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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객사현판]
1606년 중국사신 주지번이 쓴 글씨(가로4.66m x세로1.79m) 로 글자 한자의 크기가 어른키만 한데 남한에는 이보다 큰 글씨가 없고, 평양의 "을밀대"가 약 2m쯤 된다고 합니다.
(400년전 국경을 초월한 사제지간의 오롯한 정이 담겨 있는 사연을 올려봅니다. 내용이 길어서 좀 송구합니다.)
★ 역사속의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
지난 2010년 발표된 문화재청의 국보 및 보물 목조문화재 지정명칭변경에 의해 보물 583호 전주 객사가 편액을 따라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지방관들이 한양에 있는 임금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하던 곳으로 왕궁대행의 의미가 있었으며, 관료나 사신들이 머물다가는 곳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관(館)의 개념, 즉 객사라 흔히 생각하는 것의 의미보다는 왕궁 대행의 예(禮)를 지키는 공간의 의미가 더욱 짙었던 곳이었다.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풍(豊), 패(沛)는 풍남문(豊南門)과 패서문(沛西門)의 풍(豊), 패(沛)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한나라 태조 유방의 고향이 풍현의 패읍이이였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건국자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실질적인 고향은 전주가 아니나, 이성계의 선대가 전주에 살았음으로 인해, 이성계의 본향이 전주가 되는것으로, 풍패(豊沛)라는 말로써 그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 인 연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썼다는 전주 풍패지관 편액.
이런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편액에는 오래된 인연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한 글자의 세로 길이가 1.79m로 왠만한 성인남성의 키보다 크고, 네 글자를 합친 가로의 길이는 무려 4.6m가 되는 풍패지관(豊沛之館) 편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편액이라고 한다.
이런 엄청난 크기 현판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명나라의 재상을 지낸 주지번이다. 명나라의 재상까지 지내었던 주지번이란 사람이 어떻게 한양도 아닌 전주에 이런 편액을 남겼을까?
★ 1593년, 임진왜란으로 지원군을 청하러 송강 정철이 이끄는 사신단이 명나라로 향했고, 이때 표옹 송영구가 서장관(문서관리 총책임자)으로 사신단에 합류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 머물던 숙소에서 표옹 송영구는 숙소에서 허드렛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진경을 외는 한 청년을 마주하게 된다.
표옹 송영구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어려운 책들을 외는 청년에 사정을 물었고, 그 청년은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는데 과거에 몇차례 낙방하여, 귀향할 여비조차 없어 이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정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을 기특하게 여긴 표옹 송영구는, 과거시 답안을 작성하는 요령과 돈, 서책 등을 주는 도움을 준다.
표옹 송영구는 사신단 업무를 끝내자마자 귀국하고 그 청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작별2년 후인 1595년 주지번은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한 것이다.
그로부터 11년 뒤 표옹 송영구가 도와주었던, 그 청년은 명나라 사신단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조선에 방문을 하게 된다. 1606년 명나라의 황태손이 태어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조선으로 향하는 사신이 꾸려졌고, 표옹에게 도움을 받았던 청년, 주지번이 사신단의 최고 책임자로 조선에 방문하게 된다. 이때 선조가 교외까지 나가서 주지번을 맞이 할 정도로 주지번은 고위급 인사가 되어 조선에 온 것이었다.
표옹 송영구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던 주지번은 수소문을 해 송영구를 찾았지만, 송영구가 죽었다는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지번이 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 송영구가 익산에 거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이 익산까지 행차를 하면, 가는 곳마다 접대를 하기위해 민폐가 심할 것을 걱정했던 주변인들이 송영구가 죽었다고 거짓을 고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주지번은 말 한필과 경호원 1명을 대동하고서 송영구를 찾아 전라도로 향했고, 송영구가 사는 익산 왕궁에 가기 전에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에 머무르면서 지금의 편액을 쓰게 된 것이다.
주지번은 전북 익산 왕궁으러 찾아가 표옹 송영구를 만나게 되었고, 주지번은 송영구에게 명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책들과 함께 선물을 남긴다. 전북 익산 왕궁면에 있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인 망모당(望慕堂)은 송영구가 부친상을 당한 뒤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늘 망모하기 위해 집의 후원 구릉에 세운 누당이다. 송영구를 만나러 왔던 주지번은 송영구가 세운 망모당의 편액을 고쳐 써주었고, 풍수에 있어서도 뛰어났던 주지번은 송영구의 사후 명당 묘자리(음택지)를 점지 해주었다고 하니, 주지번이 송영구에 대해 느끼는 감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타국만리 떨어진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보여준 것이다.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은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며 지금도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보기드문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문화재이다.
