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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러 온 그리스 사람들(1)
요 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0-26 / [예수를 찾아온 헬라 사람들] 유월절 축제에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는 헬라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리 지방 벳새다에서 온 빌립에게 가서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22) 빌립은 안드레에게 이 일을 상의한 뒤 둘이 함께 예수께 가서 말씀을 드렸다. 23-24)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밀알 하나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 생명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될 것이다. 25) 만일 너희가 이 세상에서 너희 목숨을 사랑한다면 너희는 그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이 세상에서 너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목숨이 영원한 생명으로 보존될 것이다. 26) 만일 그들이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와서 나를 따르라고 전하라.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명이 빌립을 찾아가 예수 만나 뵙기를 간청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20-2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헬라인도 예수께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이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은 철학, 신화, 종교, 사상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과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빌립을 가리켜 “주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의 공손한 언어에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그들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빌립에게 부탁을 한 것은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식 이름이며 빌립이 제자들 가운데 헬라어를 가장 잘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청을 받은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상의한 뒤 예수께 이들의 방문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예수께서는 이 헬라인들의 방문 소식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셨던 주님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인자는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기다리고 있었던 분명한 대답이었습니다. 인자의 영광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죽음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영광의 시간이 왔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24-26)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이란 말은 예수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입니다. 땅에 떨어짐은 세상에 성육신하신 사건을 의미하며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구원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밀알 비유를 제자들과 헬라인들의 삶에도 적용시키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영생과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성도의 비밀입니다.
적용: 권력과 지식과 종교와 철학도 사람들에게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예수를 뵙고자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는 그 희생과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본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 설 교 >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0~26 / 김광일 목사
브라질 리우올림픽 양궁경기에서 2관왕을 차지한 장혜진 선수는 믿음의 궁사입니다. 개인전 결승에서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장혜진의 기도 세리머니는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상당수 크리스천 청년들이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숨기지만 장혜진은 전 세계인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밝혔습니다.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녀는 사선 뒤에 활을 내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준 하나님을 향한 감사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관중석을 향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는 시상식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습니다. 금메달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능력을 주시는 분을 믿고 합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며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는 성격”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선에 섰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부르면서 ‘믿고 쏘자’는 마음으로 임합니다”라며 웃었습니다. 장혜진 선수가 유일하게 2관왕을 차지한 것은 멘탈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의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멘탈은 믿음을 통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일으킨 것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은 그녀는 준결승에서 초속 6m 풍속으로 인해 3점을 쐈을 때도 실망하는 표정 대신 미소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3점을 쏜 뒤에도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 것이 평정심을 찾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장혜진은 국가대표 기독교 선수사이에서도 신앙심이 깊기로 유명합니다. 태릉선수촌에서 생활을 할 때도 늘 성경책을 곁에 두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습니다. 태릉선수촌 신우회장 안래현 장로는 “혜진이는 말씀에 푹 빠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며 “평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예쁜 손글씨로 적고 읽으며 심리적인 안정을 꾀하는 습관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은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만의 루틴(routine)을 갖고 있는데 장혜진 선수는 활시위를 당기기 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이 루틴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경기 전에 펼쳐보는 수첩에도 손 글씨로 적은 성경 구절이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현지 올림픽선교위원회 실무회장을 맡고 있는 윤덕신 목사는 준결승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던 장혜진을 만나 “승리의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고 배짱 있게 시합하라’고 격려했고 ‘의로운 팔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퍼펙트를 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장혜진은 기도에 응답하듯 명승부를 펼치며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두 번이나 올랐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윤 목사를 찾아온 장혜진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며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금메달의 영광은 주어진 경기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장혜진 선수를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확실한 증표였습니다.
본문에 보니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헬라의 도시 국가에서 온 사신들로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를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기에 예수께도 좋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 귀히 여김 받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나오는 ‘귀히 여기시리라’는 헬라어로 ‘티마오’인데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한 알의 밀’의 비유를 언급하시며 자신이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임을 언급하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심겨지고 썩어지고 죽어진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김 받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십니까?
첫째로 떨어져 죽으면
한국교회사 초기에 알려지지 않은 헤론(John W. Heron)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지만 한국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로서 그 대학의 교수직을 사양하고 1885년에 내한하여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뒤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다른 선교사들은 휴가를 떠났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 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가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놓고 선교지 한국에서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가져오는 데는 우리가 알지 못한 곳에서 이처럼 희생하고 순교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삶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의 역사는 한 알의 밀알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류를 구원했듯이 우리도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혀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은 썩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어지는 희생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존재합니다.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고, 세상에 영향도 끼치지 못한 채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땅의 것에 집착하고 주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면 아무 변화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현상유지하며 존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본받아 자기를 희생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흘러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밀알의 희생이 있어 하나님께 귀히 여김받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생명을 바치면
스위스의 헨리 듀넌트(Jean Henry Dunant)는 첫 번째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적십자사의 창립자로 알려진 앙리 뒤낭이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 은행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나폴레옹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공교롭게도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전쟁터로 나폴레옹을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전쟁의 현실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 비린내 나는 죽음의 지옥 같은 현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피투성이 부상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의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큰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이 땅에 폭력과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야 한다” 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부상자 돕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적십자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꿈을 포기하고 헌신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드디어 적십자사를 창설하고 적십자사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포기하는 자들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할 때 세상에서도 귀하게 여김 받는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찌 귀하게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본문 25절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말씀하심은 다른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하심이 아닙니다. 예수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면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기를 포기하셨습니다.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부유함을 포기하셨습니다. 명예를 포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어 구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높여주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자아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나의 유익, 나의 체면, 나의 고집, 나의 재능, 나의 시간, 필요하다면 나의 물질, 더 나아가 나의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으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별한 존재(something)로 나타내 보이고 싶은 마음까지 내려놓고 포기하여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쭐대고 싶어하는 자아를 비우고 그 중심에 예수를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포기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더욱 낮아지며 자아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따르며 섬기면
