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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세계 역사속의 해군 제독들
그리스 - 테미스토클레스 ( Themistocles ) BC 528 ? ~ BC 462 ?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군인, 살라미스 해전에 승리하여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지켜낸 테미스토클레스
페르시아 전쟁은 BC 492년~BC 448년에 페르시아가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를 침공한 사건으로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가 결정적인 승리를 하여 페르시아를 격퇴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 협곡(영화 300의 배경)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을
전멸시켜 사실상 그리스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480년 9월경 아테나에 입성하였는데
아테나는 이미 소개되어 비어 있었다. 이것은 아테나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으로 수도를 방어하기보다는 비워두고
시민과 병력을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거짓 정보를 보내어 페르시아 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기원전 480년 9월 23일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대파하였다.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을 계기로 그리스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퇴하였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그리스는 문명의 황금기를 열었다. 여러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가 고대 그리스를 발전케하였으며,
그 자체로 '서구 문명'을 확대하여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해전을 인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투로 꼽았다.
오늘날 살라미스섬, 현재 살라미스섬에는 그리스 해군 기지가 있다.
기원전 471년 말년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도편 추방을 당하였다.
추방 도중 페르시아 왕과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자 소아시아로 탈출하여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페르시아로 망명한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그리스 공격을 명령하자,
조국과 우정의 갈림길에서 자살을 택해 BC 462년 66세에 사망하였다.
영국 - 프랜시스 드레이크 ( Francis Drake ) 1545 ? ~ 1596. 1. 28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해적, 군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16세기의 스페인은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남아메리카 대부분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필리핀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막대한 금과 은이 유입되었다.
또한 레판토 해전에서 무적함대로 오스만 제국과 지중해 패권을 놓는 싸움에서 승리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 되었다.
16세기 펠리페 2세때의 스페인의 영역, 붉은색이 스페인이고 파란색이 포르투갈의 영역이다.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해적들을 국가 공인 해적으로 포섭하여
금ㆍ은을 운송하던 스페인 선박의 막대한 재물들을 약탈하게끔 하였는데 그 해적중 한 사람이 드레이크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처녀 여왕이라 불렸으며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577년 엘리자베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세계 일주를 하면서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배가 보이는 족족 모조리 약탈하였다.
스페인의 막대한 재물을 들고 금의환향한 드레이크 덕분에 영국의 국고는 크게 풍족해졌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영국에 사략질을 그만 둘 것과 동시에 드레이크를 처형할 것을
권고 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림과 동시에
스페인의 종속국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당시 영국은 스페인에 비하면 섬나라에 불과하여 전쟁만은 피하고자 하였으나,
약이 단단히 오른 스페인은 1588년 5월 무적함대 150척을 영국해협에 보냈다.
칼레 해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본 영국함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면전 대신 게릴라식의 치고 빠지기 전술을 선택하였다.
결국 1588년 7월 28일 칼레에서 두 함대가 전면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거대하고 함대끼리 밀집하게 뭉친 전술을 사용하였기에 영국 함대가 이를 쉽게 격파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마침 바람이 영국 함대에 유리하게 불기 시작하여
이때 드레이크는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攻) 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시켰다.
대영제국의 최대 영역, 지구 육지 면적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670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칼레 해전에 패배한 스페인은 당장 내리막을 걷지는 않았지만,
당시 변방의 섬나라 영국에게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페인을 격파하였다는 자부심과
스페인,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던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어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며
17세기부터 20세기 초 까지 흔히 불리우는 대영제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기함인 골든 하인드 호, 1973년에 실제 크기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후 드레이크는 1595년에 서인도 제도 원정 도중 열병에 걸려 이듬해 1596년 1월 28일에 열병으로 51세에 병사하였다.
사후 영국에서 넬슨 제독과 더불어 최고의 바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영국 - 허레이쇼 넬슨 ( Horatio Nelson ) 1758.9.29 ~ 1805.10.21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조국을 지켜낸 허레이쇼 넬슨
나폴레옹은 영국을 무너트려야 전 유럽을 프랑스가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당시 영국은 경제적 난국에 처해 있었다. 1801년 나폴레옹 타도에 앞장선 피트내각이 실각하자 다음의 애딩턴내각이 화평을
제의하여 아미앵 조약이 성립되었다.
강화가 이루어진지 얼마 안되 나폴레옹은 영국을 점령하고자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유럽 최강의 프랑스 육군은 영국인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영국에 프랑스군이 상륙하면 영국의 운명은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넬슨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와 대결하는 중심인물이었으며,
일생 동안 수많은 해전을 지휘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오른쪽 눈과 팔을 잃었다.
