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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제3편 광복군의 후기활동 제1장
각 부대의 활동
4. 대적 각종 작전
(1) 일반 첩보 작전
적 점령 지구내의 교포에 대한 초모·선전·반정(反正) 등 공작과 병행하여 추진한 첩보 작전은 광복군 공작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인원이 적었던 1942년에서 1943년말까지는 주로 점(點) 조직에 의한 활동이 수행되었으며, 1944년초에서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주로 피라밋 형의 조직 활동을 원칙으로 하여 제반 공작이 주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체계(體系)는 김학규(金學奎) 지대장과 부지대장 이복원(李復源)·기밀 비서(機密秘書) 오광심(吳光心)·비서 실장 장조민(張朝民) 등 주요 간부 이외에는 일체 알려지지 않은 채 극비(極泌)에 속해 있었으며, 전방에 밀파되는 공작원들은 공작에 관한 일반적 공통 사항만을 서로가 알고 있을 뿐, 개개인에게 부여된 특명 내용은 서로 알 리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음에 말하는 특별 사항은 해방된 후 비밀의 베일이 베껴진 다음에 비로소 간추린 것들이다.
첩보 작전도 처음에는 점(點) 조직으로부터 시작하다가 점차 공작 거점과 지하 조직망을 통하여 전개되었는데 전 중국의 공작 지역을 3대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地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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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몇 개의 지구(地區)로 분할하며, 지구는 또 몇 개의 거점(據點)과 지하 조직망으로 구성되었다.
첩보 공작의 임무로는, 첫째, 적군의 군사 정보 및 군사 시설 등에 관한 자료를 정확히 수집 분석하여 이를 광복군 및 연합군측에 제보(제보)하며,
둘째, 필요시에는 연합군과 합동 또는 협조를 얻어 대적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며,
세째, 적 점령지역에 있는 첩보 조직망을 통한 교란 작전을 전개하여 민심 교란은 물론 적에 대한 신경전·심리전을 감행하며,
네째, 첩보 제공으로 인한 연합군 공군의 공습 유도(誘導) 및 공습 후의 전과를 확인 하는 것. 등 실제 무력 전투에 못지않는 첩보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각 지역의 대표적인 지하 조직망은 아래와 같았다.
① 화북지역(華北地域)
북평(北平) 지구·천진(天津) 지구·대동(大同) 지구·석가장(石家莊) 지구·태원(太原) 지구·장가구(張家口) 지구
② 화중지역(華中地域)
서주(徐州) 지구·청도(靑島) 지구·제남(濟南) 지구·개봉(開封) 지구·귀덕(歸德) 지구·방부(蚌埠) 지구·숙현(縣) 지구·회양(淮陽) 지구·녹읍(鹿邑) 지구
③ 화남지역(華南地域)
상해(上海) 지구·남경(南京) 지주·안경(安慶) 지구·오리점(五里店) 지구·무한 삼진(武漢三鎭) 지구
상기 각 지구 조직망을 기반으로 전방 공작원을 통하여 상부로부터 하달되는 첩보 수집 계획(EE1)에 따라 각 지구에서는 첩보 공작을 실시하고, 그 결과는 다시 전방 공작원을 통하여 상부 또는 연합군에 보고되는 초보적인 연락 방식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초모 공작은 상당한 효과를 보였으나, 첩보 작전은 상부로부터 요구하는 시일에 요구하는 사항을 제대로 제공하기에 상당한 애로가 수반되었다. 그러나, 초모·선전·첩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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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에서 종전(終戰)까지 조직적이며 활발하게 성과를 올린 몇 지구의 공작 거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북평 지구
