대, 교육, 사법, 예술, 심지어 화폐와 같은 사회 제도를 형성합니다.
모든 신화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일부 신화와 그와 관련된 의례는 종교 제도에 깊이 뿌리내립니다. 이러한 신화들은 신성한 이야기, 즉 단순한 경험담이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고 고정된 의미를 부여받아야 할 진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들은 교조적이고, 제안하기보다는 지시하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교조적인 종교는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를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근본주의는 교조적인 신화를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러한 신화가 진실일 뿐만 아니라 고려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종교적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세속 문화는 특정한 형태의 정부 체제가 신성하며 건국(근본) 경전 해석의 차이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근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정치사는 서로 상충하는 교조주의의 역사입니다.
미국이 종교 국가라는 말은 상당수 국민이 종교 종파와 교파에 헌신한다는 사실로 뒷받침되는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 의식 참여 감소를 신화의 영향력 감소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종교는 곧 미국 그 자체이며, 시민들이 원하는 미국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종교는 점점 더 근본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종교 지도자와 신도들 사이에서 분열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컨대, 미국은 성문 헌법에 기반한 법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건국 신화를 교조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아, 여러 정부 기관 간의 유일한 관계는 법원을 통해서만 유지됩니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독립적이고 광범위하게 분리된 법적 관할 구역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필수적인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신화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라는 미덕을 내세운 '미국식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미국의 종교 단체, 교회, 회의, 연합체들은 세속 종교 내의 정치 활동 집단입니다.
사회가 성스러운 경전의 공통된 해석에 의존할 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명백한 사실입니다. 경전 자체가 인간의 복지에 얼마나 부합하든 간에,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행동 규범, 함께 살아가는 데 따르는 마찰을 완화하는 공유된 전통을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용광로'라는 자화상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융합되기 위해 거쳐야 했던 모루의 현실을 가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마찰은 현재 미국 내 세속적 근본주의의 분열에 비하면 사소해 보입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은 (어쩌면 항상 그랬듯이) 제로섬 게임이 되어버렸습니다. 파벌 간의 이상은 서로 상반될 뿐만 아니라 모순됩니다. 각 파벌은 신성한 경전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선거 과정을 통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과정을 조작함으로써 상대 파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를 강요하려 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존재해왔던 사실, 즉 최초의 성서를 쓴 이신론자들이 공유했던 신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결코 공유된 신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들은 신과 우주(많은 이신론자들에게는 같은 의미였습니다)가 이성에 대한 헌신을 공유한다고 믿었습니다. 대다수 대중이 이러한 신화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캠벨의 논리에 따르면, 공유된 신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지적인 허세이자 시적 은유에 대한 오만이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엘리트들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민주적 자유주의가 한쪽에게는 폭력이 아닌 토론을, 다른 쪽에게는 언쟁이 아닌 무력 대응을 의미하게 된 것은 신화적 시를 실제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만은 아닙니다.
1. 신화의 네 가지 기능(74쪽 - 76쪽)
캠벨에 따르면 신화에는 네 가지 기능이 있다. 첫 번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이다. 신화는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주라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신비인데, 인간은 그 우주에 속한다. 그런 우주와 인간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존재는 경이를 경험하게 된다.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74쪽) 이처럼 신화는, 인간이 신비를 깨닫고 체험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능을 한다.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신화는 우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의 원인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끔 한다. 이는 첫 번째 기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과학이 하고 있는 일이지만, 현대 과학은 단순히 현상적 인과론만을 제시할 뿐이지만, 신화는 그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캠벨은 '불'의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불이 무엇이지요? (과학은)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세 번재 기능은 사회적 기능이다. 신화는 하나의 도덕률로서, 어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캠벨은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설명한다. (75쪽)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도덕률은, 그 신화가 형성되었을 당시의 상황에 건강할 수 있는 규칙을 제시하는데, 현대에 신화를 보는 데에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기에 너무 치중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 번째 기능은 세 번째 기능에 대한 보완이다. 세 번째 기능이 고정된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네 번째 기능은 신화가 하나의 고정된 사회 규칙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는 진리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이다. 캠벨은 '사회적 질서'를 제공하는 신화가 아니라, 자연으로 되돌아가 자연과 인간이 하나였음을 깨닫게 하는 신화의 의미를 강조한다.
