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한 걸음씩 더 앞으로
2019년 개최된 제16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의 우승자는 프랑스에서 온 알렉상드르 캉토로프Alexandre Kantorow(23)였다. 그는 결선 연주곡으로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해 주목받았다. 5월 서울시향과 그는 바로 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글 김나희 음악 칼럼니스트
당신은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한국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콩쿠르 우승자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 중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쿠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지의 영역이다. 콩쿠르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
차이콥스키 콩쿠르처럼 규모가 큰 대회에 참가한 것이 내게는 처음이자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 전에도 콩쿠르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이만한 수준에 도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수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라운드를 거치면서 서로 익숙해지고 친구처럼, 형제처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같은 꿈을 품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모두가 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인간적으로는 가깝지 않더라도, 한배를 탄 동료 같은 느낌이랄까. 꼭 이겨야 할 경쟁자라기보다 이 뛰어난 친구들이 과연 어떻게 음악을 펼쳐 보일까 궁금했다. 연주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기보다 서로 다른 논리와 개성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드는 거니까. 예선, 본선과 결선을 마치고 다음 날에 수상자 명단을 발표하는 순간에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없을 뻔했다. 정식 시상식은 따로 있고, 이건 그냥 명단 발표라 생각해서 모스크바 관광이나 할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 참가자들이 우리 모두 다 가야 한다고 알려줘서 부랴부랴 참석할 수 있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옷차림이 편안했던 건 그런 이유다(웃음).
후회 없이 연주해서 상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솔직히 1등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 4등 정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명단 발표 때도 4등이 자리에 없다고 설마 큰일 나겠어 싶었다. 그대로 내가 모스크바 구경을 나갔더라면, 데니스 마추예프가 호명한 1등 수상자가 부재한 채 그대로 유튜브로 방송될 뻔했다(웃음).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버지, 바이올리니스트인 어머니를 두고 있다. 어떻게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나?
피아노는 다섯 살에 시작했다. 알다시피 프랑스는 음악원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단계별로 따라가기만 하면 학업을 병행하며 악기 하나쯤은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다. 부모님 모두 음악가라서 남들보다 이르게 시작했지만,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처음에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물론 재능은 있었다. 그렇지만 미디어가 호들갑 떠는 그런 신동은 아니었다. 상당히 평범하고 무난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고, 사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피아노를 커리어로 삼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꽤 유명한 홀과 페스티벌에서 초청을 받으면서도 그랬다. 공부도 좋아했고, 이과 쪽에 적성이 맞았다. 특히 모든 것이 명료한 물리학을 좋아했고 성적도 좋았다.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를 앞두고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이 아닌 이과 계열을 목표로 입시를 준비할 생각도 하다가 마지막에 피아노를 택했다. 파리 필하모니 홀에서 2500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그때가 열일곱에서 열여덟이 될때였는데, 내가 진짜로 살고 싶은 순간은 음악을 통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님은 내 결정과 선택을 기다려 주셨다.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 주면서 음악가로서 먼저 경험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조언을 해주셨다.
당신의 프로필에서 보이는 피아니스트들의 이름만 보아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서울시향과 연주했던 프랭크 브레일리도 보여 반갑다.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에 대해 더 궁금해진다.
프랭크로부터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지휘자처럼 작곡가의 시각에서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지휘를 겸하는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오로지 피아노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나아간 가르침을 주었다. 파리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에서 만난 레나 셰르세프카야는 무엇보다 내 의사를 존중해 주면서 내가 가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끄집어내 준다. 콩쿠르에서 차이콥스키 협주곡 2번을 연주한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다.
1번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1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을 수없이 들어왔고, 또 무척 좋아하는 곡이다.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해석이 아마도 100종류도 넘지 않을까.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해석은 그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분들만을 가져온, 거의 불가능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여겨졌고, ‘굳이 내가 콩쿠르에서 이 곡에 도전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품던 와중에 2번의 악보를 보게 되었다. 악보를 넘길수록 점점 이 곡을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1번보다도 더 쉬웠고, 음악적 구조가 치밀했으며, 더 설득력이 있었다. 레나에게 콩쿠르에서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말했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네 선택이니 한번 지켜보자.’고 말했다. 레나 덕분에 나는 내가 도달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지점까지 갈 수 있었다.
당신이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이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모두 콩쿠르에서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는 아니다.