지득성(智得成) 중심의 거점과 더불어 정민태(鄭民泰) 경영의 김광언(金光彦) 거점인 덕경루반점(德慶樓飯店), 동아병원(東亞病院)·백학천(白鶴天) 자택·정기엽(鄭基燁)의 하숙집, 김지옥(金址玉) 자택 등 20여 개소의 거점
② 천진 지구
정관오(鄭觀五) 경영의 조일여관(朝日旅舘), 김은석 경영의 김광 사진관(金光寫眞舘) 등 10여 개소 거점
③ 서주 지구
김형주(金瀅柱) 경영의 요식점(料食店) 미나도(美那都)를 비롯하여 대흥여관(大興旅館)·대풍공사(大豊公司) 등 20여 개소 거점
④ 제남 지구
대륙공사(大陸公司)·평안여관(平安旅舘) 등 10여 개소의 거점
⑤ 귀덕 지구
후화양행(厚和洋行)·최규련 경영의 북지 공사(北支公司) 평양여관(平壤旅館) 귀덕 성외(城外) 신흥균(申興均) 가옥 등 10여 개소의 거점
⑥ 개봉 지구
장호강(張虎崗) 및 문상명(文相明)이 거주하는 시영장(詩榮莊), 박태례(朴泰禮) 경영의 명성(明星)카페, 민치대(閔致大) 경영의 황하여관(黃河旅舘), 대흥 여관 등 10여 개소의 거점
이러한 거점을 발판으로 한 첩보 활동은, 왜군내와 왕정위군내에는 물론 각 사회 단체와도 수집원(蒐集源)의 연결망을 거미줄처럼 가지고 있어서 획득한 첩보는 지체 없이 부근 유격대를 통하거나 후방의 연합군측에 제보(提報)되었으며, 때로는 유격대의 기습작전 및 연합군 공군에 의하여 군사 시설·철도·항만·선박·극장 등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철도의 파괴 피해는 평한선(平漢線)·진포선(津浦線)이 가장 심했으며,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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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피해는 서주(徐州)·정주(鄭州)·개봉(開對)·무한 삼진(武漢三鎭) 등 지구를 꼽을 수 있다.
(2) 무전기 첩보 작전
일반 첩보 작전의 방식으로는 시간의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첩보 작전에 결정적인 효과를 얻기 곤란한 실정을 감안한 제3 지대는, 1945년초부터 한·미 군사 합작을 위한 적극적인 접촉을 계속하는 한편, 전방에 있어서의 첩보 작전은 공작원이 내왕하는 통신 전달 방법을 지양하고 무전기(無電機)에 의하여 직접 전방에서 후방으로 송신하는 방식이 가장 적절한 작전 방법임을 판단하는 동시에, 김학규 지대장은 제10 전구 사령 장관부 및 미 공군 파견대에 무전기 첩보 작전 계획을 설명하여 이에 양해를 얻고 미군용 SCR 무전기 및 무전 통신병을 지원받아 다음과 같은 수개처에 무전기를 설치하여 신속하며 유기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① 북평 지구
1945년 5월초 김광언 책임 하에 이미 입황(立煌)에서 무전기 조작법을 터득한 이아청(李雅靑) 및 중국군 무전병 2병을 대동, 부양(埠陽)에서 귀덕(歸德)부근의 적 점령 지역까지는 10여 명의 중국군 호위를 받으며 무전기를 운반하고 귀덕에서 북평까지는 분해(分解) 위장(僞裝)하여 기차편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북평에 반입한 무전기는 정기엽(鄭基燁)공작원의 집 비밀 장소에 설치한 후, 입수된 적정(敵情)을 입황(立煌) 제 10전구 경유 곤명(昆明)의 OSS 본부에 타전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시 미 항공 부대로 전달되는 통신 체계를 확립하여 첩보 작전의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② 오리점(五里店) 지구
본부에서 기간 간부로 군사 훈련을 담당하던 차약도(車若島)는 같은 시기에 김은석(金銀錫)·백운용(白雲龍)을 대동 입황에서 제10 전구 사령 장관 이품선(李品仙)의 소개장을 받아, 유격대 사령부 소재지인 호북성(湖北省) 변경 대별산맥(大別山脈) 부근 오리점(五里店)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유격대 장비인 무전기를 차용하여 통신 중계소(中繼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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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고 부양·입황·곤명 등지를 연결하는 통신망 구축에 성공하였다.