2. 현대의 신화, 미래의 신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 성서적 신화 비판
캠벨은 현대의 '신화의 부재'에 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면서, 앞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신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신화는 '어떤 집단(동아리)의 신화'와 '모두(이 땅)의 신화'로 나뉜다. 그리고 캠벨은 둘을 차별화하는데, 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이러한 캠벨의 '어떤 동아리의 신화'와 '이 땅의 신화' 구분은, '지역 종교'와 '세계 종교'의 구분과 닮아 있다. 지역 종교는 타 집단에는 배타적으로 기술하면서 특정 지역 사회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그들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세계 종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누구에게나 적용이 가능한 것으로, 모두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캠벨의 두 신화 구분과 이러한 종교의 구분이 차별화되는 것은, 캠벨은 대표적인 '세계 종교' 중 하나인 그리스도교의 신화를 '어떤 동아리의 신화'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동아리의 신화'의 대표적인 예시로 성서를 들어 설명하는 캠벨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61쪽
또한, 캠벨은 성서가 '사회 지향적 신화학'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비판하며 동양(신도 및 도가)의 신화학을 높이 평가하는 듯한 태도를 내비친다.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 채 살고 있지요.
62쪽-63쪽
캠벨이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논지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64쪽)
3. 신화는 공적인 꿈, 꿈은 사적인 신화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89쪽
책 전반에 걸쳐서 캠벨은 신화와 꿈이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캠벨은 그 자체로 은유를 뜻하는 신화를, 다양한 은유를 통해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와 같은 꿈의 은유이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고 꿈은 사적인 신화이다. 신화라는 거시가 꿈이라는 미시와 일치하는 사람이면, 캠벨의 말을 따르면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 즉 신경증에 걸린 사람이다. (캠벨은 프로이트나 융과 같은 (특히 융) 정신분석학자들의 용어를 자주 채택한다.) 그리고 개인의 꿈은 문화권에 따라 그 문화권의 신화에서의 상징과 일치하는 맥락에서 상징이 표상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사적인 꿈은 신화적인 테마를 표현하게" 된다. (91쪽)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의 꿈에는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특정 상징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91쪽
이러한 신화는 한 인간의 다른 두 부분 즉 마음과 유기체적 육체를 화해시킨다.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 지속되는 생이라는 모순을 신화가 해소해주는 것이다.
4. 신비주의, 일원론
책 전반에 걸쳐 캠벨은 일원론적인 면모를 자주 보여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신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한껏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비를 설명하며 그는 우파니샤드부터 성경, 도덕경까지 다양한 종교 고전 문헌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신비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개념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또한,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102쪽, 103쪽
인간은 초월성을 인간의 언어로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격하시켜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체계 안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본래의 초월성의 의미에 가까워지지 못한다. 이분법적 이해는 일원론으로 향하기 위한 열쇠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초월에 대한 이해가 될 수 없다고 캠벨은 말한다.
(신에 대해) 남성이니, 여성이니 해서는 그 존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것이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도약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104쪽
5. 신화는 은유이다.
캠벨이 신화에 관해 말하며 가장 크게 강조하는 점 중 하나는,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되고 은유로 해석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캠벨이 사용하는 음식점의 메뉴판의 비유는 내가 여지껏 보았던 신화의 은유적 해석의 당위성을, 은유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6쪽, 117쪽
그리고 이러한 은유를 해석하는 데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비이고 신비의 경험이다. 이러한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4쪽) 이처럼 신화를 은유로 읽는다면 다른 신화에서 '자신의' 신화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구사되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날을 세워 반대할 필요도 이유도 의미도 없어진다. 그 껍데기는 그 속 알맹이에 관해 암시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신화를 읽을 때에는 껍데기를 주장으로 보고 판단하려 하면 안 되고 그 속의 은유를 읽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화는 조화를 기능할 수 있다.