마더 테레사(Madre Teresa)는 체구가 작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인도 캘커타의 빈민들과 생애를 같이 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말씀대로 부활해서 많은 열매를 맺었기에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길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 안에서 작은 것은 없다’ 고 말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크신 분이시기에, 하나님 안에서 존재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돌보던 행려자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작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이 크시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많은 행려자들을 정성으로 돌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유명한 그녀의 말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캘커타에 수 만 명의 행려자들이 있는데, 당신이 돌보는 사람들은 고작 수십명에 불과합니다. 행려자 전체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행려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가 만나는 주위에 있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이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제를 기피하면서 ‘세상에 도움 줘야할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은데, 고작 몇십명을 도와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다 돌볼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 앞에 맡겨진 사람들,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집중해서 섬기며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따르며 섬겼던 것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 알의 밀이 땅 속에 들어가면 자신의 몸을 거름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밀알의 눈에서 싹이 나오고 흙을 비집고 나오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몸을 썩혀 거름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즉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이 따를 때 생명이 태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숨을 바쳐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인을 향한 충성스런 노예처럼 우리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섬기신 예수는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 섬기며 사셨습니다. 서로 섬김을 받으려고 힘겨루기를 하는 세상을 자원하는 섬김을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Nicholas Herman)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가 죽은 후 추모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발견했다. 수도원을 위해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신발을 수선할 때도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현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라는 말은 부담 없이 받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섬기기를 원합니까? 주를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부담스러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에 봉사하느라 교회를 제집 드나들듯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섬기고 따라야한다는 말에 마음을 활짝 열지 않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쉼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예수가 메라고 하는 멍에는 메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일은 가능하다면 뒷전에 서 있으려고 합니다.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이 열 두 제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습니까? 생명도 내어놓는 포기가 있습니까? 주를 따르는 섬김이 있습니까? 한 알의 밀알처럼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섬기는 결단을 통해 주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귀히 여김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이방인들
요 12:2-24 / 이정선 목사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땅 밖으로 나가보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기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부모가 그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던 적이 있었고, 공생애 중에는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두로와 시돈 땅에, 또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에 다녀오시는 것처럼, 접경 지역에 잠시 다녀오시는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주로 갈릴리에서 사시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상대하셨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군중을 가르치기도 하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대중을 추종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그중의 하나는 탈락하는 바람에, 예수님이 남기신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열한 명의 제자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는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민족주의는 종교적 신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하늘로부터 아래로는 땅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그 민족적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 따위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평생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셨고, 필생의 과업이라고 남기신 것은 유대인 제자 열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유대민족주의의 틀 안에 계셨던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유대인들을 제자로 삼아 양성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주의자였던 예수님이 갑자기 세계주의자로 바뀌신 걸까요?
저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무척이나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셨던 적이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the whole earth is mine, 출 19:5)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민족들은 하나님을 넘봐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담을 높이 쌓아두고 접근을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우리만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만 하나님을 소유하는 복을 누리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 제자들을 양육하셔서 온 세계 모든 족속들에게 보내시는 예수님의 전략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이 나중에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이방인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태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했던 민족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포로로 다 끌려간 후 그 지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게 된 이민족입니다(왕하 17:23-24). 이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큰 재앙을 겪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땅의 신 여호와를 섬기지 않아서 그렇다 생각하고 여호와 섬기는 법을 배우기로 하였습니다(왕하 17:26-27).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게 되도록 개종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도 섬기고 자기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풍속과 종교에 따라 자기들의 신도 섬겼습니다(왕하 17:33).
이런 사마리아인들의 행태는 유대인들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에 들어와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고 사는 것도 사는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다 짝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시늉을 하면서 자기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생각되는 여호와의 언약백성의 특권을 넘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롤렉스시계를 차는 사람들의 클럽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롤렉스시계를 차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에 3만 달러 이상 되는 롤렉스시계를 차야 그 클럽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명품 롤렉스시계를 차는 자기들이야말로 멋과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홍콩에서 10달러짜리 짝퉁 롤렉스시계를 사서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그 짝퉁 롤렉스시계 찬 사람을 클럽에 가입시켜 줄까요? 가입은 안 시켜줘도 최소한 같은 취향을 가졌다고 환영하고 호의를 베풀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분노하고 그 짝퉁 롤렉스시계 찬 사람을 증오하겠지요. 사마리아인들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한번 봅시다.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기 위해 강을 건너 베레아 땅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시곤 했는데, 예수님과 사마리아를 함께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4:14)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위대한 설교를 들었던 유일한 청중이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서조차도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사마리아인들이었고, 그들 중에서도 더 멸시를 당하던 여인을 예수님이 만나셨다는 이 사건의 상징성이 얼마나 큰가요?
한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이 동네를 싹 태워버리라고 할까요?’(눅 9:54).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물론 야고보와 요한이 속없는 소리를 했기에 꾸중을 들어도 쌉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보편정서를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정서가 잘못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열 명의 문동병자를 고쳐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만 다시 돌아와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필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안 하고 살았지만, 문둥병자들 사이에는 그런 구별이 없었던 모양입이다. 어차피 천형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형편에 자기들끼리 누구를 경멸하고 미워할 계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모두 유대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는데,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 17:18-19).
물론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유대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그 유대인들 중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많이 가지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가 예수님을 뒤따라오면서 딸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로 애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저런 이방인에게 나누어줄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 있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을 했겠지요.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애원하자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만,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여인 역시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기분이 나빠지거나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간청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말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딸이 나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5:21-28).
