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공동 사제관을 나서면 예전에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 자주 들렸던 정든 공소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과거 한 본당에 있을 때, 이 공소 한 교우 집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구정을 며칠 지난 어느 날 원주 기독교 병원 중환자실에서 그 공소의 한 교우가 병자성사를 청 하는 연락을 본당에 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설 쇠러 온 아들이 고향에 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눈길을 건다가 그만 미끄러졌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가 길가에 풀을 빈 언덕 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단단한 쑥대에 한쪽 눈을 찔리 고 만 것입니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대수롭 지 않게 여겼던 상처가 더 나빠져서 중환자실로 옮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찔린 눈으로 파상풍군이 들어가 실명이 되더니 빠르게 뇌까지 번졌던 것입니다.
종래에는 생명이 위독해지며 갑자기 죽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떠나며 그의 가족이 급히 본당 에 연락해서 이 소식을 전하며 병자성사를 청했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공소 마을로 가는 거리보다 본당에서 가는 것이 더 가깝다는 계산에 여유 있게 먹던 점심을 마저 하고 그곳으로 출발했습니다. 부지런히 운전을 해서 공소를 지나 산 밑 그 교우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몇몇 교우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저를 알아 채고는 '신부님, 좀 빨리 오시지 그랬어요? 애 아빠가 신부님 엄청 기다리다가 그만 하늘나리에 갔어요.'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엄청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더라구요. 좀 더 가다가 그 집 아래 공터에 차 를 세우고 올라갔더니 가족과 몇몇 교우들이 침통한 분 위기에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애 엄마가 저를 보더니 신부님 그이가 그만 죽었네요. 라며 슬피 우는 것입니다.
시신이 모셔진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뒤따라 온 부인이 천으로 덮여진 시신 앞에서 '여보, 당신이 기 다리던 본당 신부님 오셨어.'라며 더 높은 소리로 목 놓아 또다시 우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저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부인이 "아이고 애 아빠가 살이 있어요."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얼굴에 가렸던 천을 벗기니 애 아빠가 눈을 뜨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 간 저를 그가 쳐다보더니 손을 꼭 를 잡는 것입니다. 말은 못 하지만 듣는 것 같아 서둘러 병자성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다시 눈을 감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바로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본당 신부가 꾸물대며 늦었던 약 7분에서 10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본당으로 되돌아오며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문득 제자들이 안식일에 주님과 함께 밀밭을 지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사이들이 안식 일 법을 운운하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 께서 다윗과 동료들이 허기졌을 때 놉에서 사제 아히멜 렉이 내어준 봉헌된 빵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 를 상기시키며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마태 12,1-5: 1사무 21.4-7)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십 니다.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시편 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