특히 김은석·백운용 등은 다시 무한삼진(武漢三鎭)으로 진출하여 위수사령(衛戍司令) 장계황(張啓璜)의 지원 아래 한구(漢口)를 공작 거점으로 초모 및 첩보 활동을 전개하면서 수집된 적정을 오리점 무전 중계소를 통하여 연합군측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공작을 전개하였다.
③ 상해 지구
나성돈(羅盛頓) 등은 같은 시기에 중국군 무전병 2명을 대동하고 상해로 잠입하여 비밀 통신망을 설치하였다. 특히 상해 지구는, 1945년 3월 13일 초모 및 첩보 공작을 위하여 활약하던 한성수(韓聖洙)를 비롯하여 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 등 7명이 왜군 특무대에 체포된 후라, 적의 엄중한 감시와 경계를 피해가면서 감행하는 무전 통신 작전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과감한 행동으로 기민하게 활동하면서 수집된 적정은 지체 없이 입황 및 곤명으로 타전(打電)하여 미 공군의 공습 목표 설정과 공습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공습 후 전과 확인 제보 등에도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북평·오리점·상해 등지에서의 무전에 의한 첩보 작전은 현지와 지대 본부 간에 긴밀하고 신속한 연락이 이루어졌음은 물론 중국군의 유격 작전, 그러고 미 공군의 전술·전략 작전 수행에도 많은 공적을 세웠다.6)
(3) 북평 대륙 극장 폭파
북평에서 공작 활동 중인 김광언(金光彦)·김철수(金鐵壽) 및 김동훈(金東薰) 등은, 3월 10일 소위 왜적 육군 기념일 행사의 하나로 북평 대륙 극장에서 왜군들에 대한 위문 공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기중(冀中) 지구에서 활약하는 중국군 제5영(營) 편의대(便衣隊) 유종양(劉宗揚) 상교(上校)[대령]와 협의, 적군의 집단 도살(屠殺)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왕정위 괴뢰군의 육군 소위를 가장한 김철수는 거사 전일 식장을 준비하는 대륙 극장에 들어가 사전 점검에 성공하였으며, 거사 당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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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3 지대 활동사 편찬 위원회 제공 및 김광언(金光彦), 김은석(金銀錫)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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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 대원 수명은 김동훈과 함께 극장 종업원 및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하고 공연 개시전에 극장으로 들어가 무대 및 좌석 밑 수개 처에 시한(時限) 폭탄을 장치하였다.
이 날 오전, 공연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난 11시경, 드디어 굉장한 폭음과 함께 많은 인원이 살상되었으며, 극장 밖에 정차 중인 트럭 수대에 사망자와 부상자를 운반하여 가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 사건 발생으로 인하여 북평 지구는 초비상령이 내려 광복군과 편의대의 지하 활동이 일시 중단되었을 뿐 아니라, 김철수·김지옥 등 대원은 위기를 피하여 북평을 빠져나와 천진으로 피신하였으며, 김동훈은 부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후 중국 편의대원 수명은 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5. 대원들의 수난과 순국
전방 공작을 담당한 수많은 공작원들이 왕정위 괴뢰군 지역을 통과, 다시 적 점령 지구에 침입하여 공작 활동을 하는 중 불행하게도 왜적에게 체포되어 유치장(留置場) 또는 형무소(刑務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8·15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된 동지들 및 왜구(倭寇) 군법 재판에 의하여 사형을 당한 순국 선열들의 편모를 간추린다.
① 활동 초기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의 밀령을 받고 하남성 회양(淮陽)에서 활약하던 박해근(朴海根)은 1944년 중반기에 왜군 헌병에 체포되어 제남(濟南) 왜 군법 회의에서 10년 형의 언도를 받고 북평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8·15 해방 후에 출감되었다.
② 1944년 초부터 개봉·귀덕·천진 등지의 적 후방 공작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만주(滿洲) 지역까지 진출한 바 있는 조동린(趙東麟)은, 1945년 1월 중순 귀덕에서 공작 수행 중 한인 밀정의 밀고로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과감한 그는 귀덕에서 또는 개봉(開封)·북평으로 이송 도중 세 번이나 탈출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북평 형무소에 수감 중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런데, 조동린은 귀덕·개봉·북평 등지의 유치장에 수감 중에도 같이 구류되어 있는 한국 청년들에게 왜적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정세를 알리고, 광복군으로의 입대를 권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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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성(崔光星)·이헌일(李憲一) 등 10여 명을 입대하게 하였다.