예수님 마음이 중간에 변하신 것일까요? 처음에는 안 고쳐주려고 하다가 여인의 말에 감동해서 고쳐주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시거나 행하시는 일들은 모두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 당사자가 구원받는 것이지만,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마음을 제자들이 알고 배울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신념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시려는 거예요. 그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얻을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까 혼자서 돌아온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도 같은 케이스 아닙니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 이방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거예요.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백부장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아주 노골적으로 이방인의 편을 드십니다.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허리라고 일컬어지는 중견 간부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중대장쯤 되겠는데, 로마 주둔군 장교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복자요 원수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사랑했고, 심지어 회당까지 지어주었던 모양입니다(눅 7:5).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백부장이 하는 말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말씀만 하셔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자기 부하들은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만물에 대하여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어안이 벙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유대인들 앞에서 이 이방인의 믿음이 어떤 이스라엘 사람의 믿음보다 크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교만해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인간들아, 잘 봤냐? 누가 너희들만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고 하더냐? 너희에게 믿음이 있으면 보여 봐라. 너희가 이 이방인에게서 좀 배워야 하지 않겠냐? 예수님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마침내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얻게 되는 장면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왜곡시키는 이스라엘은 그 지위를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구원 받은 백성과 멸망할 사람들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유대인에게 먼저 언약이 주어졌고, 이제 유대인들이 그 언약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모든 이방인,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이 천국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붙잡고 씨름하고 계시는 거예요.
한번은 헬라인 몇 사람이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먼저 빌립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빌립에게는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서도 허물없이 지내는 고향 친구 안드레에게 말했습니다. ‘어이 안드레, 이 헬라인들이 선생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안드레가 안 된다고 반대했으면 아마 안 되었겠지요. 그런데 안드레는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그 헬라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것과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구속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요 상징인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리는 저주를 당하게 되지만, 그 죽음으로 모든 민족, 온 인류의 구속을 이루심으로써,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달성하시고 영광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2장 27절과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7-28)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아주 명확히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구원 얻어야 할 사람들은 물론 언약백성인 유대인들이 먼저 포함되지만, 또한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사마리아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땅 끝까지라도 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방인은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갈 3:28). 흑인이나 백인이나 누구나 아무런 차별 없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최선을 다하였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산 넘고 바다 건너 세월 따라 길 따라 복음이 전해지면서, 100여 년 전에는 마침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이 복음이 전해져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땅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라는 명령에 순종했던 선교사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어둠과 죄악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뻔했습니다. 물론 세상 곳곳에 아직도 복음의 빛이 비춰지지 않은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이 그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이 중차대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함께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어야
이필재 목사
지난 주일은 제가 뉴욕과 도미니카에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다녀오느라고 주일을 비웠습니다. 본 교회에 장례식이 날 때마다 봉사하는 나사로봉사회가 있는데, 거기서 늘 봉사하시는 이영숙 권사님께서 오래 전에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갔더니 저에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갈 시간이 다가온 것 같은데 유언을 할 테니 목사님이 잘 들으시고 그대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돈은 없고 내가 살던 아파트가 하나 있는데 내가 죽은 다음에 그것을 팔아서 제3국에 선교비로 쓸 때 특별히 교회 없는 자에게 교회 하나를 건축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과도 다 합의한 사항이니까 마음 놓고 목사님이 그렇게 실천해주시면 편안히 주님께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영 안 돌아가시고 계속 건강해 지셨어요. 그랬더니 또 찾아오셔서 죽어서 하는 것보다 살아서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시며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적지 않은 금액의 헌금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재정부를 통해서 도미니카로 교회 건축하라며 전액 송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건축이 다 되었다고 헌금하신 권사님과 제가 와서 헌당예배와 제1회 세례식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행기로 도미니카를 왕복하려면 40시간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도저히 자신이 없다 하셔서 저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동네 마을 사람들이 300명 정도 모였는데 헌당 예배를 잘 드리고 처음으로 신앙생활 시작해서 처음으로 다섯 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아예 강으로 데리고 나가서 침례를 주어서 제가 세례를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5년 동안 우리 갈보리 교인들이 제3국 개척지에 교회 건축한 곳이 22개입니다. 우리 갈보리교인들이 남모르게 많은 일을 저와 상의해서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이 4월 첫 주일에 오실 텐데, 다 끝난 다음에 저를 데리고 또 한 곳으로 갔습니다. 여기도 똑같은 교회를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초등학교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벌떼 같이 많은데 교육도 안 시킵니다. 그래서 그 건축한 교회를 학교 건물로도 쓰게 1, 2, 3학급을 만들어서 선생님 3분과 유치원 선생 이렇게 총 4분만 지원하면 훌륭한 학교가 되니까 우선 1~3학년 학급을 만들고 그 후에 4~6학년 나중에 만들기로 합의를 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교사님이 재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날 데리고 또 딴 데로 가서 여기도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또 입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선교를 하면서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도와주신 성도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이 한때 우리 민중들에게 세상 말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유대 땅에서는 치솟을 만큼 인기 있는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직후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그 사건이 나오잖아요? 예수님 혼자서 제자들 몇 사람과 한 것이 아니라 베다니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데서 죽어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를 현장에서 살려서 멀쩡하게 살아났습니다. 이런 사실적 내용을 거짓말 할 수도 없고 소문이 온 유대 땅에 삽시간 입소문으로 퍼졌습니다. 모두다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그 때가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하니까 온 예루살렘이 예수를 보기 위해 온통 나와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언된 메시야다. 우리 히브리 민족에게 하나님이 예언하신 메시야가 이제 오신 것이다. 성경에도 있지 아니하냐?” 12장 9절에 보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라.” 지금 온통 한 나라 안에 큰 이벤트가 된 그런 사건이 되었습니다. 유월절이라 온 세상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다 그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은 나라에서 최고 영광의 절정으로 쳐다보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20절 말씀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문맥에 안 맞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수가 헬라 문화권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본국에서 사는 숫자보다 외국에서 사는 숫자가 항상 많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민은 5백만입니다. 그런데 미국에만도 유대인이 6백만이 삽니다. 프랑스, 유럽 할 것 없이 외국에서 사는 숫자가 훨씬 많은 그러한 민족 형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도 헬라 문화권에서 많이 살았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유월절이 되니까 예루살렘으로 다 몰려들어서 유월절 행사를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헬라인 몇 사람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누구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한번 만나려면 얼마나 힘든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 만나고 싶어 하니까 제자들이 못 만나게 하는 일을 해서 바쁩니다. 