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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와트, 새로운 증기기관을 발명한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성(姓)을 말해본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그 전구 몇 와트지?”라고 물었다면 말이다. 영국과학진흥협회는 제임스 와트의 공적을 기려 1889년 ‘와트’를 일률과 동력 단위로 채택했고, 1960년 제11차 도량형총회에서 국제단위계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그의 증기기관은 기술 혁신이 세상을 크게 바꾼 대표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진정한 의미의 증기기관 탄생
제임스 와트의 할아버지는 수학 교사, 아버지는 선박기술자이자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양 계급 출신이었다. 와트는 어린 시절 주로 집에서 어머니에게 교육 받았고 고향 그린녹의 문법학교에서 배웠지만, 라틴어와 희랍어 같은 고전어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학을 좋아했다. 1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세가 기울었다. 와트는 기구 제작을 배우러 런던에 갔다가 1년 만에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로 돌아와 기계 제작 사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7년 이상의 도제(徒弟)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글래스고의 길드에 가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와트의 남다른 능력을 인정한 글래스고 대학 교수들의 배려로, 1758년 대학 안에 작업실을 차릴 수 있었다.
증기기관이 처음 사용된 산업 분야는 광업이었다. 지하수면보다 깊은 곳에 있는 갱도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의 동력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693년 토머스 세이버리가 증기를 압축시켜 발생하는 기압차를 이용하는 양수 펌프를 개발했다.
그리고 토머스 뉴커먼이 이를 개량하여 1712년에 실용화시켰다. 콘월의 구리 광산에서 처음 사용된 뉴커먼기관은, 실린더 안의 수증기 압축과 팽창에 따라 피스톤이 왕복 운동하는 방식이었다. 대기압만으로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대기압 기관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뉴커먼기관은 증기 압축을 위해 물이 한 번 분사될 때마다 실린더 전체가 냉각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많았고 석탄 소모량도 많았다. 1764년 글래스고 대학 수리소에서 일하던 와트는 뉴커먼기관의 수리를 부탁받고 대폭 개량에 착수하여 1769년 1월 5일,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 새롭게 고안한 방법’에 관한 특허를 취득했다. 그는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니라 실린더와 연결된 별도의 응축기에서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니라 증기압력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응축기만 냉각되고 실린더의 열은 보존되어 효율성이 매우 높았고, 석탄 소모량도 뉴커먼기관에 비해 4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와트는 또한 피스톤의 상하운동 모두를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증기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볼턴앤드와트 설립, 매튜 볼턴과의 동업으로 날개를 달다
버밍엄 출신의 기계기술자이자 사업가 매튜 볼턴이 없는 와트는 상상하기 힘들다. 1760년대 중반 버밍엄 북쪽 소호에 설립한 공장에서 금속제품을 만들며 사업을 확장하던 볼턴은, 공장이 위치한 곳의 수량이 줄어들어 공장 가동에 필요한 수력을 얻는 데 곤란을 겪었다. 볼턴은 증기기관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1766년 와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문제를 논했고, 1768년 와트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1769년 와트가 새로운 증기기관 특허를 얻자, 볼턴은 그것을 매우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라 생각했다. 이에 비해 와트는 특허를 얻은 뒤로는 그 시장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작업으로 관심을 돌린 상태였다.
1769년. 1월 5일자로 제임스 와트가 취득한 증기기관
특허장. 특허 제목은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새롭게 고안한 방법'이다.
1787년에 제작된 아트식 증기기관. 왼쪽에 있는 보일러가 증기를 공급한다. 실린더 피스터의 상하운동이 바퀴를 움직인다.
와트의 동업자 존 로벅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볼턴은 로벅이 자신에게 지고 있던 빚 1,200파운드를 로벅이 지닌 증기기관 특허권 지분으로 대신 상환 받았다. 그것은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권 전체 지분의 3분의 2에 해당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많은 광산들이 와트가 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성 있는 증기기관을 출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774년 볼턴은 와트를 설득하여 버밍엄으로 오게 했고, 1775년 볼턴앤드와트(Boulton &Watt)를 설립했다. 그러나 14년의 특허권 기간 중 이미 6년이 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볼턴은 의회에서 로비를 펼쳐 특허권 기한을 1800년까지 연장시켰다. 와트와 볼턴은 당대 최고 수준의 철제 및 기계 기술자 존 윌킨슨의 도움을 받아 증기기관을 보다 시장성 있게 개선하여, 1776년 첫 제품 두 개를 내놓았다.
