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2008년,
2005년도 봄에 5개월간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저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사무실에서 비가오는 오후 커피를 마시면서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글을 써서
MBC라디오 여성시대로 보냈는데
채택되어 낭송하었다며 나중에 CD를 보내주시더군요.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
요즘 같이 가을빛이 짙어가는 날씨,
14기 아버지학교 조장봉사를 하면서 더더욱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저만 그런거 아니죠?
(위 운동화그림-남일수채화)
"아버지와 운동화"
이렇게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
불현듯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시골의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서
고만고만한 7남매의 대가족이었던 우리는
오순도순 정겹게 서로가 친구가 되었고 서로의 기둥이 되어
동네에서 누구라도 맞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용감한 형제들의 힘이 여지없이 발휘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꿈속에서나마 그리던 멋진 가방대신
이불보로 사용하던 헝겊을 재봉틀에 '달달달달' 박아 만든 책보에
그날 배울 교과서를 둘둘 말아
여자들은 허리에 남자들은 어깨에 가로 둘러매고
뛰어다니던 길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내 입에선 환호성이 새어나온다.
반짝 반짝 빛나는 “中”자가 새겨진 까만 모자를 멋지게 눌러 쓰고
한 쪽 모서리에 금이 가서 창호지를 꽃모양으로 오려 부친 낡
은 거울 속에서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내 위로 형이 둘이나 존재하다 보니
언제나 형들이 입고 쓰던 옷이나 물건을 물려받다가
처음으로 내 것이 생긴 멋진 가방을 밤새도록 만지작거렸다.
큰형은 고등학생, 작은형은 중3, 나는 중1,
이렇게 기골이 장대한 3형제가 까만 교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대문을 나설 때면 늘 몸이 아파 골골 하시던 어머님은
새벽밥을 지어 먹이고 어서 등교하라는
손짓을 하면서 마당 끝에 그렇게 서 계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첫 중간고사를 치루던 5월 단옷날에
우리 7남매를 남겨두고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셨다.
평소 몸이 아픈 엄마대신 동생들을 돌보던 누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 전에 시집을 갔고,
내 아래로 막내는 3살, 그 위로 5살과 8살 동생들은
아직 엄마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르던 때였다.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빨리 새 장가를 가야 한다는
친척들의 권고에도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독실한 불자이셨던 새 어머님이 들어오셨다.
이미 머리가 커버린 형들의 삐딱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나보다 어린 동생들을 대신하여
금방 어머니라 부르며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님은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우리 7남매를 친 자식보다 더 아끼며 훌륭하게 키워주셨다.
갑작스런 엄마와의 사별,
그리고 새어머니의 등장으로 사춘기라는 것도 모르고 지나던 때,
작은 형으로부터 물려받아 나의 유일한 등굣길 친구였던
고물자전거가 정말 싫었다.
장남이거나 또는 차남이면서도 새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 나는 위로 형이 둘씩이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불행으로 생각했다.
작은형으로부터 물려받은 교복도 이미 검정색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얗게 바래버려서 어서 고등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새 교복으로 맞추어 주신다는
아버지의 약속이 귓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등굣길엔 비가 내리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갔었는데
하굣길에 추적추적 비가 내려 포장되지 않은 황톳길 20여리를
흙이 묻어 바퀴가 굴러 가지 않으면 내려서
나뭇가지로 털어내고 오기를 반복하다보니
옷은 옷대로 운동화는 운동화대로 누런 황토색이 되어 버렸다.
늘 그러해왔던 것처럼 그날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지는 벗어서 물걸레로 흙탕물만 닦아내어 아랫목에 펼쳐 말리고
운동화는 깨끗하게 빨아서 저녁소죽을 끓이고 난
사랑방 부엌아궁이의 재를 고무래로 방구들이 있는
안쪽으로 깊게 밀어 넣고 부지깽이를 가로 걸치고
운동화를 기대어 말렸다.
다음날 아침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에 우리 집은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라기보다 일방적인 융단폭격이었다.