그러니까 이 헬라인들이 일종의 로비 활동을 벌이는 겁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빌립은 헬라 문화권 사람입니다. 우선 빌립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러니 헬라 사람들이 빌립에게 와서 부탁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해 달라. 우리가 큰일을 가지고 왔다.” 빌립이 그 말을 듣고 보니까 해주고는 싶은데 자기 혼자 힘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 제자가 된 안드레에게 가서 부탁하는 겁니다. “지금 헬라 사람들이 와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는데 나 혼자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다. 그러니 나와 네가 같이 노력해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와서 예수님 보고 싶어 하니까 만나도록 한번 노력을 해주자.” 아마 비서실을 몇 번 거치는 과정 같은 그런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면담이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말을 듣고 하신 말씀의 줄거리가 오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헬라인들은 누구이고, 왜 예수님을 이렇게 뵙고자 했는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그 내용이 헬라까지 다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나라로 한번 모셔가려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의 조그만 도시 국가 에데사(Edessa) 왕국으로 모셔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왜 예수님을 그리 모셔 가려고 하는가? 에데사 왕국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임금님이 이제 다 늙어 국정을 살필 수 있는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장자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되겠는데 이 왕자가 지금 문둥병에 걸려서 출입도 못합니다. 그래서 죽어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님이 특별히 문둥병 환자들을 다 깨끗이 고친다는 소문이 에데사 왕국까지 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예수님에게 대사를 보낸 것입니다. “너희들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을 이곳으로 모셔오라. 그러면 그분을 왕처럼 대우해서 이곳에 있게 할 것이며 너희들도 일평생 공로를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한번 만나자고 빌립에게 청을 놓고 안드레에게 청을 놓고 해서 만남의 성사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때 예수님의 주변은 열광적인 존경심이 치솟은 것만큼 예수님의 신변이 또 어려워졌습니다. 12장 1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의 열광이 “이는 메시야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님으로 앉히려 하는 분위기가 전국을 휩쓸게 되니까 권세가들이 긴장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라.” 이렇게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의 에데사 왕은 “만약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시면 그런 신변의 위험도 없고 왕궁에서 평생 동안 잘 살 수 있게 약속하고 너희들도 이 일만 성사시키면 그렇게 내가 대우하겠다.” 그 화려한 약속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섭을 해서 이야기를 한 끝에 답변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신 답변이 무엇인가? “나더러 너희 있는 곳에 오라 하지 말고 너희가 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나더러 너희 가는 길을 따르자 하지 말고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따르라.” 쉽게 말하면 “나는 너희 나라로, 왕궁으로 데려갈 생각 하지 말고 너희조차도 가지 말고 이 자리에서부터 나를 따르라. 그것이 더 복된 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가는 길에 너희도 있어야지 너희 계획에 나를 따르라 한 말이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길을 내가 가고 있다. 죽으러 가는 길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내가 만약 너희들을 따라서 에데사 왕국에 갔다고 하자. 그래, 내가 신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그 왕자의 병을 고쳐줘서 그가 왕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자. 그도 몇 년을 살다가 또 죽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그 왕자나 그 임금이나 너희나 다 같이 영원히 영생하는 생명 불멸의 진리를 나한테 배우고 그것을 오히려 따르라. 임금님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문둥병 하나가 낫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영생이다.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것을 위해서 너희가 나를 따라야지 너희 계획에 나를 따르라 하는 말이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한 알의 밀을 통해 생명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생명 보존의 대원칙, 생태계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쪽이 계속 죽어야 한쪽에서 계속 살아납니다. 식물이 저렇게 무성하게 살아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식물들이 죽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와서 살아있는 겁니다. 동물들이 저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동물들이 수없이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먹잇감으로 먹이 사슬이 되어 죽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겁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아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날마다 죽어 가야 됩니까? 한쪽에서는 계속 죽어야 한쪽에서 계속 살아나는 생태계의 원리! 죽는 것이 없을 때는 사는 것이 없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살을 떼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받아먹으라. 나를 먹는 것이다. 내 생명을 먹고 나는 생명이 없어지고 너희는 살 것이다.” 그런 원리로 성찬을 우리에게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죽어지는 것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역사가 살아나는 진리! 여기 특별히 강조한 말씀이 “땅에 떨어져”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게 썩어버리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다 세상에서 높임을 받기 원하고 인기가 절정에 오르기를 바라고 아주 하늘 같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심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보이지도 않게 썩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약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을 통해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은 왕궁의 화려한 약속을 받고 그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나를 따르는 자는 이 진리를 깨닫고 영생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 로버트 쉴러 목사가 시무하시는 크리스털 교회는 미국에서 제일 아름답게 건축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유리입니다. 교회 전체가 다 유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우선 그것부터 구경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거기 가면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인들이 그 교회 들어가기 위해서 다 밟고 가는 길에다가 교회 건축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한 사람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서 밑에다 다 깔았습니다. 날마다 교인들이 밟고 다닙니다. “아니, 이런 공로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비석에 세워서 교회 정문에 다 우러러보게 세워야지 왜 땅바닥에 이름을 깔아서 날마다 밟고 지나게 하느냐?” 그랬더니 설명하는 집사님이 “이분들이 이 교회 건축을 위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들이 땅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크리스털 교회가 마련된 것이라고 영원히 기념하는 뜻으로 이름을 땅에다 깔았습니다.” 그런 설명을 하더라고요. 잘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는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그렇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박해 시절에 레티모 감독이 순교를 당하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교인 한 사람과 같이 갔습니다. 니들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레티모 감독이 니들리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 일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는 오늘과 내일 영국 땅에서 영원히 끌 수 없는 신앙의 불을 붙이러 가는 길이요.” 그래서 영국의 신앙이 그들의 순교로 다시 빛나게 되는 역사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제가 하와이에 처음 갔을 때 데미안 신부 이야기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거기 가서 알아봤습니다. 그는 젊은 신부로서 하와이 나병 환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고난당하는 그들을 위해 열심히 전도를 했더니 한 사람도 예수를 안 믿어요. 물어봤습니다. “왜 나를 따르지 않느냐?” 나환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당신과 같이 그렇게 건강한 몸과 정상적인 그런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도 당신 같이 예수 믿으라고 할 수 있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환경이 되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그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있는가 한번 해보십시오.” 아무도 안 믿어요. 한 사람도 전도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데미안 신부는 그날부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곳에 보내신 나도 나환자가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그때부터 나환자가 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같이 음식을 나눠먹고 같이 잠을 자고 그들의 상처에 자기 상처를 갖다 대고 일부러 그들에게 피를 흘리고 자기 피를 섞어 버리고 그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마침내 문둥병에 점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나환자가 되어서 “여러분, 나도 여러분과 똑같아 졌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환자들이 “아니, 저렇게 건강하고 잘생긴 젊은 신부가 우리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 피나는 노력을 하고 날마다 기도를 하면서 나도 나환자 되게 해달라고 하다니!” 그 과정에 이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해서 마침내 하와이 나자로 마을을 성 나자로 마을로 만들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데미안 신부가 전하는 복음을 믿어서 그렇게 거룩한 성지로 남았잖아요?
