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세벨의 저주 악담을 들은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낙심시키기도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6, 개역개정)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 25:11, 개역개정)
지난해 3월 타던 차를 조기폐차 지원금을 받고 폐차했었다. 그리고 대체할 차량을 부산에서 자동차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둘째 동생에게 부탁했었다. 동생은 마침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컨 차량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형님이 구매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직장근무를 하던 딸래미가 귀국해 딸에게 경차를 하나 사주기 위해 자기가 주말에 낚시 전용으로 쓰려고 잘 꾸며놓은 차를 팔아야 한다고 하였다.
문제는 아내의 태도이다. 아내는 시댁을 싫어한다. 묵은 감정이 많다. 새어머니의 처신 때문이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네명의 동생들 까지 싫어하고 있다.
새어머니의 둘째 아들이 판매하는 차량이라 싫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새어머니에게야 묵은 감정이 말로다 못할만큼 많지만 그렇다고 동생들까지 미워하지는 않는다.
동생이 판매하려던 차량은 이것 저것 손을보고 필요한 것들을 추가하다보니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판매희망 금액이 동일한 조건의 차량에 비해 비싼편이었다. 하지만 차가 안팔려 애태우는 동생을 위해 내가 기꺼이 차량을 인수해주기로 했던것. 아내는 그래서 지금의 차가 싫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산불감시 근무를 하면서 너무 유용하게 사용중이다. 아직은 날씨가 춥다보니 순찰 중간 중간 차 안에서 몸을 녹여줘야 한다. 현재의 용도에는 너무나 최적화된 차량이다. 그래서 어제는 퇴근하고 아내에게 넌지시 마음을 떠봤다.
"당신은 지금도 차를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내의 대답은 "내가 팔라고 한다고 어떻게 돈주고 산 차를 팔겠느냐"고 정색을 한다. 즉 그냥 농담을 한 것이라는 것. 물론 나도 그렇게 알고있지만 듣는 내마음은 편치가 않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말 한마디 한마디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나는 가급적 농담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그러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