이후 볼턴앤드와트는 증기기관 자체를 생산하기보다는, 공장과 광산에 일종의 기술 컨설팅을 제공했다. 증기기관 설계도를 제공하고 부품을 다른 업자들에게 주문 조달하여, 공장이나 광산 현지에서 그것을 조립할 때 기술자를 파견하여 조립과 설치를 이끌게 한 것이다. 볼턴앤드와트는 뉴커먼기관을 사용하던 때의 석탄 채굴량과 와트식 증기기관을 사용할 때의 채굴량을 비교하여, 그 차이에 비례하는 수익을 받았다. 와트식 증기기관을 설치한 뒤 25년에 걸쳐, 연간 채굴량 차이 분의 3분의 1을 수익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많은 광산업자들은 이러한 지불 조건에 불만을 느끼고, 와트와 볼턴의 특허권을 폐지하라는 청원을 의회에 내기도 했다.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 세계를 변화시킨 와트의 증기기관
영국 버밍엄 특허 사무소 앞에 있는 볼턴과 와트,
그리고 그들과 협력해 증기기관 개량에 크게 기여한
윌리엄 머독의 상(왼쪽부터)
증기의 열에너지를 기계동력으로 바꾸는 증기기관에 대한 구상과 시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문제는 기술적 효율성을 높여 폭넓게 일반화, 상용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제임스 와트다. 그는 증기기관 자체의 발명자가 아니며, 기존 증기기관의 단점을 대폭 개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와트식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한 사람이다. ‘발명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피해가기 힘든 일종의 숙명, 즉 도대체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독창적 발명인가, 하는 문제와 논쟁에서 와트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분리 응축기를 독자적으로 발명해내는 등 증기기관의 일대 혁신을 가져옴으로써, 산업화의 동력이 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기술 혁신이 역사의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하나의 기술 혁신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 혁신을 확장 적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그러한 확장 적용을 가능케 하는 다른 기술 혁신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지하수를 배출시키는 용도에만 그치지 않고, 광산에서 먼 곳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데에 증기기관을 사용한 철도 운송이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은 와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25년 영국 북부 더럼의 한 광산에서 시작되었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발명한 뮬방적기가 면사의 대량 생산으로 이어진 것도 중요한 사건이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증기기관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증기기관의 시대’를 이루는 하나의 부분이기도 하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산업혁명 시대를 연 주역들 가운데 하나이자,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기술 혁신과 발명의 플랫폼 구실을 했다. 그것은 연료와 원료를 먼 거리의 생산 공장까지 대량으로 빠르게 운반할 수 있게 했고, 공장을 자동화시키고 그 입지 조건을 크게 넓혀놓았으며, 수력에 의지하느라 가동이 중단되곤 했던 공장들이 일 년 내내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운송은 규모의 경제를 낳으면서 자본의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운용과 생산 체제의 혁명적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와트의 증기기관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시간을 발명한 인물, 세상을 이롭게 한 인물”
와트는 1800년에 은퇴했다. 이 해에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권이 만료되었고 볼턴과의 동업 관계도 끝났지만, 동업 관계는 대를 이어 와트의 아들 제임스 와트 주니어와 볼턴으로 이어졌다. 와트는 은퇴 후에도 자택의 작업실에서 기름 램프 개량, 조각상 제작 기계, 망원경을 통한 거리 측정 방법 고안 등 다양한 일에 몰두하고 프랑스와 독일로 여행도 다녔다. 그리고 1819년 8월 25일 버밍엄의 핸드워스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있는 제임스 와트 상(像). 조각가 프랜시스 챈트리의 작품으로, 본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던 것을 옮겨놓았다.