(신화는) 각각 다른 의미에서 모두 믿을 만한 것입니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4쪽
6. 현대의 샤먼으로서 예술가
캠벨과 모이어스는 오늘날 의례가 '죽었다'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연은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인식하는 이들이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모이어스는 캠벨에게 누가 현대에 샤먼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쪽
이처럼 캠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허는 이로 예술가를 지목한다. 그의 설명을 따르면 예술가는 현대의 샤먼인 것이다. 이에 모이어스는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캠벨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190쪽
재미있는 설명이다. 캠벨에 따르면 소위 '엘리트'적 경험이나 통찰력이 없는 사람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방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마치 '누구나 다 군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앞선 군자/성인의 예를 따름으로써'라고 주장한 순자의 논리와도 같아 보인다. 더하여 책에서 종종 언급되듯 실제로 캠벨 역시 특정 작가를 탐독하는 것을 하였던 듯하다. 그가 매우 선망하는 작가로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이 언급된다.
7. 영웅이란 어떤 존재인가, 영웅적 행위란 무엇인가, 지역적 영웅과 우주적 영웅
책이 진행되는 내내 캠벨은 일원론적 사고와 신비주의적 태도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비롯하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캠벨은 쇼펜하우어의 격구를 인용하면서, 영웅은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고 하나이다.'라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몸을 바친 사람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 가는 이법(理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
쇼펜하우어의 말은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여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인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209-211쪽
이처럼 캠벨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행위 역시, '영웅적인 행위'로 보며, 그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이웃은 곧 '너'이니 사랑하라'라는 말로 해석한다.
그가 제시하는 또다른 영웅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쪽
이처럼, 자신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친 사람은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 따라서 영웅은 모든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영웅적 행위는 무엇일까? 캠벨의 말을 따르면 사람의 행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이고 하나는 '정신적 행적'이다. 영웅의 행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분류된다. 육체적인 영웅은 싸움이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을 구하는 데에서 커다란 용기를 보이는 이이다. 정신적인 영웅은 초월적인(비범한) 체험을 하고 대중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이이다. 캠벨은 미성숙 상태에서 성숙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하며, 이와 같은 전제에서 '어머니(여성)의 영웅성'을 중요시한다. 다양한 신화에서 미성숙을 의식적으로 깨치고 나아가 성숙의 과정에 이른 '영웅' 이미지는 대부분 남성으로 표현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가져온 어머니 역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다"(231쪽)라고 캠벨은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231쪽)이기 때문이다.
한편 캠벨은 톨스토이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를 언급하면서 지역적 영웅과 우주적 영웅을 구분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그 지도자(나폴레옹)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인가, 아니면 무리의 선두에 선 자에 지나지 않는가?"의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234-235쪽.
앞서 언급한 대로 영웅은 자기보다 큰 것에 자기를 희생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웅은 특정 국가나 민족의 입장에서 '영웅'이지만, 다른 국가나 민족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는 '괴물'이 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당시 프랑스의 영웅이었을지언정, 침공당한 다른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괴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프로메테우스의 경우는 '불을 훔쳐다'가 인류에게 전해준 것은 '보편적 영웅'혹은 '우주적 영웅'으로서의 행위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자신을 짐승과 구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을 훔쳐다가 인류에게 준 영웅'의 모티프가 지구상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이유이다. 프로메테우스와 더불어 보편적인 영웅의 예시로 캠벨은 또한 예수와 석가, 모세와 무함마드 등을 들어보인다. (255-259쪽)
그러나 나는 과연 보편적 영웅이라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질서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하기만 하고, 따라서 작은 성취는 결국 더 큰 타락으로 향하며, 누군가의 성취는 누군가의 몰락이지 않을까?
8.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천복의 삶
캠벨은 인상적인 이미지를 예시로 들어 보이면서 자신의 '천복'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천복이란 무엇인가? 캠벨은 이 천복이라는 개념을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다가 배웠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226쪽) 즉, 천복은 초월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실존적 불안에 대한 구원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복'을 좇는 삶은 어떤 삶일까? 캠벨은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는 것'이라고 답한다. (222쪽) 이렇게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는 삶은, 천복을 따르는 삶이고, 수레바퀴의 바퀴살이 아니라 굴대를 잡는 삶이다.
중세의 필사본에,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223쪽-225쪽
캠벨은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천복을 좇을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쪽
이 대목을 보고 캠벨이 정말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은 대책없는 에세이식 위로를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천복은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천복을 찾아 따르는 삶이 가능할까?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캠벨 자신의 경우에 천복을 따르는 삶이 운이 좋아서 성공한 삶으로 이어졌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나도 믿음을 가지고 천복을 좇아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에 있다.