누군가는 땅에 떨어져 죽는 사람이 한명 있을 때만이 살아나는 생명의 원리! 그래서 “땅에 떨어져 죽으면” 오늘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에데사 왕국으로 데리고 가서 호강시키려고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있어야 한다.” 오늘 바로 예수님은 이 성찬 예배를 초대하는 뜻이 뭡니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어야 한다. 너희 계획하는 일에 나를 날마다 끼어 들이고 예수님 이리 오십시오, 저리로 가십시오 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따라야 한다. 내가 가는 이곳에 너도 같이 있어야 한다. 나를 에데사 왕국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말라. 내가 있는 골고다 길을 너희가 따라 오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마음으로, 그러한 사명으로 오늘 이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알의 밀
요 12:20-36 / 김영규 목사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요12: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3-26)
헬라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다
고난주간 첫째 날, 종려주일에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시가행진을 하셨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무렵에 일어난 일입니다. 몇 명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내용들을 생략하고 이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헬라인 몇 명이 찾아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누구일까?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요12:20-22) 헬라인($Ellhn)이란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이 아니라 순수한 헬라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교도인 헬라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매년 유월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올라왔다’는 표현은 “ajnabainovntwn”인데, 습관적으로 올라왔다는 뜻입니다.(used to go up) 단순한 개종자가 아닙니다. 구스 내시처럼 하나님 경외자(God fearers)로, 명절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독실한 유대교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뭔가 꼭 묻고 싶어서입니다. 어떤 영문 번역에는 “kept on ask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빌립을 찾아 왔습니다. 빌립은 이들을 안드레에게 안내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같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으로 둘 다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자주 함께 언급됩니다. 빌립은 결단력이 부족했던지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떠넘깁니다. 반면에 안드레는 무슨 일에 부딪칠 때마다 예수님께로 가져갑니다. 자기 형을 데려 오고(1:44), 보리떡 다섯 덩이를 가진 아이를 데려 오고(6:7), 무슨 일이 생기면 예수님께 잘 가져 오는 것도 축복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헬라인과 가까웠고 헬라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헬라인이 찾아온 것은 시기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보시면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라고 하셨습니다. 영광 얻을 때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차매”(갈4:4) 주님이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때에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반 동안 주로 갈릴리와 유대에서, 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에서 순수한 이방인이 주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헬라인들에게서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과연 이제는 내가 전 인류를 위해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한 알의 밀이 죽으면
자기를 찾아 온 헬라인들 앞에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이 말씀은 윤리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겁니다. 니고데모처럼 이 헬라인들도 질문을 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한 알의 밀입니다. 주님이 말씀한 한 알의 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밀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 받고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밀알의 교훈에는 대속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의 교환성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땅에 뿌린 씨앗은 분해되어 사라집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일어납니다. 만일 땅에 뿌린 씨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새로운 생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로 죽으셨기 때문에, 주를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죄인들의 생명이 교환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내 생명이 교환되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으세요. 예수님이 내가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생명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으세요. 영혼 구원 받고 육신 구원 받으세요.
둘째는 주님의 죽음이 가져온 대속의 보편적 효과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었는데 엄청난 수확이 발생합니다. “한 알의 밀이...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한 분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전 인류가 살아납니다. 엄청난 수확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님은 거기서 30 배, 60 배, 100 배의 수확을 말씀하셨습니다.(마13:23) 주님의 죽으심으로 아담 이래의 전 인류가 살아나게 되었으니 백배가 아닙니다. 수 백 억, 수 천 억 배가 넘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9) 얼마든지 부르시기 때문에 아직도 부르실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내 주변에 아직도 부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불러내세요. 주님의 부르심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됩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은 한 알의 밀을 말씀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어라!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로 죽어라! 그런 사람이 주님을 제대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주님이 계신 곳, 천국에 같이 있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를 죽이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아버지께서도 귀히 여기십니다. 신앙의 길은 자기를 죽이는 길입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하나님의 뜻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 뜻에 100%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땅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 자녀들이 주님의 뜻에 100% 순종해야만 하나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 뜻에 100% 순종하지 않으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100%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살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만 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남을 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코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했습니다. 필립스 역에 보면 “그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 생명을 파멸시킬 것이다.”(The man who loves his own life will destroy it) 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고약한 죄악은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이란 나만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이기심은 사회를 사회될 수 없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이기심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의 마음입니다.