다음은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있는 제임스 와트 상(像) 옆에 걸린 기념비 문구의 일부다. “독창적 천재성의 힘을 발휘하여 증기기관을 개선해 조국의 자산을 확장시키고 인간의 힘을 향상시켰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과학의 꽃들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위치에 올랐다. 그는 세상을 진정으로 이롭게 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와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오전 8시 17분이란 매우 각별한 그 무엇을 뜻한다. 그것이 통근 열차의 출발 시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에게 그런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와트와 스티븐스(증기기관차를 실용화 한)는 시간을 발명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글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제임스 와트와 증기기관
1.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
영국의 기계기술자. 팽창작동ㆍ복동기관ㆍ유성기어장치의 회전기관ㆍ평행운동ㆍ보일러으 매연방지장치ㆍ원심조속기ㆍ압력계 등의 발명과 마력의 단위에 의한 동력의 측정 등이 주요한 업적이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아버지 일터에서 보내는 동안 수세공(手細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머 스쿨을 마친 뒤, 1755년 런던으로 가 수학기계공 견습이 되었고, 1757년 글래스고대학 수학기계공으로 임명되었다. 1763년 최초 발명인 투시화법기(透視畵法器)를 만들어 낼 때까지 J. 블랙, J. 로벅 등의 과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64년 와트는 대학으로부터 뉴커먼 배수기관(排水機關) 모형의 수리를 의뢰받았다. 이 기관의 열효율이 좋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1765년 콘덴서를 분리하는 착상을 하였다. 이 착상을 로벅이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나 피스톤의 패킹 문제에 부딪쳐 개발은 진전되지 못했다.
동료인 크레이그가 죽자, 1767년~1774년까지 스코틀랜드 운하측량사(運河測量師)로서 일하였다. 1768년 버밍엄의 업자 M.볼턴을 알게 되었고, 1769년 로벅의 원조를 받아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1773년 로벅이 파산하자 1774년 볼턴이 와트기관의 특허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1775년 볼턴은 와트의 특허권을 25년간 연장함으로써 버밍엄에 공장을 경영, 볼턴과 와트의 유명한 공동사업 ‘볼턴-와트 상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들 최초기관은 1767년 운전을 개시하였으나, 실용화되기까지는 다시 5년이 걸려 이 기업은 1780년대까지는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1775년~1780년대까지 와트는 그의 기관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팽창작동(膨脹作動)·복동기관(複動機關)·유성기어장치의 회전기관(1782 특허)·평행운동(1784)·보일러의 매연방지장치(1785)·원심조속기(遠心調速器)(1788)·압력계(1790) 등의 발명과 마력(馬力)의 단위에 의한 동력의 측정 등은 주요한 업적이다. 또 버밍엄의 진보적 과학자 등의 모임인 ‘달의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J.프리스틀리와 만나면서부터 화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4년 새로운 기업 ‘볼튼-와트 및 가족상회’를 설립하여 점차 자녀들에게 사업을 이양해 가는 한편, 1795년 소호의 주조공장을 개설, 기관의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0년 최초 특허권의 기한이 만료됨으로써 볼턴과 공동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여생을 조각기계의 발명에 바치다가 히스필드에서 죽었다.