③ 제남에서 활약하던 공작원 석만금(石萬金)과 이장식(李章植)은 태안현(泰安縣) 태산(泰山)에 있는 왜군 신병(新兵) 훈련소내의 한적 사병에 대한 탈출 공작을 수행하다가 1945년 2월초 왜적에게 검거되었으며, 이 무렵 전부터 조동린과 접선되어 산동성 조장(棗莊)에서 지하 공작을 펴 오던 이창석(李昌碩)도 체포되어 3년 9개월의 언도를 받고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모두 석방되었다.
④ 1945년 5월, 이팔집(李八集)[제3지대 귀덕선(歸德線) 연락소]연락원 박윤기(朴允基)는 명에 의하여 귀덕에 잠입, 임무 수행 중 한인 밀정의 밀고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 가중(加重) 처벌로 5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⑤ 1945년 6월에 전부터 방부 지구 공작 관리 책임 임무를 띠고 활약하던 김윤택(金潤澤)은 역시 왜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으로 출옥하였다.
⑥ 1945년 5월 서주 지구에서 지하 공작을 수행하던 황이거(黃利擧)가 왜적에게 체포되었으며, 이 무렵 이순복(李順福)·임일옥(林一玉)은 요식점(料食店)의 여급의 몸으로 윤창호·김병학과 접선, 광복군 지하 공작원이 되어 학도병들을 접선하게 하여 부양으로 후송하고, 또는 현지의 애국 청년들을 직접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하게 하다가 왜경에게 발각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 후에 모두 출옥 되었다.
⑦ 동년 6월, 서주 지구에서 공작 중이던 김승조(金承祚)는 초모 인원을 부양으로 후송 집결하게 한 후, 계속 모금(募金) 공작을 전개하던 중, 민족 반역도 오(吳)모로 부터 1천 5백만 원의 수표를 받은 후, 그의 계획적인 밀고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투옥 되었다. 그리고, 같은 감방에 있다가 출감하는 한교(韓僑)에게 전언을 부탁 했으나 그대로 왜 경찰에게 고발되어, 김승조와 접선 활약하던 이두천(李斗千) 외 2명도 모두 체포 투옥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출감되었다.
이렇듯 공작원들로서 적 점령 지구에서 결사적인 활동을 추진하다가 불행히 왜적에게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가 다행히 해방으로 인하여 자유의 몸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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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 왜적에게 사형을 당하여 영웅스럽게 순국한 선열도 있고, 또 왜적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혹시라도 동지들에게 화를 끼칠가 염려하여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철혈 남아도 있었다.7)
1944년 11월 신의주(新義州) 태생이며 한광반(韓光班) 출신인 한성수(韓聖洙)[이상일(李想一)]는 그 해 봄에, 학도병으로 왜군 병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한 열혈 청년으로서 제3 지대의 발전을 위하여 자진 부양에 잔류한 기간 간부의 한 사람이었다.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의 특명으로 적 점령 지구내의 초모 및 첩보 공작 임무를 띠고 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 그리고 방부에서 합류된 김진동(金鎭東) 등을 인솔하고 왜군의 최고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상해로 침투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이들 공작대는 세심하고 대담한 공작 방법으로 한교(韓僑) 청년들과 접촉을 전개하면서 거점 확보 및 초모 공작을 중점으로 하여 동지 포섭에 노력한 결과, 이미 지하에서 협조하던 박윤석(朴允錫)을 규합하고 탈출 학도병 허암(許岩) 등 10여 명의 애국 청년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새로 포섭한 동지들을 부양으로 보내려던 1945년 3월 13일 새벽에 민족 반역자 손(孫) 모의 밀고로 왜군 특무 기관원 10여 명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총격전 끝에 한성수(韓聖洙)·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박윤석(朴允錫)·허암(許岩) 등 7명은 체포되고, 김진동(金鎭東) 등 수명은 포위망을 탈출하여 화(禍)를 면하였다.