★★ 孝의 고장 익산 망모당(望慕堂)
효(孝)의 고장 익산을 대표하는 ‘망모당(望慕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왕궁면 광암리에 있는 이곳은 선조(재위 1567∼1608) 때 문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선조 40년(1607)에 부친상을 당한 뒤 집 뒤쪽 언덕에 누각을 짓고, 동쪽 우산(지금의 완주 봉동)에 모셔져 있는 선영(先瑩)을 간절히 생각하여 ‘망모당’이라 지었다.
우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망모당은 표옹이 얼마나 선친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망모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일반 누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누각 하나에 빙 둘러쳐진 담장이 고작이다.
사실 망모당은 현판의 글씨로 유명해졌다. 중국 명나라 최고 문장가인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을 새긴 것이다.
어떻게 중국인이 현판글씨를 써줬을까. 연유를 살펴보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표옹문집(瓢翁文集)’에서 표옹과 주지번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표옹은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 그때 나이 어린 주지번은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이었다.
표옹은 한 청년(주지번)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숙소의 심부름꾼이 이를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청년은 과거를 보기 위해 남월에서 북경으로 올라왔는데 여러 번 낙방하여 노잣돈도 떨어지고 호구지책으로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표옹은 이를 불쌍히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지만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
표옹은 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해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청년 주지번은 표옹의 도움으로 을미년(乙未, 1595)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의 수석합격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학사 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다.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다. 한림원은 당대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 주지번은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쓰는 등 한림원에서도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주지번은 1606년 조선을 방문한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온 사신. 그것도 공식외교 사절단 최고 책임자인 정사(正使) 신분이었다.
주지번은 이때 전라도 왕궁 시골로 직접 행차할 것을 결심한다.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광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른 주지번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 글씨를 썼다.
‘풍패(豊沛)’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태어난 지역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 즉 풍패는 황제의 고향을 의미한다.
표옹을 만나러 왕궁 광암리에 찾아왔건만 표옹은 없었다. 표옹이 함경도로 좌천됐기 때문이다.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주지번은 정성을 다해 글씨를 쓴다.
망모당이란 누각이 지어진 연유를 알고 표옹의 효심에 깊이 감복해 망모당의 현판을 썼다. 400년 전 두 사람의 만남과 인연이 그 현판 속 세 글자에 깃들어있는 것이다.
주지번은 희귀한 서책 80권을 표옹에게 전했다. 또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하여 줬다. 사후 영혼이 편히 쉬도록 음택을 정해 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망모당은 문화의 힘으로 중국을 감동시킨 표옹 송영구와 명나라 대학자 주지번과의 아름다운 사제지정을 머금고 있다.
망모당으로 가는 마을 입구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충숙공 표옹 송영구 선생 강생 유지비’다. 표옹의 13대 손 송재규 씨가 주도해서 세웠다.
<"500년 명문가의 내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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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물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 1556-1620)는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 호는 표옹·일표(一瓢), 강직한 선비로 백련거사(白蓮居士)로 불리기도 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표옹은 1584년(선조17)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송강 정철의 종사관,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지평(持平) 때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헌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0년 이조좌랑에 이어 청풍군수 등을 지내고, 1607년 성주목사로 나갔으나 권신 정인홍의 미움을 사 파직 당했다.
1610년(광해군2) 사간에 이어 필선(弼善)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611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1616년 병조참판이 되어 1618년 폐모론을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고 파직 당했다. 전주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다.
[2] 사당[망모당]
**낙관: 본문 옆에 쓰인 글.
"주지번서(朱芝番書)"라 쓰고,
인장(호는 陰, 이름은 陽)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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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에 있는 객사 금성관(錦城館)
①필자가 추정컨대, 나주시에서도 이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 전혀 모르고 있은데 주지번이 쓴 글씨 "館(집관)"의 글자가 전주현판 글씨체와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②한편 의견은 당시 황제난 다름없는 사신이기 때문에 주지번체가 새로이 생겨서 유행 했다고 하니 명필 김정희 추사체 처럼요. (필자가 그때 그 시절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소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첫댓글 역사적인 우연곡절과 현판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헌 원광대학교교수가 쓴 "500년 조선명문가의 내력" 읽고 전주에 살면서도 몰랐던 내용을 알게되고
서예공부하던 참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전주가 교육문화의 도시가 된 귀감사례 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