2. 증기기관(蒸氣機關, Steam engine)
고압증기의 정적압력(靜的壓力)을 실린더 내의 피스톤에 작용시켜 피스톤의 상하 왕복운동을 동력으로 사용한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증기기관은 1세기경 헤론이 발명한 아에올리스의 공이다. 하지만 증기기관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산업혁명 시기까지 미뤄진다. 1698년 영국의 T. 세이버리는 증기를 응축시킬 때 발생하는 기압차를 이용한 펌프를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이후 영국에서는 방적기계·직물기계 등이 급속히 발달하여 공업이 점차 발전하게 되고, 인구의 증가 등의 요인으로 석탄의 채굴이 활발해지고, 점점 깊은 갱도가 개발되면서 지하수의 배수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자 펌프를 구동(驅動)하는 강력한 동력이 요구되었다. 1712년 T.뉴커먼은 실린더내에 증기를 도입하여 피스톤을 상승시키고 증기가 냉각하면 실린더 내의 압력이 저하되어 피스톤을 대기압으로 내리누르는 대기압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글래스고대학의 수리공장에 근무하던 J.와트는 뉴커먼의 대기압 증기기관의 수리를 의뢰받고 성능개선에 노력한 결과 증기를 실린더 내에서 응고시키지 않고 다른 용기(응축기)에 이끌어서 응고시켜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닌 증기압력으로 구동하는 발명을 하여 오늘날 증기기관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와트는 각 행정간에 불필요한 가열과 방열을 줄이고, 피스톤의 상하운동을 모두 동력에 활용한 복동식 기관을 개발하여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이후 와트는 차동톱니바퀴를 이용한 플라이휠을 이용하여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장치를 고안하였다. 이로부터 증기기관은 단순한 배수펌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동력원으로써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증기기관은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동작제어를 위한 복잡한 밸브 등이 추가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열기관에 비해서는 훨씬 간단한 구조를 갖고 있어 취급이 쉽고 고장도 적은 편이다. 또 고압증기를 이용하므로 시동시 회전력이 강하고 저속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열효율이 비교적 떨어지고 고속 회전이 어려우며 보일러, 복수기 등이 필요하여 소형화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3. 증기기관의 구조
보일러에서 보내진 증기를 밸브실로 이끌어 여기서 밸브의 작용에 의하여 피스톤의 앞뒤에 번갈아 증기를 보내어 실린더 내에서 피스톤을 왕복운동시킨다.
이 피스톤의 왕복운동으로 피스톤 로드·연결봉에 이어진 크랭크에 전달되어 크랭크축을 회전시킨다. 증기를 피스톤의 앞뒤에 보낼 때는 슬라이드 밸브의 작용에 의하며, 이 슬라이드 밸브는 크랭크축에 붙여진 편심륜(偏心輪)에 의하여 전후로 움직여진다. 크랭크축에는 회전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플라이휠이 붙어 있다.
피스톤 양쪽에 증기를 보내는 것을 복동식(複動式)이라 하고 한쪽에만 증기를 보내는 것을 단동식(單動式)이라고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복동식이다. 또, 1개의 실린더로 증기를 배기압력까지 팽창시키는 단식기관과 여러 개의 실린더로 증기를 차례로 팽창시키는 다단(多段) 팽창기관으로 나눌 수도 있다. 매분 회전수 200 이상을 고속기관, 100~200까지의 것을 중속기관, 100 이하의 것을 저속기관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증기기관은 구조가 간단하고 고장이 적고 취급이 쉬우며 회전을 시작할 때의 힘이 크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역전도 간단히 할 수 있으나 열효율이 낮고 회전속도가 느리며 증기터빈과 같이 몇 만 마력의 대마력을 얻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보일러·응축기가 항상 필요하여 소형경량화가 어려운 등의 결점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원동기였으므로 증기터빈이나 내연기관이 실용화될 때까지는 철도의 기관차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밖에 공장동력으로도 사용되어 한때 증기기관 전성시대도 있었다. 대출력의 원동기에는 증기터빈, 중소출력에는 내연기관이 사용되어 증기기관의 용도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공장의 증기 해머, 윈치의 원동기(原動機) 등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된다.
스티븐슨
스티븐슨
탄광기관부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의 조수가 되고, 이어 기관부 ·기관공이 되어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에 통달하였다. 그 후 킬링워스탄광에서 탄광주를 설득,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1814년 7월 탄광에서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1823년 뉴캐슬에 세계 최초의 기관차 공장을 설립하고, 1824년 스톡턴∼달링턴 간의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가 부설되어, 1825년 그의 공장에서 제작한 개량형 기관차 로커모션호(號)를 달리게 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824년부터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철도를 부설하고, 1829년 그의 로켓호를 달리게 하여, 1830년에 정식 개통시켰다.
그 후, 1830년대부터 거의 모든 선진국에 증기철도가 건설되게 되었다. 그 자신도 벨기에 ·에스파냐 등에 진출하여 많은 철도 부설사업에 종사하였다. 1847년 철도관계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버밍엄에 창설한 세계 최초의 기계학회(Institution of Mechanical Engineers)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