신앙은 인격의 재건축입니다. 이전 건물을 허물어야 새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 부정, 내 인생에 대한 경영권 포기!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과 부자 청년 사이의 대화를 보세요. 청년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행동? 주님은 오히려 청년의 마음에 있는 주인을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났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 예수 믿는 사람모두가 다 재산을 팔아 없애고, 부모형제를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것이라 주장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자아가 철저히 죽는 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아가 죽을 것인가? 주님처럼 하면 됩니다. 주님은 지상 생애 중에 하나님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유보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모든 문제는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모든 권리를 유보하셨습니다. “유보”라는 말을 쓴 것은, 완전한 포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내 권리를 유보하면 됩니다. 권리를 유보하면 자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세요.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집에 사셨습니다. 공생애 동안 자기 거처도 없이 사셨습니다. 온갖 비난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죄 없이 붙잡혀서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네 주님이 어떤 기도를 하셨나요?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아버지여 이 시간을 면케하여 주소서”(공동). “이 때를 피하게 해 주소서”(현대인) “아버지여 이 시간들을 무사 통과케 하소서”(20세기 역) 오늘 말씀 27절에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하셨습니다. 이 귀절은 여러 말로 번역됩니다. “내가 지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공동번역), “몹시 괴로우니”(현대인), “초조하니”(새번역), “troubled” (niv,av,jb)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심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심, 심판의 두려움, 버림받아야 하는 마음의 고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음까지도 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27, 현대인의성경)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27, 공동번역) 아들이 죽는 것이 아버지께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하늘에서도 같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 아들의 죽음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 다 영광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생명을 얻게 됐기 때문입니다.
내가 철저히 죽어야 됩니다. 지금 내가 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뭡니까?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 내 지식, 내 명예, 내 재산, 내 권세, 내 사람, 내 습관이 다 죽여야 됩니다. 내 뜻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내 인생의 사명이 뭡니까? 인생의 첫 번째 본분이 뭡니까? 내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내 생각, 내 뜻이 내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같습니까?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자신의 가치와 소유물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야곱은 젊은 시절 자아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기왕에 하나님이 장자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얕은꾀로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지 않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가로챘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20년 넘게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부모와 이별했습니다. 형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여러 차례 속았습니다. 아내를 얻을 때 속았고, 품삯을 받을 때마다 속았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요셉은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요셉은 11번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형들의 손에 붙잡혀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려니! 노예로 열심히 주인을 섬겨 인정을 받는가 했더니, 주인 여자의 모함으로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를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70 여명의 야곱 가족을 애굽에 이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약 400 년 후에 장정만 6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창15:13-14),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을 통해서는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가인, 라멕, 이스마엘, 에서, 파라오, 느브갓네살, 다리우스, 가이사, 헤롯, 빌라도 등등. 세상에서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가장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자녀를 구원하는 일에는 전혀 쓰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인류 역사 속의 막대기 정도로 쓰셨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이사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세상에서는 초라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 손에 조금이라도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아를 죽이세요.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전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소중하게 사용하실 겁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막대기처럼, 하나님 손에 들려져서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한 알의 밀
이윤재 목사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전 40일간을 말합니다. 올해는 지난 2월 13일부터 3월 31일까지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 절기중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 최고의 진리는 죽고 사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죽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입니다.
이집트 수도원에서 나이많은 수도원 원장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그에게 수의를 입히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뜨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또 웃었습니다. 이를 보고 수도사들이 물었습니다. “아바,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울고 있는데 어찌하여 웃으십니까?”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로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리고 세 번째로 웃은 것은 내가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누리러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요”. 그렇게 말한 후 그가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 수도자처럼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고 웃고 죽음이 준비되지 않는 것을 보고 웃고 하늘 나라의 소망을 보고 웃으며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이나 됩니까? 많지 않습니다.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란 책이 있습니다. 한 죄수가 어느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데 우연히 한 사형수가 사형장을 향해 끌려 가고 있었습니다. 사형수는 밧줄로 꽁꽁 묶이고 양옆에서 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가고 있었는 데 마침 비가 와서 땅이 질퍽 거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사형수가 조심 조심 걸어가다가 질퍽거리는 곳에서는 옆으로 살짝 돌아가고 웅덩이가 있는 곳은 팔짝 뛰어갑니다. 30분 후면 죽을 사람입니다. 그것을 간수도 알고 자신도 압니다. 그런데 그 앞에 놓인 웅덩이를 피해 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 하고 싫어 합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둘째 오히려 죽어야 산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모든 자연은 살아 있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살기 위해서 매일 죽고 있습니다. 가을의 단풍을 보십니까?(사진1) 단풍은 겨울을 앞둔 나무가 자기 잎을 떨어뜨려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단풍은 낙옆을 쓰는 청소부에게는 귀찮은 존재이지만 나무에게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낙옆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 때가 되면 땅에 떨어져 나무밑에 썩어 나무를 살립니다. 낙옆이 떨어져 1년쯤 되면 그 노폐물에서 질소, 인, 칼륨등이 생겨 나무의 뿌리에 스며들고 그것이 줄기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으며 나무를 살립니다. 나무는 죽어서 자기를 살리는 것입니다.