차이콥스키 2번은 테크닉이 어렵다고 하는데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다른 협주곡보다 딱히 더 어려울 것이 없다. 청중을 한번에 압도한다는 면에서는 1번보다 덜하지만, 작품 곳곳에 엄청나게 반짝이는 순간과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다. 서울시향과의 공연에서 청중들이 이 곡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좋겠다. 브람스 2번 역시 내가 선택했다. 정말 좋아하는 곡이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을 꿈꿀 것이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주자로서 레퍼토리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콩쿠르를 준비했다. 콩쿠르에 우승하면 물론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만, 설령 결과가 안 좋더라도 앞으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면 되는 거니까. 내가 연주자로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한번 시험해볼 목적이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서울을 첫 방문하고 서울시향, 오스모 벤스케와 처음으로 연주하게 된다.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나?
서울시향은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 정명훈이 이끈 오케스트라 아닌가. 파리에서 그의 공연을 봐왔고, 서울시향이 얼마나 훌륭하고 헌신적이며, 열정이 넘치는 오케스트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부모님과도 친분이 깊은 스베틀린 루세브가 서울시향의 악장을 오랫동안 겸하면서 우리에게 서울시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공연에 대한 기대가 무척 크다. 오스모 벤스케와 합을 맞춰 보는 것도 무척이나 기대된다. 그가 헌신적이고,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차근차근 쌓아 나가며 큰발전을 이끌어 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도 깊이가 있다고 들었다. 내가 속한 음반사(BIS)에서 벤스케도 담당하기 때문에, 그간 음반사를 통해 협연 제안이 왔었지만 매번 아쉽게 엇갈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해 모든 공연이 취소되어 고향인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부근에 와 있는 요즘, 무대가 매우 그립다. 이 그리움과 그간의 기대를 담아 서울에서 정말 좋은 연주를 하고 싶다. 서울은 잘 모르지만 한국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 <아가씨>를 인상 깊게 여러 번 보았고, 작곡가처럼 미장센으로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천재라고 생각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기생충> 모두 일관되게 정말 좋았다. 나홍진의 <추격자>는 손에 땀을 쥐며 보았다.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특유의 에너지가 한국 영화에서 느껴진다. 서울도 그런 도시일 것이라고, 서울시향에 그런 에너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유럽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현명하게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고 있다고 하니, 무사히 이번 연주가 성사되기를, 꼭 서울에 가서 그간 영화로만 접했던 나라를 온몸으로 경험해 보고 싶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어떤 음악적인 목표가 있나?
꾸준히 발전하고 더 나아지는 음악가이고 싶다. 어떤 구체적인 목표는 잘 모르겠다. 코로나19 사태로 집 안에 머무르면서 규칙적인 일상을 살고 요즘은 네 시간씩 연습을 하고 있다. 연주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갖지 못했던 일상이라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번 새로운 도시에 가고, 호텔에 짐을 풀고, 낯선 방에 있다가 간신히 잠들고, 리허설을 가서 낯선 피아노와 만나고…. 이런 생활을 하다 보면 매일 연습하는 루틴이나 시간이 일정해지기가 힘들다. 단조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꾸준함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쌓아 나갈 수 있는 것이 있다. 언론에서 나를 ‘차르’라고 부른다거나, 러시아 음악에 강하다고 하며 나를 규정짓고 딱지를 붙여 분류하려 들겠지만 더 많은 레퍼토리를 내 것으로 하고, 더 깊은 연주를 하고, 더 많은 낯선 도시에 가서 연주를 하는, 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저만치 한 발짝 더 진보해 있고 싶다. 우선은 그렇다.
2020 서울시향 오스모 벤스케의 루토스와프스키 ①, ② 2020년 5월 21일(목) 오후 8시 & 2020년 5월 22일(금)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 피아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티켓 90,000(R), 70,000(S), 50,000(A), 30,000(B), 10,000(C) 문의 158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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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eoulphil.or.kr/perf/view?perfNo=1190&langCd=ko&menuFlag=MFLG0001
::: 서울시립교향악단 :::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공연일정 2020 05 22 금요일 20:00 장소 롯데콘서트홀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 Osmo Vanska, Conductor 연주자 피아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Alexandre Kantorow, Piano 프로그램 제오르제 에네스쿠, 루마니아 광시곡 제1번 Georges Enesco, Romanian Rhapsody No. 1 in A major, Op. 11 루토스와프스키,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Lutosławski, Concerto for Orchestra 더보기 가격 R 90,000 S 70,000 A 50,000 B
www.seoulphil.or.kr
※ 이 글은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SPO>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