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12
5월3일[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부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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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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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X2KKtvh_aA
[서울대교구 이상진 아모스(2027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기획사무국 차장)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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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한 것임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말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 9-10)
우리네 인생이란, 그리고 우리들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 가운데, 고통 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임을 깨달음,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임을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음, 고통스런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한 것임을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임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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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3te6NT30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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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이는 “저는 사랑을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닮는 이유는 사랑하면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자매가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저의 말투를 따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기분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인간도 그럴진대 하느님은 그 완전한 자기 교환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보면 아드님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그 닮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닮음이 얼마나 관계에서 중요한지 잘 표현해줍니다. M은 노총각으로서 회사 월급으로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생식능력을 잃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를 찾아옵니다. 의사는 생식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희망을 주기 위해 가능한 것처럼 말해줍니다. 그렇게 M은 혼인하게 됩니다.
혼인 후 아내가 임신하였습니다. 그러자 M은 다시 의심에 빠져듭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를 찾아왔지만 주저하다 검사를 받지 못합니다.
며칠 후 M은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의사에게 와서 말합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의사는 짐을 벗은 느낌입니다. 물론 의사는 M이 검사를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생식능력을 잃은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M은 아기가 아파서 다시 그 의사를 찾아옵니다. M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들과 자기가 닮은 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가운뎃발가락이 긴데 아들의 가운데 발가락도 길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얼굴도 닮은 것 같다고 말해줍니다.
M이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첫 번째로 자신에게 생식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했고, 두 번째로 아들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곧 생식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자신을 닮았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영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과 닮은 것을 하나라도 발견하려고 우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부자 아빠는 기요사키가 따른 친구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가난한 아버지를 닮지 않고 친구의 부자 아빠를 닮았음을 이 책에서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기뻐할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바로 로버트 기요사키가 닮고자 했던 부자 친구의 아빠일 것입니다. 그리고 로버트 기요사키는 “나를 본 것이 곧 부자 아빠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나를 본 것이 곧 누구를 본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 나는 내가 닮으려는 사람, 곧 내가 영광을 주려고 하는 이를 위해 사는 것이 드러납니다.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자녀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당당히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녀를 나를 향하여 나아오게 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표지판이 자신을 향하여 차가 달려오게 만든다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웃는 미소는 아버지를 닮았고 우리의 성격은 어머니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닮은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그분 뜻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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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도는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설프고, 이해도 부족하고, 때론 두려워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복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주 ‘복음을 전합시다’, ‘복음적으로 삽시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복음(εὐαγγέλιον, good news)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고, 원수가 형제가 되며, 상처가 치유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나라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 안에서 시작된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그 복음을 믿고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며칠 전 선배 신부님께 들은 한 어르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동네에 사납고, 잘 다투기로 유명한 어르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신부님에게서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성당을 찾아와서 강론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강론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인품에 반하였고,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 ‘안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 며칠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궁금해서 어르신에게 물었습니다. ‘안수를 받으시면 어째 며칠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어르신은 ‘제가 살면서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제게 잘못한 사람은 기꺼이 용서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웠습니다. 강론 중에 용서를 이야기하면서도 신부님은 정작 용서하는 데 인색했습니다. 어느 날 어르신은 미사가 끝났는데 ‘안수’를 청하지 않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신부님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오늘은 어째 그냥 가시나요?’ 어르신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했던 사람은 모두 찾아가서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그동안 밀린 교무금을 내려고 왔습니다.’ 어르신의 환한 웃음을 기억하며 사제관으로 왔는데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 응급실인데, 어르신의 목에 스카플라가 있는데, 그 뒤에 신부님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신부님에게 연락하라.’라는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병원에 가서 어르신을 위해 병자성사를 드렸고, 어르신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신부님은 한편으로 놀랐고, 한편으로 부러웠다고 합니다. 사제로 살면서 늘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신부님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이 어르신은 사도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듣고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진짜 사도처럼 살아가신 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복음은 멀리 있는 거로 생각합니다. 사도의 삶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은 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일상에, 내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어르신처럼, 복음을 믿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끝까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 바로 사도적인 삶 아닐까요?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묻습니다. 나는 복음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나는 내 삶에서 복음의 기쁨을 살아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아닌가?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평화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복음은 삶을 바꾸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사도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모두 복음을 믿고, 복음을 살아내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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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강론)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의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니 부드러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니 유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부드럽지만 시간을 주면 바위를 뚫으니 강인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에 활력을 주니 생명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의 특성을 들어서 노자는 물을 가장 좋은 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은 잘못을 씻어주니 정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물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회개와 정화의 상징이었던 물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지난날의 죄를 사함 받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물은 은총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였던 루르드는 ‘치유의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사람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치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에 온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물에 침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의 예식만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손과 눈에 물을 바른 후에 물을 마시는 예식입니다. 저는 루르드의 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치유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르드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환자들을 샘물로 모셔 왔습니다. 물의 예식을 하는 곳에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음악 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많은 젊은이가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봉사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그렇습니다. 연못의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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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욥 19,25-26). 이는 까닭 모를 엄청난 재앙과 처참한 질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의 구구한 억측에 시달리면서 욥이 토해 낸 말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희망과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렇듯 간장이 녹아내리도록 하느님 뵙기를 간절히 갈망해 왔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필립보 사도의 청원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야, ……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14,9). 