그리고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에서 그의 마지막 해전이 시작 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나폴레옹은 영국 원정군의 상륙 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영국 함대의 봉쇄를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영국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였다. 프랑스의 육군이 영국 상륙만 남겨 놓고 있었는데
넬슨이 이끄는 27척의 함대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을 트라팔가르에서 기습하였다.
넬슨 제독의 기함인 HMS 빅토리 호, 1765년에 건조된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항에 전시되어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넬슨의 함대는 2열종대로 돌진하여 적의 대열을 갈라놓는 '넬슨 터치'라는 이름의 전법을 사용하여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 21척을 나포하였으며 1척을 침몰, 578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7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반면 영국의 침몰된 배는 단 1척도 없었으며 가벼운 피해로 끝났다.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의 꿈이 바다에 수장되는 순간이었다.
넬슨의 최후
하지만 넬슨 제독은 승리 직전 프랑스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세 시간 동안 부상을 당한 채 지휘를 계속하였고, 영국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 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자신의 조국을 구함과 동시에 기함 빅토리 호에서
1805년 10월 21일 47세에 전사하였다.
한국 - 이순신 ( 李舜臣 ) 1545.4.28 ~ 1598.12.16
23번 싸워 23번 이긴 충무공 이순신
1592년 ~ 1598년 2차에 걸쳐 발발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노량 해전 등 연전연승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켯다.
전후 한국 역사에서 군신, 성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이순신은 32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1591년 47세에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1592년 음력 4월 13일 15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 하였다.
동래성 전투, 동래성의 송상현 장군은 죽기 직전 한양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전쟁 개전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으며,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 같은 해 음력 6월 13일 평양이 함락 되었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전 60일 만에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 짓밟히게 되었다.
육지에서 계속 패전하고 있을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침입보고를 받자 출정하여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역전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산도 대첩, 이순신은 학익진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597년 2월 25일에 이순신을 파직하여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1597년 7월 16일에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대패하여
원균을 비롯한 수군 2만여명이 궤멸되었다.
7월 22일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미 수군을 정비했을 때 함선은
고작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육지에서 싸우도록 명령을 하였다.
명량대첩, 정유재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신이 살아있는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장계를 올린 뒤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전에서
13척(나중에 1척이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 전선 31척과 수군 18,460 명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반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 수군은 기적적인 대승을 거두고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둔 일본군은 명량대첩의 패배로 전략이 모조리 무산 되었으며,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죽자 총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 수군이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여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여졌다.
이순신의 최후, 조선 수군은 노량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에야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알았다.
노량 해전에서 일본 전선 450여척이 격파당하고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 수군은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조선과 일본의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7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패배한적이 없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올리며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하였다.
노량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며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자신의 기함에서
1598년 12월 16일 54세에 전사하였다.
미국 -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 Chester William Nimitz ) 1885.2.24 ~ 1966.2.20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미드웨이 해전, 산호해 해전, 솔로몬 섬 전투에서 승전 하였으며, 일본군을 괴멸시켰다.
잠수함 분야에서 미국 최고 권위자였으며 1944년 12월 19일에 미 해군 최초로 5성 장군이 되었다.
니미츠는 22살에 구축함 디케이터호의 최연소 함장이 되었다. 그러나 구축함이 좌초되는 바람에 징계를 받아
당시 해군 내에서 홀대 취급 받던 잠수함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잡아
훗날 잠수함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의 여파로
당시 미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함대를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전함이 한 척도 없었고, 항공모함은 3척에 불과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전함의 포격전 없이 항공모함 함재기와 항공기, 어뢰공격, 폭격만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렸다.
일본은 산호해 해전에 이어 미드웨이 공략에 나섯는데
사전에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 작전이 암호 해독으로 발각이 되어 일본 해군은
미국 해군이 미드웨이에서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벌떼처럼 달려든 미국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항공모함 4척과 병력 3,500명, 항공기 300대가 궤멸되어 참패를 당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이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이후 일본은 전국의 주도권을 미군에 내주게 되어
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항목 문서에 조인을 하는 니미츠 제독
본래 해상전의 주역은 전함이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의 폭격기에 전함들이 무참히 침몰하는 광경을
목격한 니미츠는 앞으로의 해상전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시대가 될 것이라 말하였다. 이후
잠수함 개발과 오늘날 주류가 된 항공모함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는 원형진을 고안하였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해리 트루먼호)
오늘날 미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을 니미츠급 항공모함이라 부르는데 이는
니미츠 제독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니미츠는 1947년 12월 15일에 퇴역하였으며 생일 직전인 1966년 2월 20일 81세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일본 - 도고 헤이하치로 ( 東郷平八郎 ) 1848.1.27 ~ 1934.5.30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이 20세기 초 열강 대열에 합류한 것은 다름 아닌 러일 전쟁의 승리였다.