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몸은 살아 남기 위해 끊임없이 죽습니다. 세포는 새로 생겨나기 위해 계속 죽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약 40조의 세포가 있는 데 그 중 하루에 100억개의 세포가 죽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손, 발가락을 보면 발과 손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이 간격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세포들이 스스로 죽어서 생긴 공간이라고 합니다. 만일 세포가 적당한 때 죽지 않는다면 손가락 사의가 벌어지지 않아 결국 벙어리 장갑같은 손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세포는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죽지 않은 세포가 있으니 그 세포가 암세포입니다. 암세포는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세포를 분열시켜 결국 몸 전체를 죽게 만듭니다. 죽지 않고 살기만 한 세포가 바로 암세포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세포는 때가 되면 죽어 결국 자기를 살립니다. 결국 죽어야 삽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에 예수님이 말씀한 생명의 원리를 듣기 원합니까? 오늘 말씀 요12장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적어도 엿새 전에 일어났습니다. 요12:1을 보실까요? “유월절 엿새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그리고 요13:1을 보실까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13장은 유월절 전날 상황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 날을 중심으로 12장은 엿새전, 13장은 그 전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20절 이하는 언제 일어났을까요? 적어도 유월절 전날에서 엿새전 그 사이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20절을 보실까요? 요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 데”.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옛날 자기 선조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한 일종의 해방절인데 우리의 고난주간, 부활절쯤에 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8일간 절기를 지키는 데 그 주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20절에 이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때는 유월절 며칠 앞둔 때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신 것은 헬라사람이었습니다. 헬라는 지금의 그리스입니다. 보통은 유월절에 유대인만 모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모이는지. 예수님 시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살던 시대 어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100만이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뿐 아니라 외국에 산 모든 유대인도 다 모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날 헬라인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두 민족이 헬라인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류를 대표할 때 “유대인과 헬라인” 이라고 말합니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하나님 믿는 백성, 헬라인은 하나님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 헬라인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우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때와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는 며칠 후면 유월절에 죽는다. 하나님이 이를 위해 하나님이 헬라인을 보내셨구나. 그렇다. 나는 유대인만을 위해 십자가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헬라인을 보내셨구나”. 예수님이 이 해석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월절에 헬라인이 온 것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들의 백합화 하나가 피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기적을 행하여 위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3절,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 “영광”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영광”은 글자 그대로 사람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높힘받는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빛이요 불입니다. 빛이 사람들앞에 환하게 비취듯 많은 사람에게 불처럼 빛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입니까? 어떻게 죽는 것이 영광입니까? 영광은 연예인들이 연말에 화려한 무대에서 대상받는 것이 아닙니까? 대통령이 수천만 국민이 보는 앞에서 취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영광이다
왜 죽음이 영광일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을 살퍼보면 좋겠습니다. 성경학자에 의하면 그 당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헬라의 도시 에뎃사 왕국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왕의 아들이 문둥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 데 소문을 들으니 예수님이 문둥병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도 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뎃사 왕은 몇 사람의 관리들을 사신으로 보내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 전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우리 왕의 아들의 병들었으니 고쳐 주십시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해주면 평생 예수님을 왕궁에 모시고 풍부하게 대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이 이 일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은 빌립을 통해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말씀이 23절입니다.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다른 영광을 말씀합니다. 에뎃사 왕이 말하는 영광과는 전혀 다른 영광입니다. 아들을 살려주면 평생 왕궁에서 호의호식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게 하는 영광이 아닌 다른 영광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24절입니다. 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 헬라의 에뎃사왕이 왔느냐 안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사람들이 찾는 다른 영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영광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오는 영광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개 열매를 영광으로 압니다. 가을에 노랗게 익은 황금색 벌판은 우리에게 추수의 영광을 깨닫게 합니다. 가을에 빨갛게 익은 과일, 사과, 감, 포도, 감람, 무화과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농부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열매만 봅니다. 그 열매가 익을 때까지 땅밑에서 눈물과 고통의 대가를 지불한 씨의 고통은 보지 않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먹구름과 천둥이 친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영광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씨를 영광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영광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영광으로 봅니다. 이번에도 우리 청년가운데 중등학교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한 청년이 있습니다. 요즘 얼마나 교사되기 힘듭니까? 사람들은 그가 합격하니까 “축하한다. 고생했다” 말하지만 사실 그의 영광은 지나간 4년간, 아무도 모르는 고통속에 있습니다. 그가 4년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를 죽이자 그에게 합격의 영광이 찾아온 것입니다. 열매가 영광이 아니라 씨가 영광이었습니다. 갑자기 열매가 생긴 것이 아니라 씨가 죽어서 열매가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영광으로 여깁니까? 겉으로 나타난 성공의 열매입니까? 고난속에서 이룬 자기 희생입니까? 제가 이스라엘에서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사람들이 발로 밟습니다. 그러자 순하고 향기로운 포도즙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두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다만 잘 익은 포도알이 되려는 사람과 그 포도알이 으깨져 향기로운 포도즙이 되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습니다. 잘 익은 포도알처럼 성공하려는 사람과 자기를 희생시켜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사 교정에 가도 두 종류의 군인이 있습니다.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장군과 파월 장병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으로 슈류탄을 덮쳐 부하를 살려낸 강재구 소령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에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야망을 위해 전 국민을 전쟁에 몰아 넣고 마지막에 세인트 헬라네섬에서 죽은 나폴레옹과 박사 학위 네 개를 버리고 가난한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들과 함께 산 슈바이처가 있습니다. 세상은 두 종류 정치인, 두 종류 사업가, 두 종류 교회, 두 종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행복은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거룩은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누구나 얻기만을 위해 살아갈 때 세상적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가 됩니다. 얻은 것을 즐길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행복해도 남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이기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기 위해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12:24을 다시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죽음을 농부의 언어로 비유하셨습니다. 저는 농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는 농사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경험은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늦가을에 아버지께서 밭에 보리 종자를 뿌리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씨앗들이 흙 속에 떨어지면 겨울이 되기 전에 파릇파릇 싹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겨울 추위와 함께 보리는 왕성하게 자랍니다. 어느날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잘 자랄까? 하며 보리를 뽑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보리씨가 뿌리째 딸려 올라왔습니다(사진3). 자세히 보니 그 뿌리에는 종자로 뿌려졌던 보리 껍질이 그대로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졌는 데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속은 텅 비고 껍질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속이 텅빈 이유는 씨속에 있는 알맹이가 새싹을 위하여 자신을 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깨뜨려 자기 것을 주고 껍질만 남은 보리,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밀의 생물학적 실체입니다. 다시 24절 보시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자기를 깨뜨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한 사람이 웟치만 니입니다. 그가 쓴 <자아가 죽을 때>(The release of the spirit)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씨로 비유했습니다(사진4). 자, 여기에 씨가 있습니다. 