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당 성욱(印空性旭)큰스님을 보내드리며
인공당 성욱큰스님을 보내드리러 문상 갔을 때
입관(습염) 참여와 성복제 참여 및 별도의
시간을 얻어 문도들과 유족들께
큰 스님과 모심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게 된
인연이 마지막 큰 인연이다.
인공스님은 먼저 열반하신 벽파스님,대운스님,
백우스님,운산스님과 생존해 계신 인곡스님,
운경스님과 함께 세칭 태고종 7인방이었다.
종단의 면모를 가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생각한 총무원장 남허당 남채스님이
등용한 74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0대 청년들이었다.
젊디 젊은 한국불교청년회 출신
법륜사 운산스님 봉원사 대운스님 인공스님,
백련사 인곡스님,운경스님,안정사(청련사)
벽파스님,백우스님 등 일곱 명이 재적사찰의 전폭
지지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힘차게 진행했다.
75년 장충체육관 법회의 성공으로
구심점을 갖추고 80년대 초 연등회(봉축법회)
영산재 참석,서울경기 연합방생법회,전 종도불자
의료보험 혜택불사인 보건공제회,신용협동조합,
종도 자제들과 초급 승려들의 교육기관인
동방불교대학 설립운영,
개별 득도제를 종단 합동득도제도를 통해
일체화 도모,불교계의 가장 좋은 불교성전인
<신편 불교성전 간행>, 두 차례 총무원사의 건립,
조계산 선암사의 총림 지정과 운영,정규대학인
동방문화대학원대학 개교 운영,
국내 최고 역사의 월간불교 발행,
종합사회복지관 교계 최초 운영 등을 통해
태고종을 교계 제 2종단으로 우뚝 세웠다.
1954~1970년까지 무려 16년 간 정부기관의
무력 탄압과 악법 탄압으로 없어졌던 종단이
1970년도 5월 8일에 겨우 3개의 사찰로
종단 깃발을 바꿔 건 이래 3천여개의 사찰과
7천여명의 승려 및 전법사의 체계로
우뚝 선 것은 일제와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최빈 구호대상국에서 G7의 위치에서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구호원조국 지위를
얻게된 것만큼의 변화요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여러 평가가 있지만 일곱 스님의 기여도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공스님도 그 가운데 한 분으로 주로
국제 담당 종무위원,봉원사 주지,
총무원 부원장,중앙종회의장,총무원장 등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나와도 인연을 맺었다.
어느 글에서 밝혔던 지방사찰 큰 행사 설법 참여시
봉원사 후배스님에게 청법의식을 지시한 스님이
바로 인공스님이다.
인공스님이 1996년 총무원장 혜초스님 때
혜일스님(재무부장),재홍스님(교무부장),능해스님(사회부장),법현(총무부장)이 함께 보좌하며 봉사했다.
그 때 월드컵유치 기원법회를 성공적으로 봉행한
공덕으로 유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분위기는 민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공공기관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공스님은 재원 마련에 힘을 많이 쓰셨다.
당시 태고종으로서는 쉽지 않은 불교방송 중계까지 하며 노력했다. 보덕사 교임의 아들 정덕일형제와의
친분으로 가능했다.
유영철이라는 살인범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세상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하필이면
서울 서대문 안산 숲속에서 일을 벌였는데
언론에서 생각 없이 봉원사 뒷산이라고 보도하여
인식이 공연히 나빠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나는 당시 밖에 있었는데 뭔가 분위기 반전이
필요하다 싶어 전화로 당시 주지인
인공스님께 억울하게 희생된 영가들을
무료로 천도해주는 영산재 봉행을 제안했다.
인공스님께서는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여
중요무형문재 및 유네스코문화재 보유 사찰답게
장엄스런 천도영산재를 봉행했다.
나는 소임도 없고 해서 봉행 날짜 봉행시각인
꼭 오전 10시에 도착했다.
행사는 바로 시작되었는데 나를 본 인공스님이
대중과 사회자에게 '법현스님 왔으니 사회자
법현스님으로 바꿔'라고 지시해 얼결에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으로 손을 얹은 기억이 있다.
전법 55년 순례 30년 기념 사진집 공空의로의 여인旅印출판기념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봉행할 때
사회를 부탁해서 진행한 인연도 깊고,동방불교대학
30주년기념법회에서 총무원장 겸 이사장으로서
학인들에게 장학금을 계속 주어서 고맙다는
감사패를 주어서 기쁘게 받았다.
동방불교대,중앙대불교학생회,중앙승가대 대학원에
장학금을 주었었다.
은사이자 법사인 운산스님이 총무원장,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이사장,재단법인
태고원 이사장으로 진행한 일들이
종도들의 이해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출마해 총무원장이
된 분이 인공스님이다.
원장 되고서 바로 나에게 부원장에 출마하라고
권해서 거절했다. 운산스님이 임기 남기고
그만 뒀을 때 운산스님께 '제발 종무에서
저를 잊어달라'고 했을 만큼 마음을 놓았기에
그런 것이다. 운산스님의 지원이 필수였고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나의 참여를
기다리기에 거둬들여 청봉스님,화경스님과 함께
출마했다. 요즘은 관심을 두지 않아 규정을 모르지만
당시에는 임명이나 동의가 아니라 종회 선출이었다.
세 스님이 나를 선임인 행정부원장 맡기를
바랐지만 나는 관계상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교무부원장에,청봉스님이 행정부원장에,
화경스님이 재무부원장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영산재의 유네스코문화재 지정 등
성과도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일로 그만 두었다.
인공스님도 이런 저런 일을 겪은 것으로 들어
여러모로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모쪼록 잘 가시기를 빌었다.
나무아미타불!
http://www.kbulgy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
https://m.cafe.daum.net/buruna21/GlP/9167?searchView=Y
https://m.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67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