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영화란 개념을 만들다시피 했으면서도 컬트 마니아를 거느렸던 미국 영화감독 로저 코먼이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성명을 전달했는데 고인이 지난 9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의 자택에서 눈을 감은 사실을 밝혔다고 영국 BBC가 12일 보도했다.
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명배우들을 조련시킨 이가 고인이었다. 제임스 캐머런,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감독으로서 재간을 다듬은 것도 고인의 그늘 아래에서였다. 영화를 후딱 찍는 것으로 유명했다. 같은 장소에서 두 편을 동시에 찍었을 정도다. 물론 모두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1926년 4월 5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엔지니어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영화 만드는 매력에 푹 빠졌다. GM 자동차에 취업했다가 그만 두고 20세기 폭스에 문서 전달하는 사환으로 입사했다. 영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잠깐 공부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가 처음 스튜디오에 판매한 극본이 '바다의 집'(The House in the Sea, 1953)인데 이듬해 자신이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려 'Highway Dragnet'으로 개봉했다. 하지만 자신이 쓴 극본 줄거리가 바뀐 것에 격분해 현금을 긁어모아 제작자로 나섰다. 첫 감독 작품은 '늪의 여인들'(Swamp Women,1955)으로 그 뒤 15년 동안 무려 56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당시 영화계에선 공중전화로 통화해서도 코먼 감독과 영화 계약을 맺을 수 있고 그냥 전화박스 안에서 촬영해 동전으로 출연료를 지급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공포의 리틀숍'(The Little Shop of Horrors, 1960)는 잭 니콜슨이 카메오로 잠깐 나오는데 이전 작품 '피바가지'(Bucket of Blood)를 촬영할 때 썼던 세트를 그대로 이용해 이틀 만에 촬영했다. 이 작품은 1982년 뮤지컬로 연극 무대에 올려졌고, 4년 뒤 속편 영화로 제작됐다.
코먼은 그 뒤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들을 영화 시리즈로 만드는 데 눈을 돌렸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빈센트 프라이스를 주연으로 기용했다. '어셔가의 몰락'이 1960년 개봉됐고, 그 뒤 '갈까마귀'(The Raven, 1963), '붉은 죽음의 가면'(The Masque of the Red Death), '리게아의 무덤'(The Tomb of Ligeia, 이상 1964) 등으로 이어졌다.
'침입자'(The Intruder, 1962)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과 긴장을 다뤄 젊은 윌리엄 샤트너가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 코먼은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손해를 보는 경험을 했다. 해서 그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오락 거리를 제공하는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
그는 1960년대 바이커 영화 ' The Wild Angels'에 피터 폰다와 낸시 시나트라를 기용해 만들어 카운터 컬처의 일부가 됐다. 그는 잭 니콜슨이 직접 극본을 쓰고 주연한 'The Trip'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 주연의 영화 '이지 라이더'의 전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1960년대 말 그는 제작사 뉴 월드 픽처스를 차렸다. 저예산 영화를 계속 만들면서 두각을 드러내던 해외 감독들의 작품에 손을 댔다. 프랑수아 트뤼포, 잉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작품을 미국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 뉴 월드 픽처스를 매각했다가 두 제작사, 뉴 호라이즌스와 밀레니엄 픽처스를 창업했다. 그리고 1990년대 감독 일로 다시 돌아와 '고삐 풀린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Unbound)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브라이언 앨디스의 소설이 원작인데, 존 허트와 브리짓 폰다가 주연했고 호주 밴드 INXS의 리드 보컬리스트 마이클 헛첸스가 잠깐 얼굴을 내비쳤다.
이런 공로와 함께 80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영화 일을 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0년 사이파이(Syfy) TV 채널과 손 잡고 'Dinoshark and Sharktopus'를 제작했다.
그가 뚝딱뚝딱 만들어낸 영화 물량은 거의 전례가 없다. 작품의 수준이 왔다갔다 한다는 비판도 숱하게 들었다, 오죽하면 그가 1950년대 만든 작품들은 국내 감독들이 반공 영화를 만드는 데 써먹었다는 뒷말도 많았다. 1990년에 출간된 회고록 제목이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였다. 60년 가까이 영화 제작 일을 하면서 400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56편을 직접 연출했다. 그러면서도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한 영화는 10편에 불과했다.
배우와 감독 일에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고 키워내는 능력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것들이 컬트 클래식으로 인정받는다. 그처럼 빠듯한 예산을 갖고 인기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도 많지 않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의 답은 이랬다고 유족이 성명을 통해 전달했다. "난 영화 제작자였어. 그거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