9. 신화와 신학의 차이점
캠벨은 신화와 신학을 구분한다. 캠벨과 모이어스는 히브리 성서(구약성서)의 무시무시한 율법들이 신화가 아니라 신학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모이어스는 신화는 신의 신비를 이야기하지 신의 청사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데, "신학에서는 모든 것이 암호로, 강령으로 축소된다"(259쪽)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캠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화도 그렇게 해서 신학으로 축소되고 맙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대부분의 신화는 자가당착적이지요. (...) 그런데 신학이 들어와서는,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259쪽.
캠벨의 말을 따르면, 신화는 유동적인 운문인 반면 신학은 고정된 산문이다. 따라서 한 문화권에 있는 다양한 신화는 자가당착적으로 즉 서로서로 모순되더라도 공존할 수 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행동 강령이다. 그것을 유일한 실제로 믿어야 되고, 생겨나는 모순을 용인할 수 없다. 모순은 해소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그렇다면 힌두교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인 종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 수많은 자가당착적 신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10. 영적인 삶의 '약도'를 제공하는 신화
앞서 언급하였듯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신화를 조명하면서 힌두교적으로 말하자면 범아일여, 즉 자아(자기)가 곧 만물임을 깨닫는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빌 모이어스는 그러한 영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캠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옛날에는 스승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 그래서 사제들이 있었고, 의례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신화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335쪽
신화가 약도와 같다고 하는 것은 흥미로운 비유이다.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할 때 약도를 그저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무시하는 태도는 적절하지 못하다. 약도는 그 자체로 비유이다. 그것을 보고 진리를 향하는 길을 더 수월하게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캠벨의 말마따나 약도라고 해서 모두 같은 약도가 아니다. 어떤 약도는 국지적이고 어떤 약도는 전지구적이다. 캠벨은 오늘날에 필요한 것은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336쪽)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11. 사랑의 세 가지 유형
7장에 이르러서 캠벨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사랑을 생각하는 기본적인 관념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캠벨에 따르면 사랑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에로스적 사랑, 두 번째는 아가페적 사랑, 마지막은 아모르적 사랑이다. 앞의 둘은 '비개인적 사랑'인 반면 아모르적 사랑만이 '개인적인 사랑'이다. 그 의미와 특징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341-344쪽 참고)
에로스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
아모르적 사랑
개인적/비개인적
비개인적, 비개성적
비개인적, 비개성적
개인적, 개성적
사랑의 형태
생물학적 충동에서 기원
일종의 사로잡히기
몸의 사랑, 동물적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이웃이 누구든지 사랑함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의 사랑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는 '사적'인 사랑
개성적인 사랑
크레도 vs 리비도
크레도('믿습니다'로 시작되어 '믿습니다'로 끝나는 교리적인 것)의 우세
리비도(가슴에서 나오는 삶의 충동의 우세)
12. 결혼의 의미, 연애와의 차이점
캠벨은 결혼 역시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결혼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364-365쪽
이러한 결혼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캠벨의 일원론적, 신비주의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결혼을 음양의 상징에 비유하여 그 의미를 설명한다.
음양의 상징 태극
음양의 상징인 태극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잇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잇는 겁니다. 가령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의 노출? 이건 번지수가 틀린 거예요.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게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365-366쪽.
캠벨은 연애와 결혼을 구분한다. 그의 말을 따르면 결혼은 인간의 근원적 상태인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 사물에는 두 측면이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혼의 관계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물론 이는 캠벨의 의견이다.
13. 도덕성에 도전하는 사랑
한편 캠벨은 사랑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따르면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한다.(370쪽)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370쪽.
상당히 흥미롭고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다. 캠벨의 말을 따르면 사랑은 결혼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그러한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한다... 사랑은 체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차별금지법과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으로 사고가 이어진다. 책 속에서 캠벨은 결혼을 당연하게 '남성과 여성의 상징적 결합'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언급하지조차 않음으로써,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동성 간 사랑 혹은 동성혼 등을 '폐제'로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폐제는, 쉽게 말하자면 언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제외시키는 것인 배제와는 또다른 개념이다. 캠벨의 결혼과 연애는 이성 간에만 이루어진다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캠벨의 말대로 사랑은 도덕성에 대든다. 사랑의 형태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