예수님이 아니시면 그 누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표상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저 두려우신 분이 아니라 사랑이 지극하신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증거하는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이로써 알게 되는 엄청난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시고, 또한 가여운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실 만큼 우리 하나하나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허무로 끝나는 덧없는 인생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사랑하신 ‘참으로 소중한 당신’, 사랑의 동반자들입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를 여러분은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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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6-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하고 청한 사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코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 하신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아드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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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복직관>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6-14)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예수님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하느님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믿음보다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필립보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흔들리는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강력한 무엇인가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구약성경 탈출기를 보면,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는 바람에 몹시 힘들어 하던 모세가 하느님을 직접 뵙기를 간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 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탈출 33,18-23)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되면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또 그 확신을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긴 했는데, 당신의 ‘얼굴’은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비천함 사이의 큰 간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박해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하고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직접 만나 주셨는데, 그때에도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 예언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열왕 19,12)>
3) 묵시록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도 뵙지 못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하느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뵙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랑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 ‘완전한 일치’를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행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행복을 ‘지복직관’이라고 부릅니다. 지복직관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과 신자들은 그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부활 전에는 아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그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4)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일’, 즉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체험을 하고, 그 행복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서 더욱 깊은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동시에 자신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신앙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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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요한 14,6-14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
있으니
길이
부르네
길이
부르니
길을
나서네
길을
나서니
길이
앞서네
길이
앞서니
길을
따르네
길을
따르니
길과
하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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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 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 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형성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어둔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며 불만을 토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2-13)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출처 -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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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아보기>
언젠가 이태리를 다녀온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이태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아교육방법(유치원)에 대한 체험을 그 친구가 이야기 해주었다. 그곳 아이들은 그냥 어떤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음악을 듣고나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맛을 보고 그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등 어린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무수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자세가 충격적이더란 이야기였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늘 우리의 경험안에 고정된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그 안에 숨어있는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나를 보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본 것이다>고 하신다.
우리는 자꾸만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감동적인지 별로인지, 거기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작 그분이 보여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못보게 되고 정작 그분이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 하느님을 몰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고 사제가 미사를 잘 드리는지, 제대에 꽃이 잘 어울리는지, 독서하는 사람은 잘 하는지, 해설자는 또박또박 잘 하는지, 사제는 강론을 잘 하는지, 마이크 상태는 좋은지... 이런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립보처럼 하느님께서 <짠!> 하고 당신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형제 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바라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색깔이 이쁘니, 모양이 이쁘니, 향기가 좋으니만 생각한다면 나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을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 꽃을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라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열려있는 시각, 즉 어린이들의 상상치도 못한 사고와 생각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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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냉담자”라고 말하는 우리의 마음이 오히려 냉담하지는 않나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복음 14장 6-14절)
<길이 불을 끄고 잠들지 않는 것은>
가끔, 지금은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쉬는 교우’ 혹은 ‘냉담자’라고 부르지요. 일상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서 아니면 그냥 조금 귀찮아져서. 다양한 이유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신자분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박남준 시인의 「길」을 읊조립니다.
“길이 빛난다. 밤마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불을 끄고 잠들지 않는 것은 길을 따라 떠나간 것들이 그 길을 따라 꼭 한번은 돌아오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 결심한 분들이 걸으셨을 그 길을 생각해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떠나가는 그들의 길도 살피시며 함께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방황하던 작은 아들을 자비로운 아버지가 인내로 기다리셨듯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냉담해진 마음에 사랑으로 함께하시며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그 길에 불을 밝혀주어야겠습니다. 신앙의 길을 따라 돌아올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로 환히 길을 밝히는 것이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는 우리의 책임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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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덕현 야고보 신부님]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하고 청한 사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코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 하신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이심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아드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출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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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
아주 예전 신학교 부제시절, 지금은 타계하신 파리외방전교회 문세화 교수 신부님과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충실한 강의록에 최선을 다해 열강했던 잊지 못할 교수 신부님이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모름지기 신자라면 예수님처럼 이런 자의식을 지니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길이자 진리요 생명으로 살아가야지요!”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를 위시한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이런 자의식을 지니고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 사람이 되기위해 평생 영순위를 두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배워야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최고봉이요 요약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 하나뿐입니다. 엊그제 나눈 <검정고무신>이란 오래전 자작시를 다시 나눕니다. 예나 이제나 이때쯤이면 대한민국 산야 어디에나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야생화 애기똥풀꽃들입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가 날로 주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위로와 격려가 되고 희망을 주는 따뜻하고 다정한 시입니다. 바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과는 물론 아버지와의 일치도 깊어지면서 실현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입니다. 이래야 참사람에 참행복의 실현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의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고 굳게 지킨다면 우리는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사도에게 나타나셨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을뿐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둘째,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필립보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필립보가 우리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친근하고 다정한 말씀은 그대로 세례받은후 오랫동안 주님을 믿어온 신자들을 물론,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43년동안 살아온 수도사제인 저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필립보’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읽어보세요. 참으로 다음 주님 말씀이 믿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계속 강조되는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서로 신뢰와 앎을 깊이해 감으로 주님처럼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 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이자 아버지를 닮아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형제자매들 얼굴에 반사되는 예수님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지금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과 일치의 우정을,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며 가사를 일부 바꾸어 산책 때마다 즐겨부르는 제 영원한 애창곡,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3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청춘,
검은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셋째, 예수님 이름으로 이런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을 잘 살게 해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유일한 청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당신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겠다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참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청할 것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충실하게 해달라는 청 하나뿐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주시며, 길이신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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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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