아버지의 고함과 함께 아침잠이 덜 깬 상황에도
나의 음모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얼마 전부터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아직 멀쩡하다는 이유로 냉정히 거절을 당했고
늘 하던 대로 운동화를 빨아 아궁이에 말리던 계획을
다소 불순한 생각으로 깊이 밀어 넣어 새
벽마다 소죽을 끓이시던 아버지의 불 소시개로 타버리면
결국 새 운동화가 생길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방문이 열리고 불에 그슬린 운동화가 부지깽이에 걸려
내 눈앞에서 짙은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길 때까지도
새 운동화의 달콤한 꿈에 젖어
사태의 본질을 얼른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가까스로 큰 매를 면한 나는
그날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등교를 하였고
결국 며칠 넘게 불에 타다 만 운동화를 다시 빨아서
잉크로 여기저기 위장을 하여 신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절대로 새 운동화를 사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화를 내시던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등교하려고 흙이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있는 내 앞에
슬며시 새 운동화를 던져놓으시고 헛기침을 하시며
삽을 쥔 손을 휘적거리며 들로 향하셨다.
공책 한 권을 사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 없이 사용했는지를 확인하고 돈을 주셨고,
소풍을 가려면 100원짜리 빳빳한 종이돈을 주어
30원만 쓰고 거슬러 오라고 하여 결국 하나도 못쓰고 돌아오게 하셨지만
삼 형제의 적지 않은 학교수업료는 물론
우리 칠 남매의 교육비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다.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시기 얼마 전까지
치매증세로 거동이 불편하신 몸이셨지만
그래도 자식은 알아보시며 기뻐하셨는데,
막상 수개월 의식 없이 쓰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모르는 것 없고
그 무섭던 우리아버지가 바로 이 분이신가!
중환자실의 침대위에서 무의식속에서도 손을 잡으면 놓지 않으려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불타버린 운동화 사건을 겪은 지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다시는 새 운동화 신기는 틀렸다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내 앞에 새 운동화를 놓아주시던
그때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투영되어 늘 안부전화를 드리곤 했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바이 동무! 아침은 잡수셨남유?”
친구처럼 농 섞인 전화에
“이놈아 지금 몇 신데 아침타령이냐?”
하시며 받아넘기시던 그 아버지는
지금쯤 저 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겠죠?
2008년 11월 비오는 날에
첫댓글 존경스러운 아버지셨네요... 저도 차한잔하면서 무섭던 아버지 생각좀 해봐야겠습니다.^^
우리들 아버지는 모두 호랑이 셨는데
우리 아버지들은 모두 토끼 입니다.
어쩜 가슴속엔 우리 아버지들이
호랑이를 그리워 하나봐요^^*
형제님 가족의 애환을 읽으면서 사뭇 숙연해지는 마음이었는데, 맨 끝에 슬핏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로 마무리하시니 더욱 감동이네요. 우리 어른들은 지독히 가난하면서도 자식 농사는 후하게 지으셨는데, 지금이라도 기운 남아 있는 분들은 부디 자식 더 낳으시를 간곡히 당부드리고 싶네요.
어릴적 작은집 식구들까지
바로 옆에 살면서 함께
식사도 하던 왁자지껄함이 싫어
전 딸이지만 하나만 낳았는데
아버지 학교에서 다자녀의 행복을
배우고 갑니다.
이젠 힘도 없고 씨도 없으니~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신 아버지는 모두가 한마음 일거라 믿고싶습니다.주님 곁에서 편안히 쉬세요.이석범 아버지 마티아의 지난 추억을 기억하소서.아멘.
사도요한 형제님 기도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형제님 글을 읽으며...
찾지도 부르지도 않은 불청객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저도 아직 제 아버지를 보내드리지 못했나 봅니다...
에구 어떻게 아버지를 떠나보내실 수 있겠어요?
점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마티아 형제님 그때는 다 그랬었나 봅니다.
저는 서울에서 살았는데도 학교나 성당갈땐 흰 고무신.
평상시엔 검정고무신.
그런데 이 깜장고무신이 닳지가 않는거에요 뻑뻑하기도하고
그래서 빨리 닳게하려고(또 엿도 생기고) 시멘트 바닥에 문데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뒈지지(?)않을 정도로 맞은 기억이납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엄마도 계셨고............. ^ ^
도시에선 그런 추억이 계시군요.
맞아요.
이젠 아스라한 추억의 한페이지로
간직하렵니다.
형제님 사랑합니다.^^*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실때도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허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때에라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 이런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아버지학교를 경험했었다면 아버님을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텐데... 마티아 형제님의 글을 보며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아버님의 깊고 무뚝뚝했던 사랑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라 아쉽고 그립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중환자실에서 제손을 꼭잡고
의식없던 때라도
아버지 사랑해요~
한마디 못한 제가 후회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