씨는 알맹이와 껍질로 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성경은 속사람이라고 부르고 껍질을 겉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속사람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육체에 의해 막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막고 있는 껍질때문입니다. 이 껍질이 깨져야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어떻게 내가 생명을 소유할까?.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어떻게 생명을 흘러가게 할까?”. 안 믿는 사람은 사실 깨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어 있기 때문에 깨져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있는 데 껍데기 때문에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말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이것을 보여준 사건이 요12:1-8 말씀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베다니에 갔는 데 그곳은 부활한 나사로와 두 자매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들어오더니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3절입니다. 요12:3,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 옥합은 곧 인간존재의 모습입니다. 우리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옥합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향기로운 향유가 가득한 데 껍데기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향유가 온 세상에 퍼집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무엇이 우리 껍데기를 깨뜨리게 할까요? 우리 껍데기는 우리의 육입니다. 육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속에 보이지 않는 지체, 육체적 소욕, 죄의 몸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깨뜨립니까?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합니다. 영이 깨뜨립니다. 롬8: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이 죽입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영이 살립니다. 영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이 일을 합니다. 성령은 늘 말씀과 함께 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입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수술하는 칼처럼 우리 영과 혼을 둘러싼 육의 껍질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단단해서 잘 깨어지지 않습니다. 껍질이 잘 깨지지 않은 이유는 “자기 사랑”때문입니다. 나를 둘러싼 가장 강력한 껍질이 ‘자기 사랑’의 껍질입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200-300번씩 자기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나를 붙들면서 내 안에 있는 생명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자기사랑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 말씀을 보실까요?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목숨’으로 번역되지만 또 ‘자아’, ‘뜻’, ‘의지’,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나, 내 뜻, 내 생각, 내 소원, 자기 사랑, 자기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영성가 잔느 귀용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 죽음을 주제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앞에서 죽을까? 자기 죽음이 해답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죽음을 정의했습니다. “자기 죽음이란 자기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이다. 과거의 나는 하나님앞에서 잊어 버리고 미래의 나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나는 하나님께 드려 버리라. 자기 죽음은 나의 육이 전적으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또 있습니다. 마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15세기의 독일 신비주의자 타울러가 있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안에서 죽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내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지금도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나 자신에게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을 둘러싼 껍질을 날마다 성령과 말씀으로 깨뜨립니까? 그래서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밖으로 흘러가게 합니까? 이것을 바울은 “내가 매일 죽노라”라고 말합니다. 세포가 죽어야 우리 몸이 살고, 낙엽이 떨어져야 나무가 살고,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오고, 생명을 버려야 생명이 보전되고, 예수님이 죽어야 부활하고,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진리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죽어야 산다.
그런데 이 성경적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생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가정생활, 우리의 직장생활, 인간관계, 사역, 선교, 목회, 정치, 경제, 역사, 모든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일제시대때 평안도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을 섬기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전도하고 봉사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선교사가 동네에 들어와 전도합니다. 마침 그가 힘들게 교회를 짓는 것을 하고 내가 무엇을 할까 하다가 자기에게 있는 논 천평을 다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선교사가 자기 논을 다 바친 집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를 교회 사찰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 데 선교사가 보니 참 영리하고 공부도 잘해서 하고 미국 자기 고향으로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하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후에 이 아들이 잘되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 아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 백사겸 집사가 논 1000평을 바칠 때는 그는 아무 것도 먹고 살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는 자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축복하셨습니다.
황해도 어느 교회가 6.25때 폭격을 맞았습니다. 예배당이 폐허가 되자 예배드릴 데가 없게 된 교인들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 데 교회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에 열여덟 살의 처녀가 있었는데, 그가교회 때문에 하루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네가 교회를 지어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제가 무슨 힘으로 교회를 세웁니까?” 했는 데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선데이 서울>이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뒷면에 이런 광고가 새겨 있었습니다. “안구를 삽니다”. 눈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는 광고에 적힌 병원을 찾아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눈을 사 주세요”. 의사는 깜짜 놀라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고 하자 아직 믿지 않은 의사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멀쩡한 처녀가 자기 눈까지 팔려고 할까?” 그래서 가까운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나가보니까 너무 좋아서 계속 나가다가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불렀습니다. “아가씨!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눈을 팔려고 하다니 장합니다. 제가 미력하지만 돕겠습니다” 하고 눈을 사주는 대신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를 자기 집 양녀로 삼아 공부시킨 후 자기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실화입니다. 자기를 희생한 사람에게 다시 사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죽으면 사는 원리는 신앙의 세계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장사와 사업에도 해당됩니다. 일본에 우노 다카시라는 요식업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식당을 차리면 안되는 식당이 없습니다. 자신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도 다 잘됩니다. 아무리 불황이어도 그가 세운 식당은 다 잘됩니다. 그 비밀을 그가 <우노 다카시, 장사의 신>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사진5). 비밀은 이것입니다. “장사해서 이를 남기려고 하지 말고 손님을 기쁘게 하라”. 그가 한 말입니다. “접객이란 무조건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가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득을 볼까가 아니라 어떻게 손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는 강한 가게는 손님들에게 이득을 주는 가게다. 입지가 안좋아도 손해를 봐도 끝까지 되는 가게는 손님을 먼저 생각하는 가게다”. 결국 자기를 죽인 자가 사업에도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 “내가 죽으면 세상을 살린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맨다”.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보존한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잃고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구제는 무엇입니까? 돈을 잃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 가족을 살리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무엇입니까?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자기를 죽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충남 부여에 가면 부여 동남교회가 있습니다. 부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종시에 땅에 사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허허벌판 세종시에 들어올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작은 교회가 땅사고 교회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전교인이 힘겹게 헌금하고 교회 예산을 줄이고 줄여 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여기서 일할 목회자를 찾았습니다. 제가 그 소문을 듣고 감동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도 아니고 지방의 작은 교회가 온 정성을 다해 교회지었다는 말에 감동받았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붓는 것과 같았습니다. 분명 이 교회는 잘 될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유방기 목사를 소개해 결국 결정되었습니다(사진6). 다음 주에 이 교회 창립예배가 있습니다. 아직 교인은 없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부여의 작은 성도들이 눈물과 땀으로 지은 영광스러운 자기 죽음의 건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 알음다운 일에 동참하기 위해 목회자 생활비도 대고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려운 시골 교회 교인들이 푼돈을 모아 지은 영광스러운 교회, 우리는 무엇을 이 교회에 버려야 하겠습니까? 헌금도 필요하고 기물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합니다. 누구 자기를 버려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다음 주에 예배후에 세종시에 갈 때 함께 가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삽니다. 현재를 잃고 미래를 얻는 것이 비전입니다.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사순절에 예수님처럼 자기를 잃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