왜적에게 체포된 한성수 등 7명은 월여에 걸쳐 가진 악독한 고문을 겪은 다음 상해 주둔 왜 군병 회의에 기소되었다. 몸에 중상을 입고 등에 업혀 군사 법정에 나간 한성수와 그 일행은 방청객 한 사람도 없는 재판정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맨 처음 검찰관은 본적·현주소·성명 등을 묻는 인정 심문으로 재판을 시작하려 했으나 한성수의 강경한 일어 사용 거부로 인하여 부득히 일어 통역을 불러 와서야 재판은 속개되었는데,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를 쓰지 않는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하지만 나의 국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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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광복군 동지회 중앙 위원 조동린(趙東麟)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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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소리 높이 답변했다. 그리고, 재판장의 ‘대동아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는 물음에도 한성수는 태연 자약하게, ‘대답하마.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합동 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면(印緬) 전선과 중국 전선에서 참패하고 멀지 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 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분노의 언성으로 일갈(一喝)했다.
재판장은 다시 한성수의 마음을 떠보려고, ‘어때? 피고를 관대히 봐줄테니 다시마음을 고쳐 먹을 수 없겠는가?’고 묻자 한성수는 엄숙하게,‘너희들이 너희 나라에 충성하려고 애쓰는 만큼 나도 나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다’고 대답하니, 확고 부동한 한성수의 신념을 알아차린 재판장은 일단 휴정한 후에, 다음과 같이 선고하였다.
한성수(韓聖洙) 사형
홍순명(洪淳明) 징역 5년
김영진(金永鎭) 징역 3년
그리고, 다른 대원들도 각각 단기형의 판결을 받았다. 특히 한성수는 왜군의 전장(戰場)을 이탈한 탈출 학도병이요, 광복군 공작 책임자라는 직책을 중대시하고, 또 속출하는 한적 사병의 탈출을 미연 방지한다는 점에서 극형인 사형 언도가 내려진 것이었다.
1945년 5월 13일 상해에서 체포된 지 꼭 두 달만인 이날 한성수는 해방을 석 달 앞두고 꽃다운 25세를 일기로 남경 형무소에서 잔인 무도한 왜놈들의 칼날에 참수형(斬首刑)을 당하고 구국의 영령으로 화하였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은 여러곳 형무소를 거쳐 해방과 동시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서 풀려나왔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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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광복군 동지 회보 제21호 김영진(金永鎭) 쓴 ‘고 한성수 동지 순국 추념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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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수 등이 체포된 직후, 상해 지구 공작 거점을 재건하기 위하여 김국주(金國柱)는 김진동(金鎭東) 등 동지를 대동하고 상해로 들어가서 거부(巨富) 손창식(孫昌植)을 만나 공작 자금을 갹출하려고 접촉을 꾀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거점만을 구축하고 김국주는 하류로 복귀하였다.
1944년말 공작원 이정수(李廷秀)·이윤하(李允夏) 등과 함께 북평 지구로 진출한 약관(若冠) 김순근(金順根) 은 특명을 띠고 친일 분자에 대한 회유(懷柔) 공작[반정(反正)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 왜군 장교 및 사병 2명을 도살하였다. 그리고, 피신하여 있는 중 민족 반역도(叛逆徒) 백(白)모 여인의 밀고로 왜경에게 기습 포위 당하자 백주(白晝)에 왜경들과 총격을 벌이다가 탄약(彈藥)이 다하고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체포되었다.
김순근은 투옥된 후 매일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 심신(心身) 공히 극도로 쇠약해지게 되자, 혹시 광복군에 관한 기밀이 부지 불식간에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고 혼자만의 죽음으로 다른 동지들에 누(累)를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옥중 자결(自 決)하였는데, 이 때 김순근은 스물 한 살의 화랑이었다.
이 외에도 일본군에서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은 애국 청년, 또는 중국 유격대에 오인(誤認)되어 애매하게 죽음을 당한 무명의 젊은 애국자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