당시 서구열강이 동양 국가에게 격파 당한 것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이 도자기나 만드는 야만국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긴 것을 보고서야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러일 전쟁의 승리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러일 전쟁, 승전 이후 일본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맺어 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1894년 청일전쟁 때 함장으로 지냈으며, 1904년 러일전쟁 때는
함대사령장관으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정자전법으로 격파하며 동해 해전에서 대승,
발틱함대 38척 중 19척을 침몰시켰으며 사령관을 포함해서 6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발틱함대가 극동의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
영국의 수에즈 운하를 거쳐 가야 했는데 당시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이 통행을 금지하여
발틱 함대는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결국 지구 반바퀴를 걸쳐
도착 했지만 해군들의 피로와 일본 함대를 얕잡아본 결과로 일본에 참패 하게 된 것이다.
헤이하치로의 기함이었던 미카사함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폐함하기로 결정 하였으나 니미츠 제독이 복원하였다.
헤이하치로는 1913년에 원수에 올랐으며, 동궁학문소 총재를 지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군인으로써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정치에 개입치 않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제독이라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는 1934년 88세에 사망하였다.
독일 - 카를 되니츠 ( Karl Dönitz ) 1891. 9. 16 ~ 1980. 12. 2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공포의 대상이였던 나치 독일의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되니츠는 제1차 세계 대전 영국을 궁지에 몰아넣은 U보트의 함장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1935년 아돌프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 이후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 되었으며, 잠수함 재건 작업에 착수 하였다.
특히 U보트 건조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늑대떼 전술(Wolf Pack)을 창안하였다.
독일의 U보트 (U-47)
영국의 수상 처칠은 " 2차 세계 대전 동안, 날 두렵게 만든 건 오직 U보트뿐이었다. " 라고 기록하였는데 되니츠 제독의 조직과 전술로 유보트는 연합국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대서양의 제해권은 연합군측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었다. 되니츠의 독일 잠수함대는 대서양의 연합군 상선을 모조리 침몰시키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대서양 호송 선단의 배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었다.
되니츠와 U보트
특히 모든 물자의 보급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영국 수상 처칠은 대서양전투라 선언을 하고 대서양의 안전한 해상수송로 확보를 위한 작전에 전력을 쏟았다.
연합국의 독일 진격의 발판이 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1945년에 터키, 사우디아라비아가 연합국에 참전하여 지중해 해상권은 연합국에 넘어갔고,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북해, 영국 해협, 대서양의 해상권도 상실되었다.
이후 카를 되니츠는 노르웨이 방면으로 반격을 꾀했으나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이라크, 리비아 등이 항복함으로써
노르웨이의 진로도 곧 차단되었다. 이후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대서양 해전도 종결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뒷줄의 맨 왼쪽의 인물이 카를 되니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U보트들은 연합국 함정 148척을 비롯하여, 상선 2759척을 격침해 무려 1400여만t의 물자와 장비를 수장시켰고,
약 20만여 명의 사상자를 초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였으며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첫댓글 진짜 스페인 전성기 때 영토는 뎌 인간게이머의 수준임 ㄷㄷㄷ
영국은 넓긴 하지만 대부분 거의 빈땅에 깃발 꽂은 거 -->
나도 대영제국 멋있어 하지만, 로마와 몽골제국 등이 군사적으로 더 대단하다고 평가하고 싶음
그렇죠 ㅋㅋ 당시 스페인이랑 포르투갈이 거의 독점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었으니 그냥 마구잡이로 가서 원주민들 학살하고 빼앗고 ㄷㄷ..
니미츠가 미사카함을 살려둔 이유가?
빠돌이라서 미카사함이 보존됨
위키백과를 인용하자면..
영국인 죤 루빈이 영자지〔저팬타임즈」에 투고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고 미국 해군은 제독 체스터 니미츠가 동조하여 복원 운동이 일어나서 기념함 미카사로서 정비되었다.
아마 니미츠 제독이 도고를 존경하였기에 복원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칼레해전에서 침몰된 스페인 군함은 사실 별로 되지 않는다는게 사실임. 본국으로 귀항하는 도중 폭풍우 등을 겪으면서 절반 정도가 침몰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